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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28일 후

이 정도면 수작이지

by 심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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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후>가 개봉돼서 <28일 후>부터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28일' '28주' '28년'이 시리즈인데 중간에 '28월'이 없는 게 개인적으로 아쉽다. 원래 대니 보일은 '28월'을 만들 생각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무산되었고 이번에 '28년'이 나오게 된 것이다. '28' 시리즈의 첫 작품인 이 <28일 후>는 현재까지도 최고 수준의 좀비 영화로 평가 받고 약 20년 전 개봉 당시에도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릴 때 이 영화를 보고 심장이 두근두근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이 영화에 반했던 것은 좀비 창궐 이후의 아포칼립스를 잘 묘사했다는 점과 뛰어다니는 좀비를 도입해 그 장르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이 영화 전에는 좀비가 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두교와 관련한 시체들이 살아나서 멍한 눈으로 엉기적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대다수의 좀비 영화가 그다지 무섭지 않았던 것도 사실인데 <28일 후>는 좀비들이 미친 듯이 달리니까 관객이 쫓기는 입장이 되어 긴장과 공포가 안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달리는 좀비는 TV 속에서 나온 사다코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로 거의 모든 영화의 좀비는, 달린다. 이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28일 후>가 영화사에 한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앞서 말한 아포칼립스에 대한 묘사다. 파멸의 세상을 이토록 잘 보여준 영화가 있었던가. 저화소 카메라의 거친 화면이 살풍경한 느낌을 더해주고 런던 시내를 통제해 찍은 장면은 그 도시에 사람 없는 이미지를 아무도 본 적 없으므로 관객이 느낄 공허함과 외로움을 배가한다. 어찌 보면 그 삭막한 풍경이 뛰어다니는 좀비보다 무섭다고 할 수 있다. 익스트림롱숏 안의 인간(짐)은 점처럼 작아 정말 종말이 일어난다면 도시의 건물 같은 무정물보다 존재감 없을 듯하다. 아득바득하는 우리 삶이 결국 허무로 사라진다는 게 당장 좀비에 물리는 것보다 근원적 공포에 가깝다.


주제 의식

"지난 4주간 사람들은 서로를 죽였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도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살육을 자행해왔지. 그에 비춰 보면 지금도 정상이야." 헨리 소령이 한 말이다. 식사 중에, 좀비 아포칼립스가 된 현 상황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밝히는데 그는 이전에도 인류가 전쟁과 학살을 했으니 지금 좀비와 싸우는 현실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영화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듯이 첫 장면에 인간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폭동·학살 영상을 보여준다. 실험실 침대에 묶인 침팬지가 강제 시청을 통해 분노 바이러스를 일으키는데 다음 신에서 주인공 짐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눈을 뜬다. 침대에 누운 이미지가 동일하므로 짐은 곧 침팬지라 할 수 있다. 분노 바이러스의 대상이고, 침팬지가 폭력적인 환경(영상 시청)에 놓였듯이 짐도 좀비 세상을 살아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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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병원에서 깨어날 때 그의 얼굴을 비춘 익스트림 클로즈업 화면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머리카락, 눈썹, 눈꺼풀, 그 외의 잔털은 그를 침팬지와 유사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실험실 침대에서 병원 침대로 이어지는 매치컷은 유명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뼈다귀-우주선 장면을 떠오르게 하며 '짐=침팬지'란 공식을 강화한다. 결국 짐은 실험실 침팬지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군인들과 싸울 때 무지막지한 공격성을 보여준다. 셀레나는 그가 이미 좀비가 된 줄 알고 칼로 내려치려고 하지만 정상인 것을 확인하고 감격의 키스를 나눈다. 짐의 공격성이 영화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좀비보다 무서운 게 인간이라는 ―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공포물의 속설처럼 ―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스토리상 셀레나와 해나를 구하려면 군인들을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에만 공격성이 부여된 것이다. 오히려 진정 부정적인 것은, 인간의 그릇된 욕망과 권위적 지배를 대표하는 군인들이다. 영화 처음에 침팬지가 시청한 폭력 영상과 후반에 등장한 군인들은 동형이다. 감독이 생각하는, 인간의 나쁜 속성을 상징하는 역할과 장치다. 구호 방송인 줄 알고 찾아갔더니 여자를 취하기 위해서 생존자들을 유인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숲속의 시체 더미를 통해 알 수 있다. 좀비를 피해 도착한 곳이지만 진짜 적은 같은 인간(군인)이었다. 좀비 영화의 최종 빌런이 좀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발함과 아이러니함. 좀비와의 싸움이나 인간들의 싸움이나 마찬가지. 헨리 소령은 그래서 지금의 아포칼립스가 인류의 이전 모습과 다를 바 없어서 정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원래 인간들은 싸워 왔잖아.)

