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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pr 24. 2022

<마흔 두번째 이야기> 코로나의 습격

  맞배집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작업으로, 상방과 하방 사이에 끼워 넣을 문틀을 가공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실내 실습실 문을 벌컥 열어 젖히고 들어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전기대패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처음에는 교장선생님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 이윽고 동료들이 하나 둘씩 작업을 멈추었을 때, 교장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소목반의 한 학생에게서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왔어요. 그래서 여기 있는 대목반 학생들과 선생님도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해요. 지금 바로 움직여주세요.”

  오미크론이 유행하면서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감염되었지만, 한옥학교에서는 감염자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 중에도 언젠가는 감염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감염자가 나오니까 ‘이제 남의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은 처음 당하는 일이어서, 순간 긴장을 했다. 

  우리는 장갑과 앞치마를 벗어놓고,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 냈다. 이때 누군가가 근처 편의점에서 자가진단 키트를 사서 진단해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정환이가 차를 몰고 가서, 진단키트를 바로 사왔다. 키트 세트에는 하얀 면봉, 바이러스를 추출할 수 있는 액체가 담긴 작은 통, 그리고 진단 키트가 들어 있었다. 진단키트는 아내가 젊은 시절에 임신 여부를 판단했던 키트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먼저 하얀 면봉을 꺼내서 내 양쪽 코를 후볐다. 웬일인지 보건소에서 검사 받을 때보다 더 아팠다. 역시 전문가가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가보다. 그리고 나서 면봉을 액체가 담긴 작은 통에 넣고 흔들었다. 적당히 흔든 액체를 진단 키트에 떨어뜨려서, 빨간 줄이 하나만 보이면 음성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목반 동료들은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오후에는 소목반의 모든 학생들도 음성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코로나의 습격을 처음 받던 날, 우리는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는 바쁜 일상이 회복되었다. 상하방에 문틀 끼울 자리와 문틀에 문을 끼울 자리를 만들었다. 먼저 문틀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물결모양의 무늬를 만들고,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문 턱을 홈 대패로 만들었다. 

  문틀이 상방과 하방에 끼워질 수 있도록, 양끝 부분도 가공해야 했다. 상방에 끼워질 부분은 매우 복잡해서, 선생님도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기초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는 그림에 따라 톱과 끌로 끼울 부분을 가공해 나갔다. 


  문틀을 만들고 난 후, 이전에 치목을 해둔 상방에 문과 문틀을 끼울 수 있도록 가공을 했다. 문틀에서 여닫이 문의 자리를 만든 것과 똑 같은 모양으로 상방도  깎아냈다. 그리고 문틀이 끼워지는 부분의 모양에 맞게, 상방의 홈을 파냈다. 

  한옥은 못으로 목재를 접합시키기 보다는, 홈을 파서 서로의 이음새를 끼우는 방식이다. 따라서 끼워질 부분의 모습과 치수가 정확하게 만들어져야, 견고하게 조립된다. 상방에 끼워질 문틀과 같이 복잡한 모양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모양새에 딱 맞는 모습으로 홈을 파내야 한다. 


  첫 번째 습격 이후,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는 차츰 코로나가 잊혀져 갔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코로나는 좀 더 가까이 접근해왔다. 우리 대목반의 유상이가 양성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건축목공기능사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같은 반 동료가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다. 양성이 나오면 시험도 못 보기 때문에, 다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테스트를 해봤다. 다행히도 유상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성 반응이 나왔다. 

  원래 대목반 동료들은 강릉에서 기능사 시험을 마친 뒤,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 이벤트를 계획했었다. 묵호항에서 회를 먹고, 근처의 종철이 장인어른 아파트에서 하루 자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상이가 양성이 나오면서,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정환이가 이 이벤트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주말에 가족들에게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나도 주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에 가서, 포크레인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감염이 되는 것은 괜찮은 데, 연로하신 부모님이 감염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묵호항 회식 계획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코로나는 두 번째 습격으로 우리의 추억거리를 하나 삭제해버렸다. 


  마지막으로 코로나가 찾아온 것은, 한옥학교 졸업식을 일주일 정도 앞둔 4월초였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나였다. 처음에는 다른 클래스의 학생, 두 번째는 같은 클래스의 유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코로나는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던 것일 수도 있다. 3월말부터 내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을, 코로나가 알고 있었던 듯하다. 

