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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31. 2021

김범수, 어제를 버려라

올해 7월 29일 <블룸버그 통신>은 흙수저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제치오 한국 최고 부자에 등극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참고로 세계 500위 안에는 한국인이 총 6명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162위 김범수, 182위 이재용, 254위 서정진, 372위 김정진, 392위 홍라희, 476위 정몽구 등이 랭크되어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6명의 인물들을 창업형 3명, 상속형 3명으로 나눌 수 있다며 이미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재벌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한국 경제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자수성가형들이 약진하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3의 물결>의 저자 앨빈 토플러가 말한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은 기능을 잃어가는데 아직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지 않은 변곡점에 처한 시대적 특성에서 성공의 기회를 잡은 인물들의 성과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최근 경제신문 기사의 제목을 살펴보면 '흙수저 김범수 한국 최고의 부자 됐다'의 매일경제신문, '흙수저에서 한국 최고의 부자에 오른 카카오 김범수의 삶'의 이투데이, 이재용마저 제쳤다. 흙수저 카카오 김범수 재산 1위 등극 한국경제신문 등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경제신문 기자인 임원기 저자의 <어제를 버려라>를 중심으로 김범수의 리더십과 성공 포인트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흙수저에서 1위로의 변신, 극과 극으로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중국의 수많은 왕조 중에서도 흙수저 출신 창업자는 한나라의 유방과 명나라 주원장 2명에 불과합니다. 일본에서도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전후의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시대는 찾아보기 어렵고 고려 시대 공민왕대의 신돈, 무신정권 시절의 이의민 정도를 예로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먼저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회원을 모은 서비스는 뭘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2010년 이전에는 1999년 시작해 3개월 만에 100만 회원을 모으고 1년 반 만에 1000만 영을 돌파한 '한게임'을 들었는데, 2010년 이후에는 '카카오'로 바뀌었는데 그 실적을 보면 서비스를 시작하고 1년 반 만에  1000만 명을 모았고 2년 후에 4200만 명을 육박하는 글로벌 서비스로 성장한 케이스로 대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주기로 나타난 두 서비스의 주역이 바로 김범수라는 사람에 의하여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김범수를  이 시대의 트렌드를 어떻게 해석했고 그 와중에 어떻게 자신을 포지셔닝하였는지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김범수는 젊은이들에게 악착같이 살지 마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안 되는 건,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야"라고 해석하면서 자신을 닦달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범수의 대학생활은 재수 생활이 힘들었던 탓인지 보상심리로 고스톱, 포커, 당구 바둑에 푹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이왕 놀 거면 도둑질 빼고는 다해보자는 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한게임'을 만들 때 자신의 경험을 되살리며 오프라인에서 즐겼던 게임을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리드 대학을 1학기 만에 휴학하고 로버트 팔라디노 수도사의 타이포그래피 수업에 빠졌더 경험이 훗날 매킨토시에서  아름다운 서체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엄격한 봉쇄 속에서 수행하는 가톨릭 관상수도회인 트라피스트회 수도자였던 팔라디노, 컴퓨터를 평생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글자에 대한 열정이 잡스를 통하여 컴퓨터의 역사에 흔적을 남긴 것처럼 김범수의 대학 신입생 시절의 경험이 훗날 창업의 연결고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86학번이었던 김범수의 대학 시절 컴퓨터는 공대생들에게도 접하기 어려운 기계에 불과하였습니다. 컴퓨터에 거리감을 느꼈던 그였지만 어느 날 대학 후배의 하숙집에 갔다가 접하게 된 PC통신의 세계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PC통신은 전화모뎀을 이용하는 특성상 그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도 'PC통신에서 모뎀의 접속 대기 시간에 대한 수학적 연구'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의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게 돼서 회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범수 입장에서는 논문 작성 과정에서 PC통신의 원리에 정통하게 되는 소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취업을 앞둔 김범수에게 직장 선택 기준은 단순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원 없이 쓸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자' 그는 1992년 삼성 SDS에 취직하였고 온라인 개발자의 기본 언어인 C++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리하여 6개월 후 회사 내에서 강사로 활동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이후 3년간 프로그램 개발부터 기획, 설계, 정보기획,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두루 학습할 수 있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때 훗날 유니텔로 알려진 유니원이라는 서비스를 개발했는데 김범수가 그 과정에서 세운 중요한 기준은 '쉬어야 한다'였다고 합니다. 3살 짜리도 직감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들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유니텔은 1996년 첫 서비스를 제공한 뒤 2년 9개월 만에 가입자 100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PC통신 서비스 가운데 최단기간 기록이었습니다. 


