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미국 드라마를 좋아했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스케일이 큰 드라마들을 많이 만들지만 십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들은 그 당시 국내 드라마와 달리 범죄나 추리, 의학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몰입감 넘치는 멋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나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 공감하며 볼 수 있는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았다. <프렌즈>나 <빅뱅이론>처럼 20대 중, 후반-30대 초반 젊은이들의 일상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을 다룬 시트콤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기 좋게 채울만큼 인원이 많은 그룹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20대를 함께 한 단짝친구들이 있었다. 지난 주에 만나고도 이번 주에 또 보기도 할 정도로 늘 보고싶고 친한 사이였다. 우리의 우정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것과도 같았다. 찬란하고 빛났다. 무엇보다 즐거웠고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서로에 관한 모든 것을 다 터놓았고 그래서 다음 이야기도, 그 다음 이야기도 드라마의 에피소드처럼 이어져 나갔다. 우리 사이에 역사가 쌓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마치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와 같았던 그들처럼 30대가 되자 결혼을 했다. 나도 드라마 주인공처럼 결혼으로 30대를 시작했다면 계속해서 우리의 우정이 이어졌을까? 나와 결혼을 원하는 남자들은 평생 같이 살기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고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 싶은 남자들은 지금 시기에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했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미혼으로 남았다. 드라마에서는 보통 결혼 혹은 출산과 함께 이야기를 종료했으므로 그 후의 우정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게다가 우리 윗 세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내가 보고 자란 건 기혼과 기혼 사이의 우정, 가족과 가족이 어울리는 것 뿐이었다.
현실을 살아보니 기혼과 미혼의 우정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안 그런 친구 사이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현실, 내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의 우정은 그렇다. 서울에서 신혼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으니 기혼들은 자연스레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고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더 멀어진다. 어느 날 저녁, 퇴근을 하고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깨닫는다. 아, 지금 친구 옆에 남편이 있구나. 내 이야기를 친구만 듣는건지 제 3자가 같이 듣는건지 아리송해지며 모든 이야기를 터놓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먼저 전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는 메세지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결혼 전엔 수시로 내게 전화를 걸던 친구도 결혼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아마 퇴근하면 혼자이던 이전과 달리 남편과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전화를 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다. 심심하면 통화하곤 했던 우리인데, 이제 심심할 일도 없겠지.
솔직히 억울하다. 나는 여전히 친구들을 좋아하고 전처럼 모여서 웃고 떠드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니.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러고 있지 않겠냐며 히히덕대던 순간이 나만 진심이었나 싶어 바보가 된 기분이다. 끝나버린 드라마 마지막 시즌처럼,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결혼식과 함께 끊겼다. 어쩌다 한 번 만나면 무척 반갑지만 만나지 못한 기간을 메꿀 수많은 이야기는 그 짧은 시간에 다 오가지 못한다. 많은 것들을 나눌 땐 더 많은 할 얘기가 있어서 하루에 두 번도 통화를 했는데. 그 동안 내가 친구의 90%를 알고 지내왔다면 지금은 그것의 절반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단짝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그 후로 우리가 모인 건 친구 A의 집들이, 친구 B의 집들이에서였다. 나 빼고 모두가 합의한 듯이 남편과 함께였다. 물론 단체 메세지로 '길이 멀어서 남편 차 타고 싶은데, 우리 남편 같이 가도 돼?'라고 양해를 구하기는 했다. 거기다 대고 안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기혼자들은 반가워했다. 이걸 친구 모임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모르는 사람들이 와 있는데? 나도,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내 친구들도, 우리 모두 낯가리는 사람들인데 여기에 남편을 대동한다고? 내가 아는 그 친구들이 맞나?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남편이랑 합체해서 변신이라도 한 건가?
집들이니까 이해하려고 했다, 연속 두 번의 부부동반 모임을. 그런데 다음 모임은 얼마 전 아기를 낳은 친구네 집에서 아기와 함께 만나기로 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남편들도 올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남편들이 오지 않더라도 '아기'라는 낯선 이가 모임에 합류한 것은 분명하다. 모두가 결혼한 이후로,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것도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인데 우리끼리만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 소름돋는다. 매번 만날 때마다 다들 같은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도, 나만 남자친구가 바뀌는 것도 기이하게 느껴진다.
결혼하면 모든 게 변한다지만 우정도 새로운 형태로 변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변화를 맞지 않은 입장에서 타인의 변화를 어디까지 이해해주어야 하는 건지. 낯가리고 소심한 우리들도 서로에게 서운한 게 있을 때는 속내를 터놓고 솔직하게 이런 저런 점에서 상처받았다, 실망했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이번에는 솔직하기가 힘들었다. 모두는 괜찮은데 나만 불편해서. 그리고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를 불편해하면 나만 제 때에 결혼하지 않고 삶의 다음 단계를 밟아나가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20대 때는 그 때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재미있었다.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공부하다가 잠이 쏟아지면 나는 잠을 깰 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친구는 무척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한 시간 씩 통화를 하곤 했다. 너무 웃어서 얼굴이 살짝 얼얼해진 상태로 도서관에 들어가곤 했다. 친구가 첫 직장에서 고충을 겪고 있을 때는, 스트레스를 만땅 받은 날이면 나에게 전화를 해 상사가 어떻게 비효율적인 일을 만들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털어놓았다. 맞장구를 쳐주고 열심히 들어주고, 학교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며 모든 곳이 다 그렇다고 우리 서로 힘내자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곤 했다.
그 시절이 다시 올까? 친구들이 그립다.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유치원에 보내면, 학교에 보내면 여유가 생긴다는 희망고문 같은 말도 지겹다. 나는 다시 우리만의 멋지게 빛나는 우정을 되찾고 싶다. 그게 어디에 있든 열심히 찾아 헤매고 싶다. 사막에서 바늘찾기처럼 막막한 기분이다.
드라마가 막을 내릴 때 모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행복한 표정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동화들이 흔히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그러니까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문구로 끝이 나는 것처럼. 어떻게 행복하게? 어떻게 잘 살았다는 것인지? 작가는 그런 건 알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젊음과 청춘의 시간에 서 있는, 정부가 정한 '청년'의 기준인 만 34세 이하의 법적인 청년으로서 나는 그저 그 전에 그랬던 것처럼,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우정과 사랑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흘러가면 흘러가는대로 붙잡지 않고 응원하며 보내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을 축하하고 응원하지만 나의 속마음 한 켠이 서운함과 그리움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것을 누군가는 알아주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삶의 한 과정이겠지. 나는 이제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에서 벗어나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가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약사 1, 혹은 늘 누군가와 만나고 있는 연애중독자, 혹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서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하는 데 정신이 팔린 망상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