혼자 매우 진지한(?) 파렐 중사는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 인간은 아주 잠시 동안 존재해왔어. 다시 말해서 인류의 멸망은 정상으로의 회귀를 뜻하지." 이상주의자인 그에게 군인들의 행태는 ― 성욕 해소를 위해 여자 생존자를 모집한 것과 쾌락에 눈멀어 국가 재건에는 무관심한 것 ―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차라리 파멸에 손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악이어도 선을 위해서라면 응당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주의 입장에서는 그게 옳은 일이다. 도덕, 원칙,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모조리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파렐 중사의 발언에는 좀 염세적인 뉘앙스가 있다. 현재 자신이 속한 군인 공동체와 그것의 외부인 좀비 세상은 이상(理想)에 비춰 보았을 때 그와 대척점을 이루는, 아주 형편없고 불순하고 끔찍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짐과 함께 감금되었을 때도 파렐은 자포자기한 말을 쏟아 낸다. "우린 이 지옥 속에서 미쳐가고 있어." "영국은 신의 저주를 받았어." "당신이라면 병균이 퍼진 섬을 어쩌겠어?" 이상주의는 완벽주의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그는 불완전한 세상(좀비 영국)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숲속에서 처형당할 때 자기부터 죽여 달라고 한 것도 불완전한 삶에 미련이 없는 것과 관련 있다.

본인이 바란 대로 파렐은 먼저 죽고 짐은 기회를 틈타 도망친다. 운명의 순간에서 한쪽은 죽고 다른 쪽은 산다. 산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극의 진행상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영화가 짐의 철학에 더 동조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을 허용한다. 마지막까지 사는 놈이 자신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거고 영화의 주제는 그를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공포 영화에서 일찍 죽는 놈들은 작품의 가치관·세계관으로부터 부정당한 것이라 봐도 좋다. 주제에 부합하는 인물(대개 주인공)이 마지막 승자고 영화는 그를 통해 메시지를 완성한다.

그럼 짐의 철학은 무엇인가. 셀레나와 나눈 대화를 잠깐 확인하자. 잔디 깔린 폐허에서 식사를 즐긴 뒤 둘은 이런 얘기를 한다. "내가 틀렸다는 생각을 했어요." "뭘요?" "죽음. 고난. 프랭크 부녀를 봐요. 서로 의지하며 이겨 내잖아요. 숨만 붙었다고 사는 건 아니죠." "같은 생각을 했어요." 짐이 셀레나의 의견에 동의한다. 셀레나는, 좀비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친구·동료가 그것에 방해되면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고 했었는데 ― 그래서 짐의 집에서 마크가 감염됐을 때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를 칼로 내려찍었던 거고 프랭크 부녀로부터 처소를 제공받았음에도 그들이 짐(burden)이 될 수 있으니까 정 주지 말라고 얘기했던 것인데 ― 그런 냉혈의 철학이 틀렸음을 고백한 거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에 동조한 짐의 철학은 사랑·화합·연대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는 프랭크 부녀가 짐이 된다면 버려야 한다고 셀레나가 말했을 때 자기는 그렇게 못 한다고 답했었다.

