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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Feb 12. 2024

내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엄마와의 인터뷰

2009년, 대학의 교양과목 과제였던 '존경하는 사람과의 인터뷰' 전문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내가 오롯이 혼자 사용하는 노트북을 사용해왔고, 노트북을 주기적으로 바꾸며 오래된 파일들은 차곡차곡 외장하드에 쌓여갔다. 어느 시점부터 온라인 저장소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외장하드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집을 정리하다 몇 년 만에 이게 눈에 띄었다. 그냥 둘까 하다가 이렇게 하드디스크에 파일들을 꼭꼭 숨겨만두고 죽을 때까지 안 열어보는 게 아닌가 싶어 오랜만에 컴퓨터와 연결해 폴더를 열어보았다. 대학 때 찍은 사진들, 그리고 내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정말 많은 과제 파일들이 있었다. 그 중 눈길을 잡아끄는 제목, '엄마와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젠 내가 작성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15년 전의 오래된 파일. 열어보니 과제 때문에 작성한 것이었다. 사십 대 중반이었던, 지금 생각해보니 참 젊었던 엄마의 생각을 이렇게 꺼내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오래된 사진보다도 더 귀중한 보물을 찾은 기분이다. 지금의 나 자신을 비롯해 누군가 또 다른 이가 여기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어머니를 더 깊게 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



<엄마와의 인터뷰>

나는 엄마를 '엄마' 외에도 이따금 본인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예쁜 이름으로 부른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때, 혹은 엄마가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콧소리를 섞어 이름을 부르면 똑같이 콧소리를 섞은 답이 들려온다. 아빠는 그게 버릇없어 보인다며 싫어하고, 동생도 같은 입장이지만 정작 엄마는 별 말이 없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가까운 사이임을 엄마를 부를 때마다 확신하고 있다. 


엄마는 어린 시절을 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골에서 자라서인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고 언제나 좋은 친구처럼 지내왔다. 비록 한 마디 잔소리를 들을지언정 엄마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저질렀던 사소한 잘못들까지도 전부 엄마와 공유하곤 한다. 엄마는 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무언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이런 자유분방한 엄마를 좋아한다. 비록 버스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먼 지역에 떨어져 있지만 인터넷 전화와 메신저를 통해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인터뷰를 할 생각이다.     


딸 : 아빠와는 어떻게 만났는지?     


엄마 : 내가 대학 3학년이고 아빠가 4학년이었을 때 미팅으로 만났지. 그때가 시월의 마지막 날, 아빠 학교 축제 마지막 날 파트너로 가기 위해서였어.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파트너를 정하는 방법이 있었어. 남학생이 자신이 좋아하는 꽃이름을 쓴 쪽지를 여학생이 골라서 파트너를 정하곤 했는데 네 아빠는 코스모스를 좋아한다고 하더라.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왠지 정돈되고 단정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도시에서 자란 네 아빠가 시골에서 보던 남학생과는 달리 예의바르고 세련된 매너를 가져서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사람들의 허물없는 행동들에 질려서 세련된 매너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살다보니 세련된 매너가 자유분방함을 얽매이게도 하는구만.  

   

딸 : 우리 남매는 어떤 사람으로 키우려고 생각했는지.   

  

엄마 : 나는 시골에서 본 것도 들은 것도 별로 없어서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랐고,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겠다는 그런 롤모델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진학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그랬던 것 같아서 내 아이들은 많이 보고 충분히 들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애를 썼는데, 정작 내 아이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네.


네가 문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나중에 세상 속에서 충분히 살아보고 글을 쓸 것을 권유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글을 쓰는 작업은 이론적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부딪혀 봐야지만 진실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지. 경험이 없는 글들은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난 후 사십이 훨씬 지나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글을 쓴다면 글을 읽는 사람 마음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 언젠가 그 때를 생각해서 작은 글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마음으로 쓰고 읽고 했으면 해.     


딸 : 왜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졌는지?     


엄마 : 산골에서 자라다보니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농부와 학교 교사라는 직업밖에 몰랐어. 단순하게 농부보다는 교사가 괜찮겠다 싶어 교육대학에 응시를 했는데 낙방을 하고 말았지. 그래서 본의 아니게 취업도 잘되고 급여도 센 간호사가 된거야.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많이 했는데 예를 들면 병리학시간마다 부산 태종대에 가서 과자 먹고 놀다가 시험 하루 전날 밤샘공부하고 등등... 병리학이 어렵고 재미가 없거든. 지금도 싫어.     


