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X Gallery & MitateMind (24.03.30)
질문이 많은 편이다. 지금으로서는 언제부터 질문을 이렇게 많이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질문이 귀찮아서 나는 정말 저러지 말아야지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어쩌면 그 시절 아버지보다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이건 아니다 싶지만 끝없이 솟아나는 내 안의 질문은 막을 도리가 없다. '이것도 유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보니 이쯤 되면 중증이다.
최근 친한 친구와 나 사이의 가장 큰 주제는 '중년의 위기'다. 그중에서도 '불혹(不惑)'이라는 단어를 깊게 이야기한다. 아직 약간의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육아라는 시간 촉매제를 써버린 이상, 내일모레면 불혹이 될 텐데 어쩐지 의아한 일은 더 많아 지기만 한다. 물론 질문이 꼭 의심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이 많은 나로서는 이대로 괜찮은가 싶다. '혹하지 않기는 뭘 혹하지 않아.'라고 불평을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수많은 질문 중에 요즘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단어를 뽑아보면 '정체성'이다. 옛 어른 들은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셨다. 누구의 이야기든 경청하며 적 없이 잘 지내는 편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가르침이다. 핵심은 주변과 잘 어울리는 것이 된다. 줄을 잘 서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 안에 있다. 처음 군 훈련소에 입소해서 가장 먼저 고초를 겪는 사람은 십중팔구 줄 맨 앞에 서거나 맨 뒤에 서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생활의 지혜에 가깝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의 가젤 사냥 장면만 봐도 명확해진다. 그런 면에서 맨 앞과 뒤는 본질적으로 같다. 단순히 포식자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운명의 내림차순이 시작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생활의 지혜가 지금도 유효할까? 경쟁이 고도화되면서 무리의 앞 뒤 가젤이 희생당하는 일은 지양할 일이 되었다. 오히려 맨 앞에 서거나 아예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가젤들이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을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가진다는 이유로 존중된다. 오히려 데이터를 휘감고 등장한 사자들은 체력이 약해진 가젤들을 그룹화하고 그중 생각 없이 달리고 있을 가젤을 제일 먼저 타겟팅하여 잡아먹는다. 그러다 보니 세월에 지쳐 약해진 것도 서러운데 생각까지 없으면 정말 피곤해진다.
그래서 일정 세월이 지나면 약해진 체력을 보완할 '정체성'이 필요하고 이것은 한 사람의 서사를 바탕으로 단단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체성'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복합적이다. 좋게 말하면 '정체성'이 되지만 나쁘게 말하면 '꼰대'가 되는 문제가 대표적인 복합성 중에 하나다. 내 안의 나침반이 잘 작동하여 북쪽을 북쪽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내 안의 것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이해받기 어렵다. 개인의 서사를 남이 이해하는 것이 애초에 어려운 데다가 정체성을 통해 나오는 결과물이 탁월하지 않으면 신뢰를 잃기도 쉽다. 따라서 '정체성'을 만드는 일은 꽤 세밀하고 상세한 작업이 된다. 안 그러면 곧바로 '꼰대'로 몰락하거나 무관심의 영역으로 희생된다.
'정체성' 면에서 예술 분야는 조금 더 혹독한 것 같다. 예술의 세계는 새롭게 정의되거나 탁월한 것을 찾게 되는 습성이 있다. 중간이 숨어들 공간이 애초에 없다. 따라서 정체성이 없는 작가는 쉽게 작가로 불리지 못한다. 한편 대중성이 없는 작가는 애초에 대중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참 어려운 분야인 것 같다. 어떻게든 최대한 미움받지 않는 동시에 정체성을 드러내야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만한 스트레스가 또 있을까? 물론 성공의 대상 범위를 줄여서 한 분야로 파고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해고 ‘대중성’의 숙제를 풀어야지만 성공이라는 단어와 연결할 수 있는 분야임에는 확실하다.
이점에서 이번 미타테마인드가 흥미롭다. 작가인 타나카 타츠야는 독창성 측면에서 ‘정체성’이 확실했다. 언어유희를 통한 전위, 끊이지 않는 아이디어, 뒤처지지 않은 공예실력 그리고 최종 작품으로써의 사진 활동은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 돌아가는 식의 프로세스를 지녔다는 인상이 강했다. 또한 전시회장을 본인의 방식으로 세심하게 나누어 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구성을 바꿔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본인의 예술 세계를 ‘미타테(Mitate)’라는 단어의 세계로 집약하고 ‘미타테’를 구현하는 자신의 방식을 정교하게 분류하여 전시해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완벽주의가 느껴진다. 덧붙여 두 가지 섬세한 배려에서 또 한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모든 작품을 아이들도 볼 수 있는 눈높이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시 정보에서도 문자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아이들이 보기 쉬운 위치에 작품과 설명등을 표시했다. 아마도 작가의 전위적인 아이디어 배치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것이 아이들일 것이고 그 아이들이 쉽게 작품을 접하면서 더 좋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을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작품 번역에 대한 이해도와 그 자율성 존중이다. 아무래도 작품 제목에서의 언어유희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 요소가 되는데 직역 후의 의미는 작가가 원하는 의미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작품 제목의 번역이 하나의 창작활동이 되는데 이것에 대해 자율성을 크게 허용했다. 어쩌면 작가가 모든 번역 하나하나를 검수하고 즐겼을 것 같다는 생각도 머리에 스친다. 그만큼 상당히 높은 자율성을 가지고 한국어 번역을 해두었는데 번역과 일본어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가 된다.
대중성 면에서도 합격이다. 회사 동료의 추천을 통해 MPX 갤러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여의도 한복판에 위치한 전시장은 큰 이점이 있다. 최근 더 현대는 최신 문화의 쇼룸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더 현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IFC몰에 위치한 전시회장이지만 그 쓰임은 확실히 더 현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원하는 스트릿 브랜드를 소비하고 힙한 전시회를 관람한다는 점에서 꽤 이상적인 동선이 나온다. 연애 중이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여의도 봄 데이트 코스 오마카세 같은 것을 상품으로 판다면 필수 코스에 포함될 전시가 될 것이다.
글로 정리하고 보니 상당히 완벽한 공간 경험이 된다. 그런데 왜, ‘묻고 싶은 마음’이 발동할까? ‘이걸로 만족스러운가?’ 작가의 ‘정체성’과 ‘대중성’ 사이에 정의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 아마도 전시회의 구성에서 작가의 서사가 빠져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본다. 이 정도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가진 작가라면 분명 작가 가진 서사도 인상적일 것 같다. 그러나 서사에 관심이 있는 것은 지금은 희미해진 오래된 관습에 가깝다. 서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작품의 기발함에 집중하는 전략은 아마도 대중성에 의거한 결정일 것이다. 그 결정이 아쉬운 나의 ‘정체성’은 꼰대에 가까울지 모른다. 서사꼰대 같은 단어가 유효할까?
그런데 전시회에서 유일하게 공개된 작가의 서사가 하나 있다. ‘매일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매일이라는 말에서 역동적인 흐름을 느끼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서사적 단어다. 매일 하루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의 꾸준함은 내 고질적인 ‘묻고 싶은 마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Just Do It. 작가인 나도 그런 복잡한 고민은 안 하고 매일 작품으로 답변하고 있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심각하니?‘라는 작가의 소리 없는 질문에 나는 고질적인 수 많은 질문들을 의식의 한편에 ‘묻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