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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Braun Nov 18. 2024

분유병 설거지

(설거지는 언제 끝나지?)

 둘째는 6개월을 향해 힘차게 성장하고 있다. 아이는 한 번에 200미리의 분유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4시간 간격으로 하루에 4번 정도 마신다. 아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성장할수록 분유병을 사용하는 빈도와 간격이 낮아진다. 이제는 하루 일과가 마무리될 때쯤 모아진 분유병을 모두 한 번에 설거지하고 건조대에 말릴 수 있는 정도의 양이된다. 아무래도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편이 더 편한 아빠는 조용히 일을 찾아서 한다. 육아 경력직으로서 분유병 씻기의 순서도 명확하다. 


1. 분리된 분유통 중에 통 부분을 먼저 세척솔에 세제를 묻혀 빙글빙글 돌리며 초벌 한다.
2. 젖병꼭지와 분리된 뚜껑을 솔로 면밀히 돌려가며 세척하고 1번에서 세척한 통 위에 거꾸로 거치한다.
3. 이렇게 4개를 반복한다.
4. 물로 씻어내기 시작한다.
5. 순서대로 가지런하게 분유통 건조대에 거치하여 말린다.


 이렇게 순서대로 진행하고 나면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반전은 있다. 아내가 갑자기 나타나선 '이거 좀 덜 닦인 것 같은데'라던지, '이제 분유 기계를 쓰지 않아서 병의 목부위를 더 상세히 닦아야 해'라던지의 말을 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불평은 불화만 가져올 뿐이다. 분하지만 설거지 프로세스의 1번과 4번의 내용을 수정한다.


1. 분리된 분유통 중에 통 부분을 세척할 때 불순물을 확인해 가며 빙글빙글 돌리며 초벌 한다. 특히 분유 찌꺼기가 남았는지 통의 목부분을 집중적으로 확인한다.
4. 물을 반쯤 채우고 뚜껑을 다시 덮고 강한 회전을 통한 회오리 작용으로 분유찌꺼기 없도록 압력을 준다.


수정된 프로세스의 5번까지 거치게 되면 약 10분이 소요되는 분유병 설거지가 끝난다.



 그런데 정말 끝일까? 기본적으로 병에 묻어있는 얼룩이 없는지, 병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지 등을 확인하긴 하지만 정말로 이것으로 분유병은 완전히 깨끗해진 것일까? 한편 좀 덜 닦인 것 같다는 와이프는 이제는 완전히 닦였다고 인정하는 걸까? 아니면 굳이 잔소리를 더해서 사기를 떨어뜨리기보다는 손길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걸까? 대관절 분유병 설거지의 끝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현미경이라도 대령해서 불순물 0%의 결과 값이라도 받아내야 하는 걸까.

 끝이라는 측면에서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유용하다. 실제로 끝이기 때문이 아니라 작업하는 사람에게 끝냈다는 심리적 만족을 줄 수 있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1번부터 5번까지 만들어진 프로세스를 반복하고 나면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그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심지어 뿌듯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면 아주 단조로운 프로세스의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로 중독적이기도 하다. 하루를 잘 살았다는 기분은 어쩌면 잘 이행된 프로세스에 모두 숨어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런데 진짜 '끝'과는 어쩌면 전혀 별개의 이야기 같다.



 각자의 끝은 다르다. 우주를 향하는 자에게 지구는 시작점에 불과하다. 지구를 향하는 자에게는 땅이 시작점이 된다. 이렇게 각자 꿈꾸고 아는 세상에 따라 끝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공감할만한 일정한 수준이 있는 것 같긴 하다. 엊그제 방문한 '뮤지엄 산'도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안도 다다오가 고민해 만들어낸 결과물은 건축에 문외한 내가 봐도 경외감이 든다. 물론 도슨트의 스토리텔링이 극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겠지만 아무 서사도 듣지 않아도 감탄했을 것 같다. 과연 이런 결과물은 안도 다다오의 입장에서는 '끝'난 작품이었을까?

 생각보다 끝이 어렵다.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프로젝트의 끝, 직장의 끝, 고민의 끝 등 각각의 끝은 그다음 챕터를 이야기하게 하기 때문에 결코 끝내지 않고서는 삶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진다. 다만 그 끝이 정말 지금 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각 개인의 짊어저야 할 짐이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 전혀 끝나지 않은 것도 나 자신에게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끝인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새로움을 찾기 위해서는 끝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집 앞 한살림에서 구매한 가래떡을 무심코 먹었는데 말랑말랑하니 꿀을 찍어먹고 싶어졌다. 꿀을 찍어먹고 나니 이거 겉은 조금 바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라이팬을 꺼내 그 위로 올리브유를 살짝 두르고 집게를 집어 들고 비장하게 가래떡을 구웠다. 가래떡을 굽는 것이 생각보다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왼손에는 책을 집어 들고 한 문장씩 읽으며 떡을 구웠다. 옆에서 아내가 쓱 쳐다보고 지나가는데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 한량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래떡을 구우며 책을 읽는 한량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래떡구이만큼은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서 어떤 멋진 끝을 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가래떡구이만큼은 끝에 가까운 맛을 보장해 본다. 


 '아무개 씨: 가래떡구이를 끝장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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