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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Oct 10. 2023

오래된 일기장 속의 어린 세계

추억일까, 흑역사일까

어렸을 때부터 글로 감정을 풀어내는 것을 습관처럼 가지고 있었다. 화가 나면 종이 위에 온갖 험한 말을 써서 성난 마음을 가라앉혔고 설레는 일이 있으면 나를 설레게 했던 그 무언가의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적어내려가 감정을 증폭시켰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했던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글쓰기 학원도 다니고 백일장도 꾸준히 참가하며 수필 뿐만 아니라 시, 동화도 썼다. 상을 많이 탄 것은 아니었지만 아예 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책 읽기, 글 쓰기를 좋아했고 나쁘지 않은 수준의 글을 썼다. 지역 신문에 글이 실린 적도 한 번 있고 매년 발행되는 교지에도 이따금 투고를 해서 내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 두 가지 경우에는 즐겁게 썼다기보다는 엄마의 지도와 첨삭 아래 부족한 부분을 고쳐쓰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주로 희노애락의 감정으로 글을 내보냈다. 기쁘면 탄성이 나오고 슬프면 눈물이 나오듯 나에게서는 글이 나왔다. 특히 '락'의 감정이 잦았다. 당시 또래들 사이에 펜팔이 유행해서 매일 학교에서 얼굴을 보는 친구들과 편지를 수도없이 주고 받았다. 매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던 걸까 싶겠지만 그 때는 말로 하는 이야기와 글로 쓰는 이야기가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펜팔과 함께 여러 디자인의 편지지도 같이 유행을 했는데, 독특한 방식으로 개봉을 해야하는 귀여운 편지지를 고르면 그 편지를 열어보면서 설렐 친구의 감정을 기대하며 나부터 두근대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그리고 다같이 나누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와 나, 둘 사이에만 오가는 말이기에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 그 친구가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친구의 글씨체는 인쇄된 글씨체보다 마음 더 깊은 곳으로 다가왔다. 비록 내 손글씨가 예쁘지는 않았지만 내가 쓴 것도 친구의 마음 깊이 다가갔으리라 믿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이민을 가버린 친구와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은 이십 년 전 이렇게 서로의 마음에 새겨 넣은 우정 덕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열심히 썼던 글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글, 나 자신만 읽을 수 있는 글인 비밀일기였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과 폭신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누가 봐도 초등학생이 꾸민 다이어리. 작은 자물쇠가 달린 분홍색 정사각형 다이어리 안에는, 학교 일기장에는 적을 수 없었던 십 대 소녀의 눈물자국이 서린 감정의 폭풍우가 담겨 있다.


그 때는 그랬다. <안네의 일기>에서 감명을 받아 나도 지금 일어난 일들을, 내 기분을 상세히 써서 미래의 내가 기억할 수 있도록, 혹은 이걸로 안네의 아버지처럼 책을 만들어서 2000년대의 어린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야지. 그런데 막상 이제와서 일기를 펼쳐보니... 누구에게 보여줄 거리가 안된다. 아니,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읽기가 힘들 정도이다. 학교나 학원에서 잘생긴 친구를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는 둥 내 나이가 벌써 열두 살이라 눈물이 난다는 둥...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축구복 등번호 같은 걸 적어놓고 어차피 얘는 책을 안 읽으니 도서대출증을 내가 가져도 되겠지, 하며 도서관에 꽂혀 있던 걸 훔쳐온 것을 정당화하고.(졸업 때까지, 혹은 지금까지도 대출증이 사라진 걸 몰랐을거라 백 퍼센트 확신하지만, 어쨌든 물건을 마음대로 건드린 데에 A군에게 미안하다..) 실제로 그 아이의 도서대출증이 일기장에 끼워져 있어서 기함했다. 정말 말 그대로 좋아하기만 하고 친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처음으로 그 애랑 대화를 했다던가, 벌써 두 번째 대화라며 대화라고 하기에 너무나 내용이 없는, 그냥 주고 받은 문장들을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내성적이어서 그냥 상대방을 좋아하기만 하고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걸 상상만 실컷 했지 직접적 교류는 딱히 없었다. 연예인 좋아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왜 이렇게 많은건지! 중학생이 되어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기 전까지 거의 분기별로 대상이 바뀌는 것 같았다. 좀 오래 좋아했던 애들은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짧은 시간 좋아했던 애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유도 가지가지인데 제일 많이 적어놓은 건 '잘생겼다'는 형용사다. 착하고 장난을 재밌게 잘 치고 축구를 잘 하는 것도 있지만 모든 묘사의 끝은 잘생겼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몇몇은 잘생기지는 않았는데, 좋아하면 다 잘생겨 보였나보다. 어쩌다 좋아하는 남자애를 우연히 마주친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고 운이 좋은 날이랜다. 지금의 나는 어떤 날이 기분이 좋고 운이 좋은 날이지? 남자친구를 만나는 날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 기분이 좌우되는 건 여전하네.


