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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l 27. 2022

<농촌 체험하기> 내가 친 큰 사고

- ‘농촌에서 살아보기’ 6개월 과정에서 겪은 열 여섯번째 이야기

  그날은 오전 9시부터 옥수수를 정식하기 위해서 옥수수 밭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대표님이, 운전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저런 잔소리를 해댔다. 어제 트럭을 웅덩이에 빠뜨려서 그런가? 다른 날에 비해서 유독 잔소리가 많았다. ‘대표님이 어제 사고 때문에 화가 많이 났었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말투였다.


  긴 시간 동안 날씨가 가물었기 때문에, 마을 개울가에서 물을 길어서 공동 농장의 작물들에게 수시로 물을 뿌려주어야 했다. 내가 사고친 날도 이천 리터짜리 큰 물통에 물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고추 밭이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갔다. 최근에 정식한 고추와 고구마 밭에 물을 주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농사용 트럭을 몰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수동 기어로 된 차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원해서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야산의 5부 능선쯤에 고추 밭이 있었고,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감자 밭과 고구마 밭, 호박 밭이 차례로 나타났다. 천오백 평에 달하는 교육생들의 공동농장이었다. 이곳에 가려면 구불구불한 비좁은 비포장 산길을 비집고 올라가야 했다. 트랙터가 지나다녀서 그런지, 길이 여기저기 패여서 울퉁불퉁했다. 조그마한 트럭으로 여기저기 파여있는 산길을 올라가자면, 차가 좌우로 크게 흔들려서 조심스럽게 운전해야만 했다. 

  고추 밭에 물주는 작업은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고추 밭에 물을 준 뒤, 위쪽에 있는 고구마 밭으로 향했다. 하루 전에 정식한 고구마들이 뜨거운 태양열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지, 잎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이백오십평 정도 되는 고구마 밭에 물주기를 마무리 한 후, 트럭을 돌려서 산채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점심식사로 주문한 막국수가 도착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을 뿌리던 호스를 정리해서 트럭에 싣고, 좁은 공간에서 트럭을 돌리려고 전진과 후진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그런데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트럭을 돌리는 과정에서, 그만 뒷바퀴 하나가 움푹 패어있는 웅덩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남자 동료들이 다들 모여서 트럭을 밀어보기도 했지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한참을 씨름하던 우리는 트럭을 빼내는 것을 포기하고, 걸어서 산채마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들 모여서 막국수를 먹으면서, 트럭의 차 바퀴가 웅덩이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대표님에게 했다. 대표님은 짜증난 듯한 모습으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점심 먹고 가서 다시 한번 시도해보고, 안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트랙터를 몰고 가서 트럭을 빼내보겠다고. 

  트럭에 약간 남아있던 물을 근처 땅콩 밭에 마저 뿌려서, 트럭의 무게를 줄였다. 그리고 다시 트럭을 빼내는 시도를 여러 번 해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때 대표님이 트랙터를 몰고 나타났다.  트랙터와 트럭을 두 개의 끈으로 연결하고, 트랙터로 트럭을 끌어내는 시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끈 중에 하나가 끊어지자, 대표님이 짜증나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트랙터로 끌어내는 동안, 트럭의 기어를 전진모드로 해놓아야죠!”

  트럭의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내가 기어를 1단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 잠깐동안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잡았었다. 그 사이에 대표님이 트랙터로 트럭을 잡아 끄는 바람에, 트럭에 연결해놓은 끈 중에서 하나가 끊어지고 만 것이다. 대표님의 말투에는 ‘트럭 바퀴를 왜 웅덩이에 빠뜨렸느냐?’는 책망의 감정이 실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나도 짜증이 나면서, 머릿속에 감정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굳이 트럭을 운전할 필요가 없는데, 왜 운전을 해서 이런 기분 나쁜 일까지 당해야지! 오히려 운전 안 하는 것이 더 편한데.’

  대표님이 야단치는 말투로 뭐라고 하니까, 더욱 감정적인 생각이 강해졌다.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사이에, 트럭이 웅덩이에서 빠져 나왔다. 그때 문득 일이 해결되었는데, 짜증을 내서 감정의 앙금을 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짜증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교육과정에 들어와서 내가 처음 친 큰 사고여서 그런 지,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다들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마치 나의 실수인 양 치부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나는 굳이 트럭을 운전하는 일을 떠맡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로는 다른 사람이 운전을 했으면 합니다.’라는 말을 동료들에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누군가에게 강제로 떠맡기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동료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앞으로도 수 개월 동안의 교육과정중에,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할 것이다. 그때마다 힘든 일을 다른 동료들에게 미룬다면, 이 공동체 생활은 힘들어질 것이다. 그날 그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나의 마음을 드러내게 되면,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가 깨질 것만 같았다. 터져 나오려는 감정적인 언어를 최대한 참으면서, 이성적인 마음이 지배하도록 나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감정적인 언어는 나뿐 아니라 조직에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곤 했었다. 감정적인 행동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무너진 조직 분위기를 추스르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곤 했다. 무엇이든 망가뜨리는 것보다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어렵고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의 큰 실수가 동료들간의 공동체 분위기를 깨뜨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약이 될 수도 있다. '이같은 보약을 많이 만들면,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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