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잠하다는 말은 한자어 동사이지만 마치 의태어처럼 물 밑으로 가라앉는 울림을 준다. 요즘 언어로 바꾸면 E였던 사람이 I로 바뀌는 과정 정도일까? 아니면 I였던 사람이 더 깊게 I가 되어가는 과정일까. 어찌 되었든 무엇이 원래보다 더 가라앉는 느낌은 생동감 측면에서는 죽어가는 모습에 가깝기 때문에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고고한 느낌도 있다. 이것은 한국 문화에 대한 이미지에 가까운데 뭔가 튀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은 결국 침잠하지 않고는 미의 극강에 이르지 못하는 한국식 예술품에도 비교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방향이 음침한 방향이든 고고한 방향이든 침잠(沈潛)이라는 것은 생동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큰 변화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침잠하다와 회사일이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직장인이 일을 빼놓고 삶을 이야기하기에는 그 소재가 구차할 만큼 부족하다.
회사에서의 일은 크게 3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1. 시스템 안에서 정해 놓은 일을 매일 반복해서 하는 것
2. 시스템을 유지 보수 하는 것
3.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
여기서 시스템은 회사라는 조직이 생명체로써 돌아가는 생태계 같은 것이다.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달성을 위해 조직화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역할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마치 다양한 생물이 나무를 중심으로 혜택 받고 의지해가며 살아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 나무가 시들면 다 같이 소멸하거나 다른 나무로 옮기거나 하면서 그렇게 비슷한 듯 다른 듯 세월은 흘러간다.
세상의 비극과 희극은 모두 내가 속한 작은 나무 아래서 일어난다. 딱따구리는 9시부터 10시까지 나무를 두들겨야 하고 애벌레는 1시부터 10분간 다른 나뭇잎을 향해 기어 본다. 그러다가 둘 중의 하나라도 시간을 착각하기라도 한다면 애벌레는 딱따구리의 먹이가 된다. 애벌레 입장에서는 인생의 전부가 걸린 일이지만 딱따구리에게는 하루 식사에 대한 보통의 하루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의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다. 그러면 모두 하나가 돼서 나무를 살려야 한다. 이때 비로소 나무를 지키는 무리가 유지/보수를 시작하게 되고 그것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알고 보니 딱따구리가 너무 심하게 나무를 쪼는 것이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결국 그것을 없애기 위한 희생을 시작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들이 세상 곳곳에 일어나고 있고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이 숲 전체가 며칠 뒤면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면 모두 대이동을 준비해야 한다. 다만 무리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억지로 상황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는 가?'라는 더 어려운 질문도 생긴다. 그래도 괜찮다. 이때를 위해 자연에 준비된 객체는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다만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실제로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은 모두가 다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히 3번 일은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창조하기 위한 움직임을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 이것은 실재에 가깝기보다는 하나의 연기다.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는 가본 길이라고 지저귀는 한 마리의 '종달새'처럼 계속해서 연기해야 한다. 그러다 무리에 의해 죽음을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메시지가 전달되면 좋든 싫든 새로운 시스템이 형성되고 그것의 존폐는 운명에 맡겨진다.
침잠하는 순간은 종달새가 혼신의 연기를 끝낸 무대 뒤에서 온다. 사실 종달새도 잘 모른다. 물론 무리보다는 숲에 대해 더 해박한 지식이 있거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종달새도 결국 자연의 수많은 객체 중에 하나의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의 흐름을 미리 알 수 없다. 그냥 어느 한편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하나만으로 그렇게 본인이 만들어낸 허상을 연기한다.
처음 시작한 연기는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저귐에 가깝지만 결국 설득이 된 상황에서의 그의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새로운 곳에 답이 있을 거라 믿어지는 순간 종달새의 무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스템의 창조는 시작된다. 이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종달새의 침잠은 시작된다.
연기하는 나는 내가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의 나다. 새든 애벌레든 그 본질은 오히려 단순하다. 맛있는 잎을 갉아먹고 자유롭게 날 수 있다면 본질 안에서 행복하다. 그런데 연기를 자처한 종달새는 본질과 동떨어진 어떤 곳에서 철저하게 소비된 자신과 마주하고 그 순간 침잠하게 된다. 결국 종달새가 원하는 것도 단순히 더 오래 날고 싶었던 희망뿐이기 때문에 본인이 창조했을지도 모르는 시스템과의 큰 간극이 생기고 그 간극이 너무나 커서 결국 자아 안으로 조용히 미끄러지고 싶다.
작든 크든 본인의 속한 작은 세계에서 '종달새'를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침잠하는 위로를 보내고 싶다.
다시 불이 켜지고 / 막이 오르고 나면 / 지구 어느 한 구석 /손바닥만 한 내 세상 위에 / 나 홀로 있네
- 무대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