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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e 육은주 Jul 27. 2022

김대중의 문화고속도로

한류가 급부상하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가 바로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중의 한 대목, 문화국가론일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김구 선생님 말이 옳다. 문화의 힘이 한 국가의 힘이고 궁극적 전략목표이자 결과이다. 그러나 선생 말씀의 순수한 취지에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선생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까지 과정의 지난함은 말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한류라는 이름의 '문화 국가로서의 매력'은 온갖 정치적 경제적 간난을 거치고 이루어진 것이다. 이승만의 외교적 안정화, 박정희의 산업화, 군부정권, 외환위기, 김대중 정권의 정보화를 거친 후 힘겹게 달성할 수 있었다. 짜고, 맵고, 쓰라리고 눈물겹게 아픈 성장통을 거친 후에 도달할 수 있는 한 언덕이었다. 그리고 그 언덕은 도달했다고 멈추는 것도,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 앞에는 또 다른 산, 또 다른 변화의 물결이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 또한 문화에 대해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중국은 민주주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한류와 같은 것이 나올 수 없다’ 백 번 옳게 보신 말씀이다. 한 국가의 밸류 체인을 국체(國體)가 먼저이고,그 다음에 정체(政體,정치체제)-군사-외교-경제-행정, 복지-등등의 순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나중에 꽃피고, 그렇지만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매일 각종 미디어와 컨텐츠 형태로 피부로 실감하고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이 문화이다. 

문화의 힘은 가치에서 나오고, 그 가치 위에 세워진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원활히 작동을 해야, 그리하여 잉여 경제력과 노동력이 있어야 ‘높은 수준의’ 문화가 비로소 생산될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해서는 영향력 있는, ‘높은 수준의, 문화의 힘’을 가질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산업적 고찰을 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공업 육성 등으로 경제발전,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깔았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와 IT의 고속도로를 깔았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는 집권을 하면서 동시에 일본문화를 개방했다. 우려 속의 개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문화의 자생력을 증명하고, 대외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는 한류가 민간 주도라고 했지만, 김대중 정부가 대중문화 발전에 시의적절하게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영화사전심의제 폐지를 비롯한 검열 철폐, 저작권 확립 등 자유로운 창작활동의 보장 및 창작자의 권리 보장, 컨텐츠 산업 육성정책 등 친(親)문화산업적 정책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야심 차게 내세운 문화정책의 첫 단추인 ‘신지식인 1호’중 ‘용가리’’디워’를 제작한 개그맨 출신의 ‘심형래’감독이 있었던 것을 보면 정부 정책 집행자들의 문화적 안목에는 회의를 품지 않을 수밖에 없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기며 대흥행을 할 당시 김대중 당대표는 직접 영화관을 찾았다. 당시는 김영삼 대통령 재임기간으로 김영삼 대통령 또한 직접 영화관을 찾았으나시간이 흐른 후 대중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관람을 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예술친화적으로 존재감이 컸다. 그는 이때 맺은 인연을 잊지 않고, 1997년 오정해 배우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기도 하는 등 문화예술인들을 인간적으로도 각별히 챙겼다. 그 무렵 김대중 대표의 육필 원고를 받아본 적이 있다. 빨간 펜으로 일일이 몇번의 수정과 탈고를 거듭한 흔적이 보이는 친필 원고를 보면서 그의 문화적 식견과 안목, 꼼꼼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글을 쓰며 필자의 기억도 잘못된 것이 있어서 보정을 해야 했다. 필자는 임 감독이 서편제로 칸느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가 수상한 것은 2002년 작품 ‘취화선’이었다. 그만큼 ‘서편제’의 임팩트가 컸기도 하고, 작품성도 뛰어났기 때문일 터이지만, 임 감독도 수상으로 국제적 인정을 받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개인적으로 서편제가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과 우리 전통에 대한 재평가 열기를 환기시켜준 공로는 크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필자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음악적 완성을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다’는 예술혼 지상의 정서가 진정한 한국적 정서라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원작인 이청준의 단편소설에도 이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없으며, 그것은 우리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적 정서에 가깝고, 여주인공 송화가 아름답게 꽃눈이 흩날리는 사이로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어딘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가게무샤’에서 보여준 일본적 미학을 연상케하는 부분이 있어 끝맛이 마냥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중문화의 산업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기업의 역할이다. 삼성은 90년대 초반인 1992년, 영상제작과 비디오, 음반 사업 등을 주영역으로 하는 삼성영상사업단을 출범했다. 삼성은 할리우드 영화 수입배급, ‘중경삼림’등 홍콩영화 제작지원 등을 하는 동시에 ‘그 섬에 가고 싶다’, 한국영화에 신세대 등장을 알린 ‘결혼이야기’등 중대박 한국영화들을 꾸준히 제작 및 지원하였는데, 마침내 1999년 강제규 감독의 메가 히트작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정립시키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삼성은 대중문화사업에서 철수했지만, 이 과정에서 삼성이 영화계와 대중문화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금은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빼앗는다 비판을 받지만, 대중문화가 산업화되는 데 있어 초창기 대기업들의 ‘선도효과’가 없었으면 지금의 결과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전까지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계는 인력의 수준은 물론, 정확한 회계라는 개념도, 기업 운영체계도, 마케팅 개념도 자리 잡히지 않은 주먹구구 ‘점빵’수준이었다. 영화 출입기자를 하면서 국내영화사 기획 사무실, 미국 직배 배급회사 홍보실 등을 들르곤 했다. 우연히 끼어 앉아 엿듣게 된 어느 충무로영화사의 회의는 동네 복덕방에 모이신 어르신들 잡담인지, 문화 건달들의 ‘개그콘서트’인지 구분이 안 가는 수준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접속’ ‘JSA공동경비구역’등을 제작하며 영화계에서 유능한 영화제작자로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던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삼성, 대우 등 대기업이 영화판에 들어오고, 그 인력과 기업 체계가 영화계에 유입되고서야 비로소 ‘이렇게 사업을 하고 회계를 처리하고 기업을 운영하는구나’하는 기업마인드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대기업들이 영상과 음반 사업에서 철수한 후에도 그 때 길러진 인력들은 컨텐츠 제작, 정부기관 등으로 진출하여 한류의 탄생을 담당 및 지원하는 역할을 계속하게 된다. 지금 영화판을 호령하는 내로라하는 흥행감독과 각종 콘텐츠 기업 수장들의 이력서에 삼성영상사업단 이력이 4,5년씩 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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