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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ug 18. 2021

무엇이빌 게이츠를승자로 만들었을까?

이번 글은 전 세계 최고 부자 랭킹에 항상 등장하면서 IT업계의 대표적 승자로 손꼽히는 빌 게이츠의 성공 비결을 그의 성장과정을 함께한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자료의 출처는 <무엇이 빌 게이츠를 숭자로 만들었을까?>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미국의 IT 혁명은 1975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성공한 IT 기업 경영자들이 대부분 그 당시 20대 전후반의 인물들입니다. 그들보다 10살이 많으면 새로운 분야에 용기를 내어 뛰어들기 어렵고 10살이 적으면 아직 학생이라 사회에 진출하기 어려운 처지여서 학업에 집중하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버드를 중퇴하고 과감하게 도전하여 이제는 세계 수준의 유명인사가 된 빌 게이츠의 선택의 순간들을 동년배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빌과 단짝인 톰은 반 친구들과 새로 생긴 식품회사에 견학을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잔디밭에 예쁜 꽃들도 심겨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엔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메뉴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어린이들은 한 것 들떠 있었습니다. 12시가 되자 아이들은 식당으로 안내되었습니다. 톰과 빌은 나란히 앉았고 둘을 포함한 어린이들은 모두 얼른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직원이 다가와 톰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여러 가지 맛의 음식을 준비했는데 학생은 어떤 맛으로 먹고 싶어요?"

톰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아무거나 제일 맛있는 걸로 주세요."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빌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빌은 방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맛이 있는데요?" 직원이 '어린 고객'에게 다양한 메뉴를 자세히 설명해주자, 조용히 듣던 빌은 침착하게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치킨 카레라이스로 주세요. 카레를 듬뿍 얹어서요. 그리고 콜라도 큰 컵으로 한 잔 주세요."

잠시 후, 아이들의 주문대로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톰처럼 주문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모두 하이라이스를 먹었고 몇몇 아이들만이 특별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중에서 콜라를 큰 컵으로 마신 아이는 빌 뿐이었습니다. 톰은 점심을 몇 숟갈 뜨지 마자 맛도 없고 콜라도 부족하다며 투덜대다가 빌을 부러워했습니다. 

"나도 치킨 카레라이스를 먹고 싶다. 하이라이스는 맛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어."

빌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까 그 아저씨에게 진작 그렇게 말하지."

톰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빌이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란다고 합니다. 빌은 이후에도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직장을 선택할 때에도, 파트너를 선택할 때도 빌은 결코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1965년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는 연례 웅변대회를 열었습니다. 4학년이었던 빌은 참가자격은 충분했지만 학급대표 정원인 3명의 후보에 들지는 못했습니다. 웅변에 어울리지 않는 음성도 문제였고, 당시 빌은 천문학과 물리학에 심취해있어서 웅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학급대표로 주목한 학생은 톰이었습니다. 귀여운 외모에 또랑또랑한 음성을 가진 톰은 선생님에게 특별 지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톰은 웅변대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큰소리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에 쑥스럽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실망한 선생님 앞에 빌은 친구를 위해 자기가 나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선생님은 빌이 똑똑한 아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웅변에 있어서는 확신이 안 들었습니다. 말려보았지만 빌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빌의 웅변 지도를 해주었고 빌은 예상을 깨고 결선에 올라가서 자신보다 상급학년인 6학년 학생을 물리치고 일등을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노인이 된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아직도 빌의 웅변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으세요. 그러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빌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보이스카우트 활동은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어린 빌은 활발한 활동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 번은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이 단체로 인근 박물관을 견학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밥과 빌은 무척 들떠있었는데 박물관은 원래는 오래된 성으로 영국 이민자의 사유재산이었습니다. 성의 주인은 영국 귀족의 후예로 성격이 괴팍하고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던 사람인데 말년에 외진 곳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그 성에는 유령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밥과 빌은 호기심에 들떠 직접 유령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선생님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대열을 몰래 빠져나와 외부에 개방하지 않는 외딴 건물의 가파른 계단으로 향했습니다. 빌과 밥이 이곳에 숨어든 이유는 단 한 가지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방에 불이 켜지고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성에 올라와서 창문으로 들여단 본 방의 내부는 그저 잡동사니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실망한 밥은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빌을 기뻐했습니다. 무엇이 그리 기쁘냐는 밥의 물음에 빌은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손해는 안 봤잖아. 세상에 유령 같은 건 없어. 그냥 어른들이 우리를 겁주려고 만들어낸 이야기야."