  4월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목이 칼칼하고 가끔 기침이 나왔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근처 편의점에서 코로나 자가진단키트를 사서 테스트를 해봤다. 그랬더니 감염되지 않았을 때와 다르게, 진단 키트에 두 줄이 선명하게 만들어졌다. 코로나가 만연한 지난 2년여동안 제주도, 동해안, 미국 등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데 코로나가 사라져가는 끝물에, 그만 코로나에 걸리고 만 것이다. 


  당장 원주에 새로 얻은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은데,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제 마지막 회식을 같이했던 대목반 동료들에게 알려서, 테스트를 해보도록 권했다. 다행히도 동료들은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자가격리에 들어가기 전에, 한옥학교에 있는 내 짐을 다 빼야 했다. 자가격리 기간 중에 6개월동안의 한옥학교 프로그램이 마무리되기 때문에, 짐을 미리 빼놓기로 한 것이다. 학교에는 일연이가 먼저 와있었는데, 나는 가급적 멀리서 인사를 하고 내 짐을 차로 옮겨 실었다. 이미 내 차에는 원주로 갈 짐이 하나 가득 있었기 때문에, 학교 짐들을 간신히 끼워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짐을 차에 실은 다음,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작별이어서 섭섭했다. 모두들 실습장 밖에 까지 나와서, 내가 가는 길을 환송해주었다.  

  자가격리는 평창 집에서 하기로 했다. 인천 집에서 하게 되면, 가족들을 감염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 등 일주일 동안 필요한 것을 간단히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자가격리 첫날, 진부면의 선별진료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비빔면을 삶아 먹었다. 그리고는 TV를 보면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평일 날 집에서 아무 하는 일없이 멍을 때려본 것 같다. 

 그때 문득 원주집 거실에 놓을 탁자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격리기간에 만들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옥학교에서 한옥에 들어갈 문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거실 탁자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차에서 학교에서 만든 한옥 창문과 필요한 도구들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거실에 신문을 깔고, 작업을 시작했다. 

  다리 4개가 꽂아질 홈을 파내고, 탁자를 좀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다리 사이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문 틀을 가공해 나갔다. 가로 세로 방향으로 들어가야 할 문 살은 두께가 얇기 때문에, 가공과정에서 자주 끊어졌다. 끊어지면 다시 만들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했다. 또 한번은 치수를 잘못 생각하는 바람에 다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탁자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자가 격리기간의 무료함을 달랠 수가 있었다.


  거실 탁자로 쓸 한옥 문은 시작한 지 3일정도 지나서 겨우 완성되었다. 탁자를 만드는 김에 아내가 부탁한 도마꽂이도 몇 개 만들었다. 도마꽂이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고 사포로 문질러서 완성하였다. 


  그렇게 거실 탁자와 도마꽂이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갑자기 한옥학교 동료들이 내 집에 찾아왔다. 내가 자가격리중이어서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못해서, 창문을 열고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한옥학교 졸업식을 끝마치고,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후줄근한 작업복 대신에 그럴 듯한 외출복을 빼입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이라서 너무 반가웠다. 그동안 내가 만든 탁자를 보여주면서 자랑도 하고, 멀리 제주도까지 가야하는 유상이를 비롯해서 인천, 서울, 동해 등 각자 흩어져서 집으로 가야하는 동료들의 다음 계획도 잘 만들어 가도록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6개월에 한번씩 만나기로 한 우리들의 약속을 꼭 기억하기로 했다. 그렇게 10월에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의 만남을 뒤로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코로나는 한옥학교에서 나의 마지막 이별 장면을, 전혀 생각지 못한 그림으로 만들었다. 해야할 일을 못하고 집에 갇혀서 목공작업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동료들이 찾아와서 이런 저런 도움을 주고, 작별 인사까지 와주어서 더 없이 고마웠다. 어쩌면 코로나는 나에게 이런 고마움을 느끼는 한 주가 되기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옥학교 생활을 마치고, 다음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쉴 수 있는 기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참 오묘한 시기에 찾아와서, 뜻밖의 역할을 하고 간 코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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