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전기톱 시리즈의 프리퀄
텍사스 전기톱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동물 보호(animal welfare). 무참히 도륙당하는 입장에 동물 대신 인간을 집어넣어, 인간의 육식 문화 때문에 도축당하는 동물들의 고통과 심정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둘째, 자본주의 도시화가 야기하는 인간 소외와 그로 인한 생존 경쟁. 촌에 남은 살인마 가족은 일자리 없이 빈곤에 몰리고 이러한 고립과 폐쇄의 환경은 그들에게 생존을 위해 살육을 선택하게 만든다. 셋째, 영원회귀(the chain of life).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수미상관을 이루며 반복된다. 이것은 우리 삶의 살육과 그 고통이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희생자들은 시리즈마다 살인마에게 죽음을 당한다.
이러한 세 가지 주제 의식은 텍사스 전기톱 시리즈의 속편인 이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폭주족이 주인공 히피 친구들이 탄 차를 뒤에서 쫓고 괴롭힐 때, 그 장면은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특히, 폭주족 여자(알렉스)가 총을 겨누며 추격하고 히피 친구들이 소와 부딪혀 전복되는 장면이 그렇다. 사자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이 다른 동물과 부딪혀 고꾸라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살인마 가족이 희생자를 다룰 때도 희생자 그들은 동물에 비유된다. 보안관은 사냥꾼처럼 총으로 주인공 히피들을 위협하고 연행한다. 건장한 성인 두 남성, 에릭과 딘은 늙은 보안관보다 완력이 강하지만(후반에 딘이 보안관을 바닥에 때려눕히는 장면으로 알 수 있다.) 총이라는 무력과 경찰이라는 권력 앞에 굴복하고 강제로 끌려간다. 이는 인간보다 힘이 세지만 인간의 무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냥당하고 도축당하는 동물의 처지와 흡사하다.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연행되는 베일리는 피해자의 권리 같은 것은 말해주지 않느냐고 보안관에게 묻지만("Don't you have to read us our rights or something, sheriff?") 그는 경찰 배지가 여기서는 힘이라며("You see, that badge is the authority around here.") 그녀의 권리를 일축한다. 영화에서 희생자들은 동물에 비유되므로 그녀가 말한 피해자의 권리는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를 뜻한다. 이 지구에서 인간처럼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권리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동물보다 위에 있다는 권위를 내세워 무력으로 동물을 사냥하고 도축한다. 보안관은 여기서는 배지가 힘이라고 말했는데 그 '여기'는 지구를 뜻하고 '배지'는 인간 중심, 인간 우위,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권위 의식을 뜻한다. 인간의 권위가 동물의 권리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안관의 배지는 실제로 자기 것이 아니다. 제복도 경찰차도 자기 것이 아니다. 그는 마을에 남은 마지막 보안관을 죽이고 자기가 진짜인 척 행세하는 가짜 보안관이다. 그러므로 그가 내세우는 권위의 힘도 허위인 것이다. 이는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고 도축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인간 우위의 사고 방식이, 그 인간의 권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위스럽고 억지스러운지 보여준다.
강제로 연행된 딘과 에릭은 고깃덩어리처럼 공중에 매달려 걸리고, 보안관은 가축을 씻기듯이 그들에게 물줄기를 쏜다("My daddy always told me that if you want to be a good farmer you gotta keep your livestock clean."). 차 타고 도망치다 갈고리에 찍혀 바닥에 떨어진 베일리는 레더페이스에 의해 사냥감처럼 끌려간다. 딘도 사냥감처럼 덫에 걸려 도망에 실패한다. 살인마 가족은 보안과과 폭주족 남녀를 죽여 인육으로 먹는다. 이렇게 희생자들이 동물에 비유되고, 동물처럼 다뤄지고, 인간에게 도축당하는 동물의 입장에 대입됨으로써 영화는 관객에게 동물이 느끼는 고통과 공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체험시킨다. 더불어 동물 보호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운다.
레더페이스는 영화 속 살인마지만 그의 가죽 가면 때문에 인간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늘 희생자의 얼굴 피부를 도려내어 가면으로 만들어 쓰고 다닌다. 그는 어느 얼굴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에릭의 얼굴을 쓰면 에릭이 되고, 딘의 얼굴을 쓰면 딘이 되고, 베일리의 얼굴을 쓰면 베일리가 된다. 리메이크작(The Texas Chainsaw Massacre, 2003)에서는 켐퍼의 얼굴을 쓰고 나타난다. 여러 얼굴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한 인간이 아닌 다수 인간, 즉 인간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그가 살인마라는 것은, 즉 얼굴은 여럿이지만 본체는 살인마 한 명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동물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살인마라는 뜻이고, 이것은 동물을 사냥하고 도축하는, 그리고 육식을 즐기는 인간의 살인적 속성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된다.
