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도 털리고 내 발가락도 털리고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옛날부터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고양이 카페를 찾아다니며, 혹은 학교 내를 어슬렁대는 길고양이를 만나면 쪼그려 앉아 멀리서 눈을 맞추고 말을 걸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7평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작은 원룸에 살면서 고양이를 데려오는 것은 고양이에게도, 나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원룸에 사는 친구가 다친 고양이를 거둬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결국은 본가로 보내는 것을 보며 더더욱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지났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 지났다. 삼십 대가 된 내 삶은 학생 때와는 많이 변했다. 나는 혼자이지만 안전하고 질 높은 삶을 위해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찾아오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스스로를 집순이라고 생각할만큼 집에서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쿠키를 굽거나 청소를 하거나 엄마, 친구와 긴 통화를 하거나... 그런데 이따금, 거실의 큰 창으로 햇살이 크루통 나무와 몬스테라 나무의 잎사귀를 따사롭게 비추고 바닥에 아름다운 무늬가 생길 때면, 이 예쁜 바닥을 행복하게 뒹굴 고양이가 생각이 나곤 했다.
어느 날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고등어무늬의 깜찍한 아기 고양이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오빠가 터널에서 구조해 온 고양이인데, 눈꼽이 심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과 오빠는 이사를 앞두고 있고 고양이를 키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임시보호처와 입양처를 구한다는 글이었다. 나는 글을 보자마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내가 글을 조금 늦게 보았기 때문에 입양처는 이미 구해진 상태였고, 입양을 가기까지 남은 6주 정도 임시보호만 필요하다고 했다.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생겼다! 나는 내가 임시보호를 하겠다고 나섰다.
친구의 오빠가 닭봉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발견이 되었기에 고양이의 이름은 달봉이였다. 병원 의사 선생님께서 2개월 즈음 되어 보인다고 하셨단다. 친구네 집에 가서 본 달봉이는 주먹만한 몸에 주먹만한 머리를 달고 있었다. 전체 크기가 내 발 하나 보다 작았다. 한 손으로도 들어올릴 수 있는 크기였다. 발견 당일 집에 막 데려와서 찍은 달봉이의 사진을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눈과 온몸의 털이 지저분했었다. 하지만 친구네 집에서 몇 주를 보낸 달봉이는 그새 눈도, 털도 많이 깨끗해져 있었다. 아기 고양이 특유의 보송한 속털 너머로 겉털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민들레 홀씨같은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모든 물체에 대해 호기심이 넘쳤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이 사랑스러운 녀석과 함께 집에 갈 수 있다니, 나는 무척 기뻤다.
6주간 임시로 쓸 모래화장실, 장난감, 사료, 간식 등을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마련했다. 달봉이는 내가 가는 곳마다 열심히 따라다니고는 했다. 체력이 넘치는 시기라서 깨어 있을 때면 움직이는 것을 따라가서 놀고 싶어했다. 이빨이 간지러운지 이것저것 물어서 이빨 자국을 남기곤 했다. 내 몸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을 제일 많이 깨물린 나는 달봉이가 자는 모습이 제일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들이 아기가 잘 때 가장 예쁘다고 흔히 하는 말처럼. 내가 그토록 상상해왔던 그림같이 달봉이는 햇볕이 드는 따뜻한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진짜 고양이가 채워준 현실은 아주 신비로웠다. 달라진 건 고양이의 존재 뿐인데, 우리 집의 공기가, 평화로움의 냄새가 달라졌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작은 배를 바라보며, 이마나 등, 앞발, 뒷발을 살며시 쓰다듬으면 기분이 참 좋았다. 아기라서 잘 때 건드려도 쉽게 눈을 뜨지 않았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나도 드러누워 함께 낮잠을 자게 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꼭 후회가 됐다. 애가 잘 때 할 일을 했어야 했는데. 달봉이가 워낙 활동적이다보니 애가 깨어있는 시간에는 그림은 절대 그릴 수 없었고 설거지조차도 힘들었다. 자꾸 와서 발을 깨물어서. 나는 허리춤에 낚시대를 꽂고 허리를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설거지를 했다. 달봉이는 잠시라도 낚시대가 움직임을 멈추면 귀신같이 달려와 내 발가락에 이빨을 콕 박아넣곤 했다.