헨리 소령은 자신이 실험 대상으로 묶어 두었던 메일러에게 붙잡혀 죽음을 맞는다. (좀비가 됐을 테니까 인간으로서는 죽은 것이다.) 살육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군인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부도덕한 짓(강간 허용)도 서슴지 않았던 그의 철학은 '감염'으로 종식된 것이다. 감염자는 분노밖에 없기 때문에 유의미한 철학 같은 게 있을 수 없다. 충혈된 눈으로 컥컥대며 세상을 돌아다닐 뿐이다.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 인간 철학을 실천하는 건 짐 쪽(짐, 셀레나, 해나)이다. 그들은 아포칼립스에서 영화가 그나마 이상적 공간으로 표현하는 '자연'에 거처를 마련하고 지옥(HELL) 같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철학(HELLO)을 외친다. 인사라는 건 서로의 존재를 알아주고 공조의 관계를 만드는 행위다. 짐이 영화 초반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말 'HELLO', 영화 마지막에 비행기 보라고 크게 나타낸 말 'HELLO'. 'HELL'을 'HELLO'로 만들자는 게, 그러니까 영화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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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세상에서 도시는 불타고 황폐한데 자연은 긍정적 의미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 인상파 그림 같은 이 장면에서 꽃들은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영화는 이처럼 종종 자연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짐 일행은 폐허의 잔디밭에서 즐거운 식사를 하고("건포도가 아직 촉촉해." "뭐라고요?" "건포도가 말랑하다고.") 흰 말 두 마리와 검은 말 두 마리로 이뤄진 동물 가족도 만난다. 자연에서 뛰노는 그 네 마리 말은 건강하고 행복해 보인다. 흑과 백의 구성은 인종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피부색에 구애받지 말고 모두가 한 가족처럼 살아가자는 감독의 메시지다.


빨간색의 의미

여성의 생리 주기가 평균 28일이다. 생리는 생명(탄생)과 관계된 것이다. 혈액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로 인해 영국이 28일 만에 초토화했다. 그 생명의 주기 28일 후에 정상인의 세상에서 감염자의 세상으로 돌변한 것이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 28일 지난 뒤에 깨어난 짐은 새 세상에 태어난 아기와 같다. 그래서 그는 홀딱 벗고 있고 빨간색 액세서리가 달린 열쇠를 통해 병실 밖으로 나간다. 빨강은 피의 색이고 피는 생명을 뜻하니까 짐이 빨간색 열쇠로 문을 열었다는 것은 생명을 얻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아기가 울면서 엄마를 찾듯이 짐은 버려진 병원에서 "Hello?"라고 외친다. 영화의 모든 갈등이 종결되고 결말에 이르렀을 때 '28일 후'라는 자막이 다시 뜨고 짐은 초반 장면에서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서 눈을 뜬다. 헨리 소령이 쏜 총을 맞고 28일 후에 깨어난 게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깨어난 건 28일 전인데 총 맞고 나서 자연에 정착한 지 28일이 지났다는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커튼까지 구조 신호(HELLO) 만드는 데 사용한 것이냐는 말을 하는데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짐이 총 맞고 그보다 전에 이미 깨어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빨간색 상의를 입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빨간색은 앞서 말했듯이 생명을 뜻한다. 좀비 지옥(HELL)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 감염자가 아사하는 시점이 28일 후다 ― 자연에서 인간처럼(HELLO) 살고 있으니 짐은 영화 초반에 빨간 열쇠로 좀비 세상에 태어났듯이 후반에 빨간 옷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생리 주기에 맞춰 다시 깨어나 빨간 걸 취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세상은 좀 달라졌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군인들이 셀레나와 해나를 추행할 때 빨간 드레스를 입히는데 이것도 성과 관련돼 있으므로 의도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헨리 소령은 짐에게 여자들을 유인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여자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한다. 아홉 군인이 감염자를 다 죽인다 해도 그의 말마따나 그 남자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필자가 추행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에 번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 미첼 하사는 셀레나를 끌고 피신했을 때 여기서 살아나가면 아담한 집을 마련해서 둘이 알콩달콩 잘 살아보자고 말한다. 아포칼립스 속에서 남자들의 성욕이 왜곡되었고 여자와 성을 통해 어떤 미래(탄생)로 돌파하려 했던 것이므로 피와 생명을 상징하는 빨간 드레스가 꼭 등장했던 것이다.

