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글이 밀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가끔 '아, 이런 생각은 글로 남겨 놓으면 좋을 것 같다.' 정도의 생각은 들지만 '이건 꼭 글로 남겨야 돼'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아무래도 글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애초에 정리가 시급하다고 느끼는 생각은 이미 글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표현되거나 각인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 항상 미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글감이 생겼다. 바로 '우아한 죽음'에 대한 것이다.
글의 부채를 느낀 점은 아주 명확하다. 아마도 이 주제가 남은 나의 인생 위에 길잡이처럼 솟아서 방향을 비춰줄 것 같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는 일상과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주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어릴 적부터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쾌함이 싫었다. 단순히 어두운 이미지에 대한 무서움이기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웠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 들고 등골이 서늘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어지간히도 무서웠다.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인데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는 묘한 말과 함께 차마 버리지 못하는 생의 감각에 대해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 첫째 아이 출산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무뎌졌다. 무뎌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출산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니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를 하면서 어쩌면 사람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묘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살아있는 그 존재 상태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시작하다 보니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삶' 그 자체의 행복을 어떻게 잘 즐길 수 있을까가 인생의 핵심주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죽음'이라는 주제는 우리 근처를 맴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변에 부고도 많다. 아주 먼 관계와 아주 가까운 관계의 '죽음'을 목격하다 보면 아무래도 '삶'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것도 때로는 부질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누군가의 직접적인 '죽음'이 아니어도 '삶'에 집중하는 시간을 지내다 보면 행복이 가득할 때 알 수 없는 불안함과 함께 곧 '죽음'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생의 결정체인 아이로부터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아빠는 내가 키가 다 크면 죽는 거야? 그럼 난 속상해'와 같은 질문에 네가 아빠보다 더 성장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빠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대답 자체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 같아서 가슴 한편이 무겁다. 물론 난 최선을 다해서 살겠지만 세상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 어쩌면 '죽음'이 가진 가장 묘하고 불쾌한 지점이 아닌가 싶다. 억만장자도 내일 당장의 삶의 여부를 알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얼마나 가졌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불행한지 등등 죽음은 고려해주지 않는다. 그냥 사건의 지평선처럼 그곳에 '죽음'이라는 이벤트가 있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은 미지의 것으로 회귀한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도전 정신이 생긴다.
'그래,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치자. 그런데 우아하게 죽는 것은 가능할까?'
불확실에 의거한 삶에서 죽음은 우연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 장면인 죽음에 대해 절대 책임질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명예와 돈 그리고 사랑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는 인간은 무엇하나 준비할 수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아한 죽음'은 불가능한 목표다. 우연에 맡겨야 하며 세상의 어떤 일보다 가장 어렵다. 세상이 개인의 합이라는 전제 안에서는 개인에게 가장 어려운 주제인 '우아한 죽음'이 세상에서도 가장 어려운 주제로 등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아한 죽음'이라는 것을 목표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불확실이 있다고 해도 '우아한 죽음'이라는 목표를 두는 것은 인생의 끝점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이 된다. '우아한 죽음'이 목표가 되면 우연이 아닌 것들에 최선을 다한다. 좋은 인간관계, 건강한 생활 습관, 행복한 가족 관계, 사회에서의 건강한 성공 등이다. 죽음의 모습을 정할 수 없지만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일단 그 누구도 병원에서 차가운 침대에 누워서 죽고 싶지 않다. 그대로 침대에 실려서 지하로 안내되고 냉동고에 일정 기간 체류하다가 어두컴컴한 곳으로 생전에 나를 알던 손님이 찾아오는 그림이다. 대개 지하실에 위치한 영안실에서 나의 죽음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너무 어두운 결말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맞이하게 될 죽음의 모습이지만 정말 난 이런 모습이 싫다. 세상에 왔을 때만큼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밝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나만의 우아한 죽음을 그리다 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시간 위에서 인간은 유한하다. 우연에 의해 칠해지는 시간의 색도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노력하여 제어한 시간의 색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젊음, 중년, 노년을 나눈 것도 어쩌면 이런 시간의 색의 구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 칠할 수 있는 우연에 기반한 아름다움. 어른이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무채색에 가깝지만 절제된 아름다움. 또 노년이 되어야만 칠할 수 있는 황혼의 아름다움 등 다양한 것들이 있는 이 세계에서 최소한 시간에 맞춰 제 역할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한 '우아한 죽음'에 대한 노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니콜라스 파티 / 동굴 & 백자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