내가 아기 고양이를 임시보호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고양이 추종자 친구들이 집에 종종 놀러왔는데 다들 하나같이 처음에는 달봉이의 깜찍한 몸집과 애교에 감탄하고, 다음으론 넘치는 에너지에 놀라곤 했다. 모두들 귀엽고 예쁘다, 키우고 싶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내가 달봉이와 함께 살며 힘든 점을 말해주었다. 이런 저런 하소연을 하면 아이가 있는 친구는 아기 키우는 거랑 비슷하다며 공감을 해주었다. 달봉이를 보러 바쁜 친구들이 시간을 내어 우리 집에 놀러와주고 나 대신 달봉이와 놀아주어서 달봉이와 친구들 모두에게 고마웠다. 친구들이 돌아가고나면 달봉이는 밖에서 실컷 놀다 집에 들어온 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침이었다. 달봉이는 낮 내내 집에서 혼자 심심했는지 내가 퇴근을 하자마자 달려나와 강아지처럼 반겼고, 나는 저녁을 먹고 달봉이에게 간식을 주고 이런저런 장난감으로 실컷 놀아주고 나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잠이 짧아서 새벽 5~6시만 되면 달봉이는 헐크가 되어 내 온몸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나를 깨웠다. 아직 장난으로 무는 것과 진짜 무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지 물 때마다 사실 너무 아팠다. 그래서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잠이 부족해서 달봉이를 침실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고 잠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문에 구멍이 날 것 같이 필사적으로 문을 긁어대며 야옹대는 바람에 결국 문을 다시 열어주어야 했다. 어찌나 불쌍하게 야옹거리던지! 그럴 때면 유독 애처롭게 울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잠이 부족하니 미칠 것 같았다. 주말에는 함께 낮잠이라도 잘 수 있는데, 평일에는 그렇게 일어나서 달봉이와 놀아주고 출근을 해야하니 힘이 들었다.
6주가 지나고 달봉이를 입양처에 보내는 날이 왔다. 막상 보내는 날이 되니 이 작고 사랑스러운 녀석을 어찌 보내나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지치고 피곤했던 것보다도 즐거웠고 기분 좋았던 것들만 생각이 났다. 입양처는 내가 사는 곳보다 비좁아 보이는 주공아파트였다. 나는 애초에 1인 가구라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도 가구, 가전이 많이 없었고, 이곳은 4인 가족이 사는 곳이라 가구와 이런 저런 물품이 많아서 더 좁아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양이 화장실 위치부터해서 그 집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달봉이를 구조한 사람도 아니고, 입양처를 찾은 사람도 아니고 다만 짧은 기간 보호만 한 사람일 뿐인데 장소만 보고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아침까지 달봉이와 눈맞추고 뽀뽀하고 눈물을 흘리던 사람으로서 그냥 달봉이가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했고, 딸래미를 시집보내는 아빠처럼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달봉이는 새로운 장소에 거의 경계심이 없었다. 호기심이 경계심을 넘어선 모양이었다. 여기저기를 탐방하고 냄새를 맡고 높은 곳에 뛰어 오르느라 바빴다. 자신을 구조해 준 사람과 6주간 돌봐준 사람이 떠나든 말든 무아지경이었다.(이 자식, 그동안 나를 그렇게 물어뜯어놓고 한 번 쳐다도 보지 않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솔직히 섭섭했다.) 다행히도 그 집에는 초등학생 자녀가 둘 있었는데 그 둘의 에너지가 달봉이의 에너지와 맞먹는 듯 했다. 우리 달봉이, 이제 심심하지는 않겠다, 싶어서 마음이 놓였다.
달봉이를 보내고 한숨 푹 자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아기 고양이는 안되겠다. 달봉이를 만나기 전부터 한창 포인핸드 어플을 보며 입양을 꿈꾸고 있었는데 고양이는 한 번에 아기를 많이 낳아서 그런지 아기 고양이들이 많이 보였다. 남매끼리 조그만 머리를 맞대고 다글다글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캣타워와 사료를 사서 입양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6주가 지나고 나니 나의 경험은 그걸로 족했다. 나는 더이상 아기 고양이를 돌볼 여력이 없다. 어린이 고양이와 어린이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나도 나와 어울리는 어른 고양이를 만나고 싶었다. 다 자라서 의젓하고 위풍당당한, 진짜 고양이를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치명적인 귀여움에 홀랑 넘어가 또다시 육아를 하게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