인상 깊은 점은 영화 마지막에 셀레나가 재봉틀로 구호 천을 만들 때 자신이 강제로 입었던 빨간 드레스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짐은 그걸 보고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고 말한다.) 그 옷은 셀레나와 해나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다름없다. 다시는 입어보기도,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은데 셀레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그걸로 구호 천을 깁는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펼쳐진 'HELLO'의 'O'를 보면 군데군데 빨간색으로 땜질된 걸 볼 수 있다. 이는 지옥(HELL) 같은 세상을 인간답게(HELLO) 만들려면 고통과 시련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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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 숙소에서 라오콘 조각상이 수시로 등장한다. 의미 없는 소품이라 하기엔 화면에 잡히는 구도가 예사롭지 않다. 분명 감독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 조각상을 구해 왔을 것이다. 라오콘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아폴론에게 독신을 약속했는데 그걸 어기고 아들 둘을 낳았다가 화가 난 아폴론이 뱀을 보내 그를 죽였다는 것이고, 전쟁 중에 트로이 목마를 보고 그 속에 그리스군이 숨어 있음을 알아채고 창을 던졌는데 그리스 편이었던 포세이돈이 뱀을 보내 역시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 얘기들은 주인공 짐과 헨리 소령에게 각각 적용된다. 라오콘에 대한 설화가 두 가지이므로 의도된 연출답게 두 인물을 다 대변하는 것이다. 우선 짐으로 풀이해 보면, 셀레나와 해나를 데리고 군인 숙소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생존자 보호가 아니라 여자 취함이 목적이어서 그들의 꾀와 호의에 당한 것인데 이때 라오콘은 트로이 목마가 속임수임을 알아챈 인물이므로 짐에게 군인들의 보호가 거짓과 사기임을 알리고 있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로비의 그 조각상을 본 순간 짐은 군인들에게 낚였음을 눈치채어야 했던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가 미끼임을 간파한 라오콘은 포세이돈이 보낸 뱀에 의해 아들 둘과 함께 죽는다. 짐은 가족 같은 셀레나와 해나를 잃을 뻔한다. 이제 라오콘을 헨리 소령에게 적용해보면 그에 걸맞은 다른 풀이가 가능해진다. 아폴론과 독신을 약속한 라오콘은 여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신의 징벌을 받는다. 원래 여자 없이 살아야 할 헨리 소령은 윤리를 어기면서까지 여자를 취하려고 하다가 각성한(속된 말로 하면 '빡친') 짐에 의해 ― 엄밀히 말하면 해나가 차 후진으로 죽게 한 것이지만 ― 죽음을 벌을 당한다. 재밌게도 아폴론이 라오콘에게 보낸 뱀이 두 마리인데, 그 둘이 라오콘을 죽이는데 헨리 소령을 공격한 사람도 짐과 메일러(감염된 군인), 두 명이다. 게다가 메일러(Mailer)의 단어 뜻은 우편물 혹은 발송이다. '보낸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폴론이 뱀을 '보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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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에 갇힌 이미지가 종종 등장한다. 이건 영화에서 너무 지겹게 쓰이는 미장센이다. 십자 구조물 안쪽의 인물은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화면 앞에 창살이 놓여 있어서 시청자는 무의식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고 곧 그건 인물의 외부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는 걸 알게 된다. 병원에서 깨어나 환자복을 입은 짐은 좀비 세상에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다. 군인 숙소에서 만찬(?)을 제공받지만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에서 짐이 그나마 자유를 누리는 순간은 프랭크 부녀와 함께 있을 때와 마지막에 자연의 집에서 구호 천을 펼치는 장면이다. 그 시퀀스에서는 격자 미장센이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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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앞에 다른 물건을 두어도 불편함의 효과를 연출할 수 있다. 인물을 가리는 물건들은 시청자에게 갑갑함과 불길함을 준다. 그리고 그런 컷들이 인물들을 한 화면에 다 담지 않고 분할돼서 이어지면 인물 간의 갈등과 반목이 강해지는 듯한 효과가 나타난다. 실제로 영화에서 이 식사 신은 한 장면에 두어 사람만 담는 미디업 클로즈업으로 진행된다. 컷으로 잘린 채 대화하는 장면들은 이들이 진정으로 화합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혼자 진지한 파렐 중사는 왕따나 다름없고 병사들은 현재의 아포칼립스에 대한 각자의 판단을 늘어놓는다. 식사에 초대된 짐과 셀레나와 해나는 이 분위기에 별로 섞이고 싶지 않은 눈치다. 영화에서 이렇게 맛없는 식사 장면이 흔했던가. 당장이라도 서로 음식을 집어 던지며 싸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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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집에서 묵게 된 짐과 셀레나는 잠자리 들기 전에 휴식을 취한다. 어항에 물이 없어 물고기들이 비좁아 힘들어하는데 그건 역시나 물이 없어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프랭크의 사정과 동일하다. 다음 날 프랭크는 짐을 옥상으로 불러 수많은 플라스틱 들통에 물이 담겨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비를 기다리는 신세라니. 그것도 비 많은 영국에서.") 물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함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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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병원에서 깨어나 런던 시내를 걸을 때 그의 절망한 표정과 다르게 광고판의 모델은 활짝 웃고 있다. 아포칼립스가 된 런던에서 이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광고 같은 사진 속 인물뿐이다. 그들의 웃음은 과거로부터 박제된 것이므로 진짜 현실의 웃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런던에서 실제 웃음은 없는 것이다.


