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원 Feb 10. 2024

200살이 넘은 이야기,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책은 사람마다 워낙에 취향이 달라서 책 선물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친구가 준 1818년 초판본 디자인의 하드커버 프랑켄슈타인 책은 기쁘게 받았다. 처음 책을 받아들었을 땐 당황스러웠지만. 외관에 한글이 전혀 없는 오리지널 디자인이라 친구가 주면서 원서라고 나를 속였을 때 정말 깜빡 속아넘어갔다. 예전에 원서를 선물받은 적이 있는데 영단어를 검색하느라고 다 읽는 데에 꼬박 일 년이 걸렸기에 이걸 또 언제 다 읽나 눈앞이 캄캄했다. 원서가 아니라 한글로 된 번역본이라는 걸 알고 나서야 순수하게 기쁠 수 있었다.


친구는 내가 요즘 드라큘라, 에드거 앨런 포 등 고전에 꽂혀 있는 것 같다며 고전문학을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읽어보지 못한 고전을 딱 찾아서 선물하다니! 나를 그만큼 잘 알고 세심하게 신경써 줘서 기분이 좋았다. 일단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 가장 외관이 예쁘다. 앞, 뒤의 표지 그림과 종이의 날에 금박이 입혀져 반짝거리고, 어두운 붉은 빛의 커버는 책 내용의 불행을 암시하는 듯 하면서도 고급스럽다.


전에는 몰랐는데 표지에 박힌 작가의 이름을 보고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여성에 의해 쓰였다는 걸. 지금이야 여성 작가의 수가 남성 작가의 수만큼이나, 혹은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2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책도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판이 되었으며 서문은 메리 셸리의 남편이 쓴 것처럼 쓰여 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이 메리 셸리 외에도 얼마나 더 많았을까? 혹은 자신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지 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 아무리 내가 하는 일이 때로는 너무나 힘들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서 외로워도 이렇게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프랑켄슈타인은 뛰어난 지적 호기심과 실험에 대한 열정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가 창조한 처음이자 마지막 생명체는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생명 이외에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생명을 얻게 된 그날부터 책 내에서 등장인물들로부터 괴물, 악마로 지칭되는 이 생명체는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간다. 두뇌가 명석해 은신처에 숨어살며 언어도 배우고 불을 피우는 법, 숨어 다니는 법을 보호자나 선생님 없이도 깨우친다. 친구를 만드려고 본인 딴에는 계획적으로 접근을 하지만 그의 외모에 놀란 사람들은 도망을 가거나 그를 폭력으로 쫓아낸다. 그의 얼굴은 일정 시간 이상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괴한 모습, 그것도 인간과 닮은 형체를 한 동물을 만나면 나라도 기겁해서 도망갈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서사를 읽으며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가진 그 욕구와 같다. 그런데 절대로 그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과 이 생명체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듯이 생명체가 자신과 꼭 닮은 짝을 원했을 때 그냥 하나 만들어 주었더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프랑켄슈타인이 이미 생명을 하나 만든 것만으로 뼈저린 후회로 남은 인생을 망치게 되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이 생명체가 날 때부터 악한 존재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인간들이 이 생명체를 적합한 이유없이 두려워하고 천대했기 때문에 이 생명체에게 분노와 적개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을 너무나 원했고 좋아하는 가정에 몰래 식량을 갖다놓고 밤에 나무를 해서 장작을 마련해 놓는 등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종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크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동물이 친근감을 표현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정말로 자신과 같은 종족이, 가족이 필요했을 것이다. 짝을 만들어준다면 아무도 없는 대륙으로 떠나 둘이서만 오손도손 살 거라던 그의 이야기를 나는 믿는다. 그에게도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는다.


사는 게 정말 힘에 부쳐서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던 때, 엄마에게 말했다. 왜 나를 낳아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나는 엄마 때문에 일도 해야하고 살아나가야 하잖아!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일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뭐 하고 싶어, 그럼? 나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내가 해야하는 모든 것들이 다 힘들고 싫어. 그리고 전화기에 대고 엉엉 울었다. 엄마는 그냥 묵묵히 들어 주었다. 나는 그게 불효인 걸 알았지만 나 혼자 모든 걸 끌어안고 있으면 더 큰 불효를 할 것 같았다.


삶이 어려울 땐, 세상 탓은 못 하겠고 내 탓을 하기엔 지독히도 지쳤을 땐 창조주를 탓하는 게 가장 쉽다. 그것이 나의 존재 원인이자 시발점이므로. 프랑켄슈타인의 생명체가 자신의 비참한 삶에 프랑켄슈타인을 저주한 것처럼. 그리고 나의 창조주는 다행히도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창조물에게 주지 않았던 것들을 준다.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진정한 부모가 된다는 건 단순히 생명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언젠가 나도 생명을 만드는 날이 올까? 복잡한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생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