읽을수록 웃기게도 내 일기가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안경과 교정기를 낀 여드름 투성이의 못생긴 소녀가 같은 반의 섬세하고 장난기 많은, 잘생긴 소년을 좋아하는 이야기.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와 비슷한 류. 어쩌면 우리 모두 한 때는 자신감이 바닥을 쳤던 시기가 있었고 그럼에도 사랑에 빠졌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이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되어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좀 또래들 가운데에서도 심하게 못생겼던 편이긴 했지만. 교정기를 떼면, 어른이 되어 더 이상 여드름이 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지금을 잘 견디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과거의 나 자신을 보는 건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힘들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안경, 여드름, 교정기 이렇게 자신감 결여 3종 세트를 완전히 갖춘 경우는 애초에 본 적이 없기도 하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두발규정에 따라 긴 머리를 단발로 잘라야 했던 날의 기록은 처참했다. 커트가 끝나고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펑펑 울면서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든 말든 미용실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써 있었다.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이보다 더 못생겨질 수 있다니! 처음 잘라보는 단발이라 어떻게 어떤 스타일로 잘라야 할지도 몰랐고, 미용실에서는 중학교에 간다니까 그냥 자를 대고 턱에 줄을 그은 것처럼 칼단발로 머리를 잘라주었다. 나는 머리숱이 많은 편이라 머리가 길 때는 머리카락의 무게 때문에 일자로 머리가 내려갔지만 단발을 해보니 삼각김밥의 외곽선처럼 머리가 사선으로 떴다. 이 날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칙 때문에 짧은 머리를 고수해야 했고 나는 내 머리가 마음에 든 적이 6년 내내 한 번도 없었다. 일기에는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 청소년이라고, 청소년 대우를 해주겠다면서 왜 머리를 기를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는지에 대한 울분을 교육부장관 어쩌고 어른들은 모른다 어쩌고 하면서 써 놓았다.(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 때는 학교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과 그렇게 교육부장관을 찾곤 했다) 어른들에게 복수할 거라면서 나중에 노인공경을 하지않겠단 말들도 있었다. 분노의 방향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읽으며 온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게 내가 쓴 거라니. 그러고보면 열세 살이 어린이이고 청소년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합리적인 사고가 안되는 나이인 거다. 어쨌든 저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나는 스무 살 이후로 십 년이 넘도록 절대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는다. 이 나이쯤 되니 갑자기 단발머리가 되는 친구들은 보통 아기 때문이라서 이제는 그런 이유로도 자르고 싶지 않기도 하고.


한창 일기를 쓰던 당시에 나는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십 년 후에는 꼭 꿈을 이루겠다며 야심차게 적어놓은 글의 주인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십 년 후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학생이었고 이십 년이 지나고서도 글을 쓰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글쓰기에서 손을 떼지 않긴 했지만 그 때 가졌던 넘치는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글을 쓰기가 어렵다. 그 땐 잠을 자면서 꿈조차도 정말 재미있게 꿨는데.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화려한 영화와 자극적인 영상들을 더 많이 보는데 나의 무의식은 더 삭막해졌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 시절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그럭저럭 먹고 산다.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 생각없이 일상생활을 하며 보내지만 그 가운데 기분 좋은 일이 있기도 하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그런 일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는 게 가끔 힘들게 느껴지지만.


내 일기 속의 독특한 점이 있다면, 오래 전의 나는 지금 현재 글을 쓰는 이 시간을 아주 특별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모든 일기를 xxxx년 xx월 xx일 xx시 xx분으로 마쳤다. 그렇게 쓰면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올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고등학생 때부터 매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해져 기성제품으로 나온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고 a월 b일 날짜 칸에 일기를 쓰다가도 칸이 넘치면 아무 옆 칸으로 주욱 이어서 쓰고 시간 기록도 하지 않는다. 그걸 써서 나중에 보아도 시간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것을 아니까. 지금와서 이렇게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니, 그냥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현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 자신이 현재에 머물러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일기를 쓴 이 소녀는 다시 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십 대 초반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낫다.


어른이 되어 자유를 누리고는 싶지만 어른이 되면 더이상 소녀가 아니니까, 지금처럼 작은 일에도 신이 나고 떨리지 않을테니 지금을 누려야 한다고 일기에 써 놓았다. 혹시 지금의 나도 이런 관점이 필요한 게 아닐까? 삼십 대 초반, 아직까지는 국가가 인정해준 청년으로서 알뜰교통카드의 청년복지를 누리고 있는 나이이지만 조만간 청년기가 지나고 중년기가 찾아올 것이다. 다시는 내게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의 청년기를 나는 누려야 한다. 엄마처럼 허리가 아파 장시간 비행을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장거리 비행을 요하는 여행지도 다녀야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연애도 실컷 해야 하고, 좋아하는 취미 생활인 베이킹과 그림 그리기도 나중에 기억력이 떨어져도 몸이 기억해서 자연히 할 수 있도록 꾸준히 해야 하고, 나와 함께 청년기를 누리고 있는 우리 집 고양이들과도 많이 놀아야 하고. 세상에, 나 할 일이 정말 많구나!


다이어리를 읽고 이 위험한 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과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혔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 삶에 대한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이 물건을 간직하기로 했다. 치매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불태워버리겠다는 결심도 함께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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