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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Jan 31. 2024

세상을 떠난 친구의 생일

얼마 전 카카오톡 어플 상단의 업데이트한 프로필 목록에 세상을 떠난 친구의 프로필이 떠서 깜짝 놀랐다. 그 친구의 프로필을 눌러 보고야 깨달았다. 아, 오늘이 얘 생일이구나. 작년에도 똑같이 놀랐었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는 없지만, 내가 들은 소식이 거짓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 이상한 기대를 하게 된다. 2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는 프로필 사진과 메세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이 친구의 가족들이 더 이상 이 계정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 사라지게 될까? 나는 더이상 매년 놀라지 않게 되는 걸까?


이 친구는 나와 친하거나 친했던 친구는 아니고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 만나면 인사하고 옆에 있으면 오늘 국어 몇 교시냐고 물어볼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작은 키에 쫑알대는 귀여운 목소리를 가진, 참새같은 아이였다. 그 애의 단짝도 꼭 자기와 키가 똑같고 조그마한 애였는데 둘이 팔짱을 끼고 있으면 다들 싸이월드 미니미같다고 했다. 둘이서 서로 자기가 키가 더 크다며 누구 키가 더 큰지 봐달라며 교실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교실 앞자리에서 수업을 늘 열심히 듣던 아이였다. 단짝과 함께 반에서 2등, 3등을 번갈아 차지하는 모범생이기도 했다. 


이 친구, 그러니까 참새의 부고를 들은 건 2년 전 늦가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였다. 그 중 한 친구는 의사여서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참새와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참새의 부모님께서는 친척들에게 차마 자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리지 못해 장례식장이 굉장히 조용하고 단촐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참새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자발적인 죽음과 비자발적인 삶에 대해 몇 년에 걸친 고통스런 고민을 해본 나는 내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참새를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본 참새는 늘 성실하고 똑똑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필수 야간자율학습이 밤 열시 반, 선택 야간자율학습이 열두시까지였는데 참새는 선택시간에 늘 남아있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의대에 진학해서도 그건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를 가고, 또다시 꾸준히 공부해 의사가 되고. 그래도 더 높은 곳을 향한 압박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찼으니 이젠 같은 의사를 만나 결혼해야지. 개원해야지. 남들보다 잘 벌어야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가족없이 홀로 생활한 것도 어쩌면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다. 


참새가 그런 선택을 하기 며칠 전에 다른 친구와 통화하며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 보자고 했단다. 그런 말을 했는데 왜 그랬을까 친구들은 더더욱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친구들과의 대화 내용이 갑자기 급변하는 건 아니다. 


'못 본 지 오래됐네, 보고싶다, 올해 우리 몇 번 봤니? 세상에, 올해 가기 전에 한 번 봐야겠다! 그러자, 다음 달엔 꼭 시간 내볼게!' 


