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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ug 07. 2021

<네이버, 성공 신화의 비밀>

이번 글은 NHN의 이해진 창업자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임원기의 <베이버, 성공 신화의 비밀>에서는 이해진, 김범수 이재웅, 김정주 대표 간의 공통점을 지적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공과대학 86학번이라는 것입니다. 이해진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이고 김범수 대표는 재수를 해서 서울대 산업공학과 86학번 출신입니다. 넥슨의 김정주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이고, 다음의 이재웅 대표는 연세대 전산학과 86학번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재웅 대표는 이해진 대표와 청담동 진흥아파트 같은 동(棟)에서 20여 년간 알아온 동네 친구 사이로 부모님들이 같은 나이에 같은 전공이라는 이유로 서로 아들을 소개하면서 친분이 시작되었고, 이해진 대표와 김범수 대표는 1992년 삼성 SDS 입사동기로 인연이 닿았습니다. 이해진 대표와 넥슨 김정주 대표는 1991년 대전 카이스트 기숙사의 룸메이트로 같은 황규영 교수 연구실 출신이며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인연이 있습니다. 이해진의 부친은 삼성생명 대표이사를 지낸 이시용이며 2021년 포브스 기준으로 한국 부자 순위 17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정주 대표의 부친은 김교창 회사법 전문변호사이고 이모부가 '한국의 천재'로 불리우고 아웅산에서 사망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입니다. 이재웅의 부친은 한국종합건설 대표를 지낸 이철형이며, 젊은 시절 체 게바라와 촘스키의 책을 읽는 성향이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 맥락에서인지 녹색당을 지지하고 무소속 신지예 후보를 지지한 바 있습니다. 이재웅은 소액주주라고 자기소개를 한 적이 있지만 카카오의 3.3% 지분을 가지고 있다보니 재산평가가 1조를 넘는 수준입니다. 


기회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서도 재능, 노력, 기회가 적절하게 맞물린 사람만이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미국의 컴퓨터 거물들은 대체로 1953년에서 56년 사이에 출생했는데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에릭 슈미트 3인방은 모두 같은 1955년생입니다. 미국의 컴퓨터 혁명은 1975년에 일어났는데 이 혁명의 수혜자가 되려면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혁명 당시 20대 초반에 이른 사람이 가장 그 혜택을 많이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됩니다. 강준만도 <인물과 사상>에 이 주제로 논문을 기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맬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서 주장한 관점을 적용하여 출생연도의 의미를 분석한 주장이었습니다. 10년 먼저 태어났다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일을 하기 어려웠고, 10년 늦게 태어났으면 아직 학생이어서 사회에 진출하기에 이른 나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해진은 1986년 말죽거리 잔혹사의 유하 감독이 졸업했던 상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 1990년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입학, 1992년 삼성 SDS에 입사하여 1999년까지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자기 계발을 게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한 외국기업이 직원들에게 요구했다는 25% 룰을 벤치마킹합니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25% 2시간을 자기 계발에 쏟았다고 합니다. 그때의 자기 계발의 주제는 "내가 설계하고 개발할 만한 기술이 무엇일까?"였다고 합니다. 그는 삼성 SDS의 기술 개발 프로그램인 한계도전팀에 지원하여 1년간 기술개발을 한 것이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한계도전팀에서 '근거리통신망(LAN)에서의 채팅 기술'을 연구한 이 대표는 향후 인터넷 정보검색 분야가 각광을 받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4년 신입사원 몇 명을 설득해 본격적인 검색엔진 개발에 나섰고 마침 인터넷이 부상하면서 1995년 야후와 알타비스타가 선을 보였고 1996년 국산 검색 사이트인 심마니가 등장하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이해진 대표는 검색엔진 사업화를 주장했으나 경영진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때마침 삼성 SDS가 도입한 사내 벤처 1호로 1997년 네이버컴의 소사장 자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소사장 자리는 당시 혁신적인 제도였지만 대기업 산하이다 보니 인력 충원은 물론 타회사와의 제휴도 곤란하고 자유로운 펀딩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1998년 검색 사이트 사이트를 오픈한 상태에서 경영진에 분사를 건의하였고 1999년 독립법인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독립한 네이버컴은 당시 다음, 야후, 라이코스 등 메이저 포탈 서비스 업체와의 힘겨운 경쟁이 기대리고 있었습니다. 1999년 네이버는 서비스 시작 1개월 만에 25만 건의 접숙 건수를 기록하고 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하였으나 2가지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타 사이트에 비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부족하였고 이는 한게임과의 합병으로 해소하였고 또 하나는 재무상황의 곤란인데 이 문제는 한게임의 유료화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네이버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검색어에 따라 네티즌의 검색의도를 파악하고 적합한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지능형 검색 '텍서치(Nexearch)'로 시장을 앞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해진은 완전 은둔형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은둔형으로 알려진 김정진, 이재웅보다도 더한 은둔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창업자 시절 1999년 직원들을 불러 "야 여기 오타났다"고 말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아 결재나 하고 지시나 하는 CEO와는 달리 쫀쫀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대표는 "기술 떨어지는 사람, 전략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용서해도 몸싸움에서 밀리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돈 못 벌어 오고, 큰 기획을 못하는 건 용서해도 사용자가 보는 페이지에 실수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대표의 지론이었습니다. 그는 '돌다리도 열두 번 두들겨 보고 갈' 정도로 사전에 정보를 다 수집하고 조심성 있게 한 발을 내딛는 스타일로서 스스로 "뭔가를 저질러 득 본 것보다는 안 해서 득 본 게 더 많다"라고 말할 정도로 초기 인터넷 사업의 불확실성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스타일입니다. 


세계 인터넷 시장은 대부분이 구글이 장악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거대 공룡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비록 작은 구역이지만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나마 굳건하게 수성을 하고 있는 네이버가 대단한 역량을 가진 기업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영역에서 수성에 성공하면서 더 넓은 지역으로 발전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하는 성원하는 마음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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