안정적인 봉급생활자의 삶과는 달리 창업자들은 매 순간 위기를 벗 삼아 살아가게 됩니다. 김범수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떠나 창업의 세계로 진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삼성 SDS에서 5년간 근무한 후 결혼 후 아들이 태어난 상황에서 김범수는 누구나 즐겁고 재밌게 사는 온라인 세상을 꿈꾸며 퇴사를 결정하였습니다.  수중에 단돈 500만 원이 전부였으나 과감하게 도전한 고난의 창업과정에서 결국 1998년 대변신을 시도하였습니다. 생계를 위하여 PC방 사업을 경정하고 한양대학교 앞에 '미션 넘버원'을 개업하였습니다. 다행히 PC방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김범수는 아내에게 PC방 사업을 맡기고 자신은 게임 개발에 매진하였습니다. 온라인 게임의 위력은 기대 이상이었고 서비스 개시 3개월 만에 회원 수 100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이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회원은 급증하는데 직원은 고작 20명뿐이고 자체적 수익모델이 없어서 아직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네이버컴의 이사였던 김정호의 중재로 네이버컴과 한게임의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게임은 하루 10만 명씩 회원이 늘어나는데 자금은 부족하고 네이버 자금은 풍족했고 검색엔진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용자 기반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합병 이후에도 한게임의 급격한 확장은 새로운 위기의 원인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서버 관리 등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습니다. 김범수는 반대를 무릅쓰고 유료화의 결단을 내렸고 결국 최초의 성공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2007년 9월 NHN USA 대표를 맡고 있던 김범수는 자신이 창업하고 자신이 주요 주주로 있던 NHN을 떠난다고 발표합니다. 그때 김범수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닙니다." 그는 어제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도전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1년간 자체 안식년을 갖기로 작정하고 4 식구가 함께 당구도 치고 PC방에 가서 새벽가지 게임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김범수의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예로 들어 자주 설명한다고 합니다. 오대수가 15년 동안 영문도 모른 채 여덟 평짜리 쪽방에서 감금돼 있다가 풀려나서 마침내 자신을 가둔 이우진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대수는 분노에 차서 이우진에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왜 나를 15년 동안이나 가둔 거냐?" 그런데 이우진이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당신이 틀린 질문만 하니까 틀린 답만 찾을 수밖에 없잖아. 왜 가뒀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냐가 올바른 질문이지"

김범수는 이 장면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같이 정신이 멍해졌다고 합니다. 김범수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기발한 면이 있다고 평가한다고 합니다. 


마음에 부담을 가진 만큼 발전하고 절박한 만큼 성공한다고 합니다. 카카오톡이 출시될 때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초기의 성과는 카카오수다, 카카오 아지트 등과 유사했습니다. 김범수는 여러 상황들을 비교하면서 카카오톡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결단을 내립니다. 카카오수다, 카카오 아지트의 추가 개발을 중지하고 카카오톡 하나에 올인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2010년 3월 출시된 카카오톡은 첫 달에 1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카카오톡보다는 김범수라는 이름에 더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진짜 시작은 안드로이드폰이 출시된 이후입니다. 9월에 100만, 10월에 200만, 연말에 500만, 출시 1년 만에 1000만 건을 돌파하였습니다. 그 후 4개월 후 2000만 것을 돌파하고 연말에 3000만 건을 넘어서는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김범수가 생각하는 리더십의 기준은 3가지입니다. 첫째 무조건 들으라. 김범수는 자꾸 이래라저래라 말을 하는 것보다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김범수는 문제의 답을 내기보다 문제를 명학하게 정의하는 것이 더 중요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듣는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안에 다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여야 하고 긴박한 상황일수록 리더의 결단력은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김범수는 미래의 모바일 생태계를 위하여 100명의 리더를 양성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자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는 자발적 공약을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한국의 기업사에서 존경받는 기업가로서의 발자취를 남기는 인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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