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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Braun Mar 25. 2024

농담과 한정판의 관계

그라운드시소 서촌 & HIPGNOSIS (24.03.24)

 실패다.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강신청부터다. 소문의 학교 앞 PC방도 소용없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되고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마우스를 클릭하고 나면 십중팔구 에러가 난다. 숨 막히는 5분이 지나고 겨우 화면이 정체를 드러내면 인기과목은 이미 꽉 차있어서 차선의 과목으로 재빨리 눈을 돌린다. 아뿔싸, 한 텀을 또 뺏겼다. 애초에 전략이 좋은 친구들은 처음부터 차선의 과목을 노렸을 거다. 결국 차차선도 안 되는 강의들을 쓸어 담고 나면 남는 건 술안주가 되어버린 수강신청 실패담뿐이었다. 그렇게 학교 앞 술집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시스템을 한탄하며 거하게 취하곤 했다. 변명이 아니라 학창 시절 학점이 좋지 않은 이유는 수강신청 시스템도 한몫할 거다.

 아침부터 익숙하지만 그리운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새로운 시도를 해본 내가 기특하기도 하다. 처음으로 한정판 구매를 시도했다. 평범한 검은색 더비슈즈에 앞뒤로 은색을 덧입혀 놓은 A와 B브랜드의 컬래버레이션이었는데 그 은색이 주는 위트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어디선가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중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였을까 오픈도 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사이즈는 품절로 표기된다. 기분이 싸했다. 직업적 감각이 발휘된다. 경험상 아직 오픈하지 않은 상품의 특정 사이즈가 품절로 표기된 다는 것은 분명히 재고 시스템 연계의 결과물일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애초부터 내 사이즈의 신발 옵션은 온라인에서 판매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24일 8시 아침 정각에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는 웹사이트에 500번 에러가 뜬다. 역시는 역시지. 체념이 빨라진 중년의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전시회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미세먼저 하나 없는 하늘을 보니 실패의 감정은 온대 간대 없이 평온해졌다. 이번주는 어디로 향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익숙한 서촌으로 길을 정한다. 전부터 건물자체를 눈여겨봐 왔던 '그라운드 시소'라는 전시장의 티켓을 예매하고 목적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름이나 명칭에 예민한 나로서는 이 전시장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문 명을 보니 'Ground SEESAW'이다. 멋진 이름이다. 멋진 이름을 가진 공간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시는 '한 시대 힙했던 LP 디자인의 선구자'인 HIPGNOSIS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서촌이 꽤 오래전부터 관광지가 되어버린 이유도 있고 한편으로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대림 미술관의 전시가 흥행위주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그라운드 시소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라 생각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디자인과 꾸밈이 예쁘면 그 속은 비었을 거라는 생각은 꽤 헤어 나오기 어려운 고장관념에 속한다. 이번 HIPGNOSIS의 전시가 어느 정도 고정관념을 깨는데 도움을 주었다.


 전시는 풍부했고 On/Off가 적절히 결합된 형태였다. 전시 시작에 85%로 시작한 핸드폰 배터리가 관람 이후 68% 정도가 된 것을 보면 Online의 경험도 짜임새 있게 만들어 놓은 반증이 된다. 특히 전시 이후에 연관된 Playlist들을 정리해 놓은 유튜브 QR코드는 신선한 경험이 되었다. 집에 오는 길 내내 차 안에서 그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며 깊은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경험 측면에서 세세하게 신경을 쓴 부분이 느껴지는 전시였다. 전시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다른 블로그에도 많기 때문에 역시 피하고 싶다. 다만 전시 내내 나를 유혹하는 한 단어를 소개하고 싶었고 그것은 다름이 아닌 '농담(혹은 위트)'이다.


 전체적으로 모든 HIPGNOSIS의 작품에는 '농담'이 넘쳐흐른다. 특히 초기 작품에서 농담이 눈에 띄는데 폴 매카트니의 'Getting Closer'의 티저인 랍스터를 산책시키는 사진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까워지고 있어'를 표현하기 위해 1890년대 프랑스 작가의 애완 랍스터 산책을 모티브로 삼다니. 장난기가 넘쳐흐르는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후기 작품이 될수록 '농담'을 넘어서 '전위'에 가까운 작품이 많아지고 초현실주의로 흐른다.