부기

교회에서 나온 감염자들로부터 짐을 구해주고 슈퍼마켓에 데려왔을 때 마크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그에게 농담을 건넨다. 그것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와 기린이 술을 마셨는데 기린이 취해서 쓰러졌고 남자가 떠나려고 하자 바텐더가 기린도 데려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기린은 사람 안 잡아 먹는다고 답했다. 끝. 짐이 전혀 웃지 않자 마크는 그에게 유머 감각 꽝이라 말하고 돌아선다. 이게 무슨 뜻일까? 왜 그 농담이 웃겨야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짐은 좀비 세상을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농담에 웃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원래 일반 세상(좀비 이전)이었다면 기린이 잡아먹든 안 잡아먹든 술 다 마셨으면 데리고 나가야 하는 게 맞다. 근데 영화 속 지금 세상은 좀비가 사람을 잡아먹고(감염시키고) 다니므로 기린이 좀비처럼 사람을 잡아먹지만 않는다면 취한 채 내버려둬도 괜찮다는 발상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크의 농담은 기린같이 큰 동물이 취해 널브러진 걸 별게 아닌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실의 좀비 세상이 극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좀비가 얼마나 사람을 잡아먹고 위험하면 그 큰 기린이 취해서 쓰러진 걸 얘는 잡아먹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기린을 데려가지 않아도 될 만큼,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받아들여질 만큼 외부 현실이 비정상적이라는 뜻이다. 좀비 세상을 충분히 경험한 마크에게 그것은 농담이 될 수 있고 경험이 덜한 짐에겐 아직 농담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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