딸 : 그럼 지금 하는 일은 만족하는지.     


엄마 : 예전에는 병원에서 하는 아주 액티브한 일이 적성에 맞았어. 그래서 지역사회간호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 그런데 우연찮게 접하게 된 지역사회간호사의 일이 정말 마음에 드네. 지역사회주민들 중 내가 접하는 사람들은 기초생활수급권자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차상위계층, 그리고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장애인, 결혼이민자가족들, 그 외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야. 이 일은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건교육 및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들에 맞춰 연계 및 독지가를 찾아주는 그런 일이야. 뒤늦게 사회복지를 공부한 것이 더 많이 도움이 되곤 해.

       

지역사회간호사는 사회복지를 함께 공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빗나가고 모난 지역사회주민들도 다 감싸 안을 수 있단다. 우리 동네에 나의 열렬한 팬(?)들이 아주 많아. ㅎㅎㅎ


딸 : 또 요양보호사 강의하는 것을 아주 만족해하는데 그 이유는?     


엄마 : 나의 대상자들에게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장본인들이 요양보호사들인데, 실제로 현장에 나가보면 제대로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도 있고 그렇지 못한 요양보호사도 있더라. 그래서 내가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는데 내게 그럴 기회가 주어져서 즐겁고 행복하지. 어떤 일을 하던지 즐겁게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단 말을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야.     


딸 :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엄마 : 지금 내 나이 46세, 몇 해 전과는 달리 에너지가 부족함을 자주 느끼고 있어. 하지만 의욕만큼은 예전보다 훨씬 더 왕성하다는 사실은 부인 안 해. 지금 하는 일은 간호사 업무색깔이 더 짙은데 앞으로 50줄에 들어서면 사회복지색깔이 더 강한 일을 해보고 싶어. 물론 간호사와 사회복지사 일이 함께 섞여있는 일이면 더 좋겠고.     


딸 : 아빠랑 가끔 부딪히는 이유는?     


엄마 : 내가 젊었을 때 아이들을 키우느라 사회생활을 접었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나만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회 속으로 발길을 내딛었을 때, 아내와 엄마와 나 자신의 일을 한꺼번에 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무리였다. 그래서 가사일에도 소홀했고, 그로 인해 가족들이 많이 불편해했던 것도 알고. 그렇지만 내일을 포기할 수 없었고 억지로 해내다보니까 아빠랑 충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많이 이해하고 적응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부부간에도 서로에게 다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에 어느 정도는 상대방의 사생활을 허용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그 사생활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딸 : 끝으로 우리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엄마 : 아빠에게는 회사일도 중요하지만 퇴직 후를 생각해서 좀 더 폭넓은 인간관계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아들은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원하는 공부를 해서 전공과 걸맞는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내 딸은 공대 졸업해서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생활하고 직간접경험을 많이한 후에 좋아하는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길 바라. 그래서 우리 가족이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지 늘 안부 전하고 자주 만나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소박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          



이렇게 엄마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엄마라는 존재는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닌 나의 엄마이기에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엄마가 무직이셨을 때, 집안일에 손을 떼고 취업 공부에만 전념하셨을 때, 내가 얼마나 엄마를 원망했는가를. 내가 엄마 때문에 중학생인 내가 빨래며 설거지며 밥이며 또래 친구들은 안하는 고생을 하고 있다고 화를 냈었다. 사실 정말 고생했던 건 내가 아니라, 자식들 돌보며 공부까지 하시느라 늘 밤늦게 주무시고 아침 일찍 일어나시던 엄마였는데 말이다.


지금 과거의 엄청난 역경을 딛고 이렇게 멋있게 서있는 엄마를 보며 얼마나 힘들게 이곳까지 오셨을까 싶어 괜시리 마음이 아프다. 평범한 주부에서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에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결국엔 지역사회 간호사라는 자랑스런 직업과 대학 강사라는 직장을 얻은 엄마. 엄마를 보면서 예전의 엄마보다 내가 10년 넘게 더 젊은 만큼 나는 더 큰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처럼, 우리 아빠 같은 멋진 남자와 결혼도 하고 단란한 가정을 가진 똑똑하고 세련된 직업여성이 되고 싶다. 그리고 엄마가 가진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닮고 싶다.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20년 후 내 모습이 엄마와 같기를, 혹은 그 이상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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