 애초에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그것을 최대한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것이 최초의 예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을 담는 능력을 예술이라고 이야기하는 한편, 사실적으로 옮길 수 있는 기술적 측면에도 꽤 집중했을 것 같다. 기술과 표현의 저울 위에서 그 경중을 달리하며 트렌드가 변경되는 것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어느 날 자연을 완벽히 묘사하는 기능은 완성되고 결국 사진이 등장하게 되면서 모방은 사람보다 기계가 더 잘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쯤부터 예술은 아마도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라 묘사를 하는 사람의 시선이 담긴 독창성이 그 핵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 독창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농담(혹은 위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Getting Closer' - Paul Maccartney

 예술도 모르면서 잘도 떠들어 댈 수 있는 개똥철학의 근원지를 떠올려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군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군대를 갔다 온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기행을 가진다고 확신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2년 정도 군에 있으면 꽤 특이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프로이트'가 아닌가 싶다. 군생활이 1년쯤 지났을 무렵,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연히 발견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시작으로 책 읽기 취미가 시작되었다. 책과는 담을 쌓아놓고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도 안 되는 '꿈의 해석'을 붙잡고 머리를 뜯고 고민했던 것은 기행에 가깝다. 결국 제대할 때쯤에는 '열린 책들'에서 발간하는 프로이트 전집을 모두 방 안 책상 위에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아직도 이 책들을 제대로 이해한 지는 모르겠다. 어려운 논문을 재밌게 읽었다 말하고 다녔던 어린 나는 지적 허영심에 취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튼 그때 호기심 읽게 읽었던 책이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였다.


 프로이트까지 끌고 와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다. 전문적으로 이야기할 만한 지식이 쌓였다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던 한 문장만 빌려오고 싶다. '인간의 무의식과 농담은 깊은 관계가 있고 농담과 말실수가 발현되는 뒤로는 항상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네가 뱉은 농담과 말실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네 안에 있는 것들이다’ 정도가 될 것 같다.

 농담과 말실수가 무의식에 가까운 것은 논리(의식)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전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논리적인 흐름뒤에 있어야 할 논리적인 것은 결여되고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덜컥 나타나는 것이 농담의 본질이다. 그것이 재밌으면 농담이 되고 분위기가 싸해지면 말실수가 되지 않던가? 물론 발화자의 의도로써 말실수와 농담을 구분하지만 가끔 실패한 농담은 말실수로 치부해 버리고 싶은 생각을 해본 나로서는 그 두 가지는 거의 비슷한 선상에 있다.


 HIPGNOSIS가 활동하던 60~70년대는 꽤 거침없던 시기인 것 같다. 그 농담이 돌림이 없고 직설적이다. 어쩌면 반항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 시대의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기존 논리에 끊임없이 농담을 섞는 방식으로 저항을 한 것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항하고 있었을까?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교과서의 말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 '그들은 기성세대에 저항했다'라고. 어쩌면 어느 시점 이후의 예술활동은 일종의 저항행위였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전의 논리적 흐름을 깨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저항이겠지 싶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현재다. 현재는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를 할까? 아주 위험하지만 조금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현재는 바야흐로 논리의 시대다. 구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는 회사의 권위도 데이터 아래로 무너진다. 결혼 후 역할도 수치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아 분쟁을 겪는다. 모든 면에서 효율과 수치화가 필요하다. 정량화는 평등을 목표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무의식과는 꽤 멀어진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결국 논리를 거스르는 한 마디의 농담과 말실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요즘 핫한 AI 관점에서는 농담과 말실수는 버그에 가깝다. 한편으로는 아이언맨의 AI 비서 자비스에게 관객들이 감탄하게 되는 부분은 자비스의 농담 실력으로 수렴한다. 논리적인 로봇은 당연하지만 자비스가 '농담'을 던질 때 비로소 정말 인간에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논리 사회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받고 있는 게 현실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한정판 구두가 새롭게 다가온다. 브랜드라는 안정적인(낙오되지 않은) 사회적 바탕 위에서 약간의 '농담(혹은 위트)'이 가미가 된 한정판을 그 누구보다도 소비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시대 스트레스에 대한 작은 저항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는 나는 오늘 아침 작은 저항에 실패했다.

'Are you Normal?' - 10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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