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 시공時空시나리오 (24.04.07)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이 기억이 왜곡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제처럼 생생한 것만은 분명하다. 딱 지금처럼 꽃은 만개하고 봄기운에 어떻게든 내 안의 새싹이 방향도 모르고 피어오르던 시기였다. 복학생이 된 나는 마음속 군복을 벗지 못한 채 딱딱하게 얼어붙어있었고, 항상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던 학교도 이미 어색한 장소가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전전긍긍하며 매일 고민한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라는 질문이었다. 지금은 결말을 알아버린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내 세상 속 마지막 고민 같았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더 헤매었고 아직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그 당시의 나에게 전해줄 길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르는 게 약일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어떤 수업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교양수업에 독일에서 온 교포인 선배가 있었고 그 선배는 거의 서른 살에 가까운 나이였다. 말투부터 사고방식까지 모든 게 남달라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서른 살이나 된 그가 학교에 돌아온 이유는 왠지 나의 마음을 울렸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아마도 '무엇인 된다는 것'에 대한 과정이었고 그는 그런 면에서 답을 찾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생면부지인 선배에게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제가 원래부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건축이라는 것이 마음속 깊이 있었거든요. 왜 바우하우스의 발터그로피우스도 말했잖아요? 건축이 GesamtKunst(종합예술)라고. 독일은 실용 디자인에 강한 나라인데, 지금 가면 늦을까요?' 그는 남에 가까운 후배에게 조금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특유의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답변을 해줬다. '글쎄? 늦었다고 하면 늦었을 수도 있는데 늦는 게 중요할까?' 이게 마지막이다. 정말 싱거운 대화이지만 이 대화가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이 에피소드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이유는 지금도 이 고민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고민의 깊이와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다. 다만 아직도 나는 내가 '무엇이 되는 과정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대화 장면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 다양한 일이 있었다. 대뜸 PD를 해보겠다고 아무 준비 없이 방송국 3사 공채 지원을 한 적이 있다. 될 리가 없다. 방송국은 어려우면 광고는 어때?라는 생각과 함께 또다시 메인 3사 광고 회사를 아무 생각 없이 지원했다. 역시 될 리가 없다. (왜 모두 3 사지? 3의 숫자가 미묘해 보인다.)
그렇게 무탈할 것 같은 취직 시즌은 꽤 암울해졌고 내가 원하는 크리에이티브해 보이는 직군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떻게든 대기업에 취직하기가 목표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는커녕 최소 자격을 요구하는 영업직에서 조차도 여러 번 고배를 마시다 보니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자존감이 낮은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았던 시절에는 나는 엉뚱한 곳에서 자존감을 찾고 싶어 했다. 취직은 고리타분한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건축 대학원을 준비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현실은 크리에이티브 직군은커녕 영업에서도 거절당하는 나 자신이 있었지만 당시 내 자존감은 아직도 내가 무언인가 만드는 사람인양 행색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도 서랍에는 AUTO CAD 자격증이라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것도 꽤 웃기다. 건축과 AUTO CAD는 어떤 관계였을까? 뭐 도면 그리는 일의 도구쯤이야 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사실 CAD가 있다고 건축에 유리하다거나 하는 관계성은 정말 1도 없다. 참 대책 없는 젊은이였지 싶다. (뭐 지금이라고 크게 다른가?)
아직도 건축이라는 단어를 보면 설렌다. 물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끔 레고를 잘하는 아들을 보다가 아들이 건축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마음을 다하여 지원해 줄 생각은 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건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건축은 설레는 단어이기에 '시공時空 시나리오' 전시는 꼭 가봐야 할 전시였다.
전시의 규모는 작았다. '전시의 규모가 작았다?' 글을 쓰다 보면 질문을 유발하는 나 자신의 생각이 있다. 애초에 전시의 규모가 작다는 것은 작품 수가 될까? 이렇게 고민하고 자가비판을 하다 보면 나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글쓰기의 이점 같다.
전시하는 작품 수는 적었다. 그러나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그 함의의 건축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사유의 방식은 작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내가 왜 서사 꼰대(?)가 되었는지도 이 전시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을 좋아하는 나는 어느 공간의 매력은 시간 위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주제도 시간 위에 공간(時空)을 올려보는 고민을 하는 전시회가 된다.
다양한 작가가 시간이라는 흐름 위에서의 공간에 대해 주목하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그중 '면백유객-터널시리즈'라는 작품이 눈에 띈다. 터널 벽면의 흔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종류의 힘이 가해진 결과를 마치 산수화처럼 나타냈는데 그 생각이 흥미롭다. 생각만 흥미로운 건 아니다. 실제로 그 작품이 산수화처럼 보인다는 것도 정말 신기하다. 많이 사용하는 물건에는 손때가 타는 것처럼 오래된 공간에는 자연의 손때가 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전시가 마무리되는 3층 중간에 작은 서점이 있다. 일반 서점과는 다르게 전시와 관련된 주제의 서적들이 있고 서적들도 묘하게 서점에서 보기 힘든 것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그중 '조르주 페렉 - 공간의 종류들'이라는 책이 눈에 띈다. (우리가 지나칠 것 같은 것에 집착스럽게 기술하는 사유의 책을 나는 좋아한다.) 평소처럼 교보문고 App에 해당 책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2층으로 내려오다가 아차 싶어 다시 올라가서 책을 구매했다. 좋은 전시를 무료로 보고 티켓값은 책값으로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여기서 알고 보니 그 서점의 계약관계는 어쩌고 저쩌고 해서... 결국 미술관 운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세속적 결말이 나온다고 해도 오늘의 구매는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장에서 지난주부터 새롭게 도전하는 일이 생겼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봐도 내가 지금 만들어야 하는 서비스의 본질을 모르겠다는 이유에 근거한다. 서비스 뒤에는 항상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대체 뭘 위해 이 제품을 사용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전하는 서비스 영역을 큰 건축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분해해 볼 작정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무엇이 본질인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크리에티브 병이 도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만들면 되는 걸 유난하게도 한다고. 그런데 그냥 만들어져 보이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조르주 페렉처럼 공간의 종류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정도는 기술해 놓는 기반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터널에 새겨지는 이름 모를 그림이 산수화가 되려면 최소한 한 획 한 획의 서사만큼은 자신의 최고의 노력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