영화에서 레더페이스는 짐승(animal)이라는 표현으로 몇 번 욕을 먹는다. 도살장 직원이 그를 내쫓을 때("You gotta get the hell out of here, you dumb animal!")와 저녁 식사 자리에 묶여 있는 크리시가 지하실에 끌려가기 싫다고 발악할 때("No, you stay away from me, you fucking animal!" "You dirty animal!"). 희생자가 동물을 상징하고 살인마 가족이 동물을 도축하는 인간을 상징하는데, 인간을 대표하는 레더페이스에게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동물이고, 그래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 의식은 허위이고, 인간이 가장 더럽고 잔인한 동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Man was the real monster here, just wearing a differnent face.).
두 가지 사건이 영화의 배경을 이룬다. 경제 불황과 베트남 전쟁. 자본주의의 기계화와 도시화 특성은 텍사스 그 마을을 황폐화했다. 도축장은 폐쇄되었고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마지막으로 한 명 남은 보안관은 다음 주에 미시간으로 전근할 예정이다. 그 마을은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마 가족이 살인과 인육을 감행한 까닭은 그들이 선천적으로 악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적 공포와 빈곤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영화는 범죄의 선천적 요인보다 후천적 요인에 더 무게를 싣는다. 레더페이스가 처음으로 살인한 것도 도축장이 폐쇄되어 일자리를 잃은 것과 연관되고, (가짜) 보안관이 처음으로 인육을 먹은 것도 한국전쟁 때 포로가 되어 사람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긴급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인마였던 것이 아니라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토마스(레더페이스)를 체포하러 경찰차를 타고 갈 때 보안관은 무엇이 인간을 살인마로 만드는지 묻고, 가짜 보안관 찰리가 토마스를 잘 키웠다면 지금 그를 체포하러 갈 일도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I don't mind saying: You raised that retard right, me and you, we ain't taking this drive right now.").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마가 되는 것에 선천적 요인이 중요하다면 토마스를 잘 키웠는지 못키웠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살인마가 될 운명이라면 양육과 환경은 상관없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못키웠기 때문에 그가 살인마가 되어 지금 그를 체포하러 간다는, 보안관의 말은 토마스의 살인이 후천적 요인 탓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보안관은 그를 저능아라고 멸시하는데 찰리는 그가 저능아가 아니며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살인이 낮은 지능 같은 선천적 요인 탓이 아님을 암시한다.
레더페이스의 선천적 요인을 부정하는 근거는 하나 더 있다. 그의 엄마 루다 매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크리시와 베일리가 들렀을 때 폭주족 여자가 그녀들을 보고 미모는 가죽 한 꺼풀일 뿐이라고 말한다("But pretty only goes skin-deep. Ugly is to the bone."). 외모는 피상적인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피부 질환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레더페이스에게 적용해 보면 그는 문제 될 게 없는 사람이다. 외모 때문에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괴롭힘 당했지만("This is one of those assholes who used to fuck with you in the schoolyard, Tommy.")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므로 그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고 외모 때문에 그가 추한 인간이라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그를 범죄로 이끈 것은 피부 질환이라는 선천적 요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그를 멀리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의 시선("You and your family are the only ones stupid enough to still be living in this town. Your kind belong in this shithole.")과 오해("He ain't retarded. He's misunderstood.")라는 후천적 요인이다.
경제적 공포와 빈곤이라는 후천적 환경은 살인마 가족의 범죄를 자기 합리화로 이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야기한 결과로 기계화와 도시화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면, 그들처럼 촌에 남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주류에서 소외되어 비주류로 전락하고 생존의 절박함과 급박함에 내몰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은 누구를 죽이고 누구의 것을 빼앗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 도로에서 희생자를 포획해 죽이고 그들의 물건(차와 권총)을 회수한다. 생존을 위해 살인과 절도가 필요악이 된 셈이다. 이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야만적 속성(cannibalistic capitalism)에 대한 비유다. 또한, 폭주족 남자가 크리시를 도와주기보다 자기 애인만 구하려고 행동하는 모습은 자본주의의 냉혹하고 이기적인 면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존 경쟁의 무참한 살육이 벌어지는 그곳은 베트남 전쟁의 축소판이다. 전쟁이 다른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생존을 위해 죽고 죽이는 그곳이 전쟁터다. 보안관은 군대 조교를 연상시키듯 딘에게 팔굽혀펴기 얼차려를 시킨다.