아마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나 힘들어, 죽을만큼 힘들어, 모든 게 의미없어, 그만 살고 싶어 같은 말을 터놓고 꺼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밝고 활달하게 재미있게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 앞에 굳이 그늘을 드리우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내가 힘들었을 때 노력했던 것만큼 참새도 그만큼, 혹은 늘 열심인 친구이니만큼 그 이상 노력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취미생활도 이것저것 해보고 사회적 반경을 넓혀보고자 댄스 소모임에도 나가봤고 나 혼자 집에 있으면 잡생각이 지나쳐서 그동안 키워보고 싶었던 고양이도 두 마리나 입양을 했다. 쉬는 날도 절대 정신이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다잡아야 했다. 눈을 뜨면 기계처럼 할 일이 있도록. 사랑스런 내 고양이 딸이 앞발로 나를 툭툭 치고 고양이 아들이 야옹 사이렌을 울리면 잠에서 깨어 캔부터 따고 아이들이 먹는 걸 잠깐 지켜보다가 고양이 화장실을 치워야 했다. 매일 고양이털을 치우느라 꽉 찬 로봇청소기 먼지통을 비우고 쌓아놓은 설거지를 후딱 처치하고 나면 그제야 찾아오는 나만의 시간이 좋았다. 내가 바삐 집안일을 하는 사이 식사를 마치고 물도 마시고 그루밍을 하며 낮잠 장소를 찾는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와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로 브런치를 해먹으면 이게 삶이구나 싶었다. 더이상 살기 싫은 것과 별개로 고양이들은 늘 예뻤고 잡다한 일을 해치우고 나서 마시는 커피는 향긋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계속해서 살아나갈 원료를 발견했다. 참새가 그러지 못했다는 게 안타깝지만, 모두의 사정은 다르니까 내가 참새를 이해한다고 해봤자 어쩌면 손톱만큼만, 딱 그만 살고 싶은 그 마음만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울의 끝을 달렸던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냐면, 직장을 다니느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정부에서 운영하는 청년 마음돌봄센터였나, 그런 곳에도 가 보았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검색을 해보기가 싫다. 최초 3회 방문이 무료라고 해서 가 보았다. 나의 상담사분께서는 나같은 사람을 매일 만나서 그런지 굉장히 이성적이셨다. 공감한다, 나도 그런 적 있다는 말이 조금은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나의 힘든 마음을 통째로 털어놓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이런 내 마음을 다 들어줄 사람이 앞에 있어서 그런지 저절로 눈물이 났다. 낯선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냥 가족 외 타인의 앞에서 그렇게 운 게 처음이었다. 나에게 휴지를 건네주시고, 그저 앞에서 함께 계셔 주신 것만으로도 사실은 큰 위안이 되었다. 무료 방문의 결론은 본인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약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건 싫었다. 나는 늘 말처럼 건강한 내 신체가 자랑거리였다. 감기약도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인데 매일 규칙적으로 약을 먹으라고? 그럴 바에 내 힘으로 극복하겠다!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괜찮아, 할 수 있어, 잘했어 이 세 가지이다. 아무리 실수 연발에 하루를 망쳐놨어도 나는 내 자신이 힘겨운 하루를 또 살아낸 것에 장하고 뿌듯하다. 어른의 삶은 힘들고 어렵다. 그러니까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잘 버티고 있는 스스로에게 칭찬도 해주고 포상도 해준다. 남들은 자기 약국도 열고 결혼도 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할 때, 나에게는 2주나 일을 쉬고 여행을 다닐, 저녁에 원하는 드라마를 보며 맛있는 것을 먹고 잠이 올 때 잘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되새긴다. 다음 단계로 가지 않아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 내가 원하면 나도 부모님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약국을 열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운영할 수 있다. 내가 강렬하게 원하면 가정도 꾸릴 수 있다. 다 할 수 있는 건데 그만큼 원하지 않을 뿐이다. 원하지 않아서 하지 않는 건데 남들이 다 한다고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처럼 압박을 느낄 이유는 없다.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던 친구. 이런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회란 마치 병원 약제팀 같다. 내가 성격이 더 독했으면 그만큼 더 오래 근무했을 병원. 결국에는 톡 쏘는 말에 상처받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줄 알고, 남에게 모진 소리를 할 줄 아는 강한 사람만이 남는다. 나는 우리 사회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의 섭리인 약육강식처럼, 현대 사회도 정신이 약하면 사회의 공격에 정신이 무너져 죽게 되는 거다. 매일 다니는 직장도 관두기가 쉽지 않은데, 인생을 관두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그랬으면 차라리 그걸 그만두는 게 덜 힘들었을까.   


여전히 참새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다. 늘 열심히 하던 모습만 봐와서 무언가를 그만두는 걸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조차 참새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일 것이다. 참새에게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다. 사람들은 참새가 똑똑하고 뭐든 잘 해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일들에 다 그럴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참새의 영혼이 어디에 있든 나는 이제 참새가 그 모든 구속과 기대로부터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행복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나 자신도 지금 그대로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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