직선의 세계관과 원형의 세계관이 있다. 전자는 처음과 끝이 존재하지만 후자는 처음과 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원의 한 점에서 출발하면 같은 점으로 돌아온다. 처음이 끝이 되고 끝이 처음이 된다. 그리고 그 경로는 언제나 동일하므로 그 세계에서는 숙명처럼 모든 일이 반복된다. 폭주족이 히피 친구들이 탄 차를 괴롭히고 나서 에릭은 사이드미러가 깨진 것을 발견한다. 사이드미러는 뒤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다. 그것이 깨졌다는 것은 뒤를 볼 수 없음을 뜻하고, 뒤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원형 세계관에 들어왔음을 뜻한다. 원처럼 돌고 도는 세상은 뒤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이 끝이 되는 것처럼 뒤가 앞이 된다. 모든 것이 순환하므로 앞뒤를 구분할 수 없고 뒤가 없으므로 그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울이 깨진 것을 발견한 후 히피 친구들은 차에 올라타고 다시 도로를 달리는데, 그때 폭주족 여자가 총을 들고 추격하고 그들은 그녀의 위협 때문에 운전에 신경 쓰지 못하다 소와 부딪혀 사고가 난다. 이 장면을 보고 결말에 크리시가 차를 타고 도망할 때 어떤 최후를 맞을지 예측할 수 있다. 사이드미러가 깨진 그들은 원형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모든 일은 반복된다. 뒤에서 누가 추격하고 앞에서 누구를 들이받는 그 구도는 수미상관처럼 결말에서도 되풀이된다. 도축장에서 탈출해 차를 타고 도망친 크리시는 멀리 앞에 보이는 경찰차의 불빛을 보고 안도하지만 뒷좌석에 갑자기 나타난 레더페이스의 전기톱 공격을 받고 죽으면서 경찰과 한 남자를 들이받는다.
레더페이스가 들고 다니는 전기톱은 날이 순환하며 회전하므로 원형 세계관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전기톱 위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죽임, 그 살육 전쟁이 무한하게 되풀이되는 우리 삶에 대한 비유다.
페미니스트는 이 영화를 싫어할 확률이 높다. 영화가 여성 주인공 크리시에게 주체성이 아닌 남성 의존성을 부여해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야기 고비마다 남자의 개입과 도움을 받는다. 살인마 가족의 집에 잠입하기 위해 폭주족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에릭과 결혼해서 아들과 딸 각각 하나씩 낳자고 초반에 약속했으면서 살인마 가족의 지하실에서 에릭을 구출하는 위험 상황에서는 아들 셋을 낳자고 얘기한다. 도살장에서도 딘의 도움과 희생 덕분에 달아날 수 있게 되고, 마지막 차를 타고 도망할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 그녀를 잠깐 안도시킨 것도 남자 경찰과 남자 운전수다. 이러한 남성 의존적 전개와 설정은 마치 여자에게는 반드시 남자가 필요하다거나 여자는 남자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남성 우월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더페이스를 도살장에서 내쫓는 신에서 장애물이 인물 앞을 가린 장면들이 등장한다. 창살이나 갈고리 같은 그 장애물은 인물간의 반목과 갈등 관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 사이에 무엇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은 서로 시원하게 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살장 직원들은 레더페이스를 내쫓으려고 하고, 레더페이스는 도살장이 폐쇄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끝까지 남아 있으려고 한다. 그들의 입장 차이 때문에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에릭이 딘을 부축하고 달아다는 장면에도 철조망 같은 장애물이 그들 앞을 가린다. 철조망은 감옥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도망치고 있지만 철조망에 갇힌 꼴처럼 보인다. 이 장애물은 그들이 도망에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보안관으로 변신해 첫 출근 한 찰리를 카메라는 앙각으로 잡는다.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는 대상과 인물에 권위와 위엄을 부여한다. 대상과 인물이 더 커 보이므로 강하게 느껴진다. 찰리는 마을에 남은 유일한 공권력이 되었으므로 앙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찰리는 토마스(레더페이스)에게 삼촌뻘 되는 큰형으로서 가족 내 그보다 서열이 높다. 토마스는 찰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그들의 서열 관계는 토마스가 지하실에서 에릭의 얼굴을 도려내 만든 가면을 쓰고 찰리의 부름에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카메라는 앙각의 구도로 두 사람을 잡는다. 토마스가 더 앞에 있어서 커 보이지만 찰리가 더 높은 곳에 있으므로 우월해 보인다. 토마스는 올려다보는 입장이고 찰리는 내려다보는 입장이다. 고개를 숙이고 주춤하는 토마스의 자세에 비해 어깨 펴고 양손을 옆구리에 올린 찰리의 자세가 당연히 우월해 보인다. 또한 역광을 받아 앞면이 어둡게 처리된 찰리의 모습은 공포감까지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