밥이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했다면 빌은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했고 모험은 이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1967년 빌은 현명한 부모의 선택에 따라 열두 살의 나이로 레이크사이드에 입학하였습니다. 레이크사이드는 중고등학교 과정이 통합되어 있는 사립 남학교로 1년 수업료가 수천 달러가 드는 가장 비싼 학교로 알려졌습니다. '천재의 요람'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레이크사이드에 가면 바보도 똑똑해진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류층 자제들은 대부분이 이 학교를 다녔는데 전교생이 300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월리엄은 선생님과 친구들이 인정한 우등생이었습니다. 월리엄은 담임선생님이 항상 A만 받는 학생으로 기억할 정도의 학생이었습니다. 마치 1등을 하려고 학교를 다니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때 빌은 언제나 B를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월리엄은 빌을 경계했는데 그 이유는 빌이 날마다 컴퓨터만 하는데도 B를 받으니 마음먹고 공부하면 일등 자리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2년 수재였던 월리엄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지하게 고민할 때 빌 게이츠는 첫 번째 도전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상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빌은 당시 워싱턴 주립대에 진학한 폴 알렌의 영향을 받아 컴퓨터에 심취하였습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컴퓨터에 대한 열정으로 '금지된 영역'의 데이터를 무상으로 마음껏 사용했습니다. 컴퓨터의 보안시스템을 파괴하고 회사 측의 서류를 임의로 수정해서 손실을 입히다가 이를 발견한 회사 측에 이해 제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빌은 자신의 사업의 시작을 자신이 보안시스템을 파괴한 바로 그 데이터 정보회사에서 하기로 마음먹고 찾아갔습니다. 직원들은 어린 빌과 폴을 비웃었지만 사장인 윌츠는 빌의 자신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들의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단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오류 및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조건을 달아서 당시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컴퓨터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1973년 가을 빌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하버드대 학생이라는 후광에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명문대에 입학했으니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빌은 하버드에 가서도 여전히 컴퓨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1974년 소형 컴퓨터용 언어인 베이식 BASIC을 개발했습니다. 빌은 조만간 컴퓨터가 개인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앞으로 컴퓨터의 사용 범위가 확대되고 소프트웨어도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그즈음 인텔사가 8080이라는 컴퓨터 칩을 개발하였습니다. 8080 칩은 집적도가 트랜지스터 2,700개에 달하는 기존보다 기능이 열 배나 향상된 마이크로프로세서였습니다. 폴은 빌을 끊임없이 설득했습니다.

"컴퓨터 회사를 차리는 거야. 역사적인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온 거라고. 지금 하지 않으면 늦어. 그러면 두고두고 후회하고 심지어 후손들에게도 원망받을 거란 말이야."

폴의 열정적인 모습에 빋도 때가 왔음을 직감하였습니다. 1975년 하버드 법댈르 자퇴한 학생이 빌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빌 슈미츠라는 학생이었습니다. 슈미츠는 일찍 회사를 차려 돈을 벌고 싶은 생각에 자퇴하였습니다. 그는 출세욕도 대단하여 평범한 변호사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1070년대는 미국의 성장세가 지속되는 시절이었고 슈미츠는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자퇴하고 뉴욕에 방직물 수출입회사를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사업이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 정부가 국내 방직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자 타격을 입었고 1984년 LA올림픽 개막전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은행에 자산을 담보하였다가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슈미츠는 행동력과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국제 무역은 경기 변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임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크게 실패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974년 12월 빌 게이츠를 만나러 하버드대학교를 찾아온 폴 앨런은 하버드 광장을 지나다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잡지를 우연히 샀습니다. 표지에는 앨테어Altair 8800이라는 이름의 컴퓨너가 오븐만한 크기에 가격도 400달러도 되지 않았습니다. 표지에는 

"세계 초소형 컴퓨터 탄생, 이제 상업용 컴퓨터에 도전하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이 잡지를 읽은 빌은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려 했던 자신들의 꿈을 MITS라는 한 하드웨어 회사가 실현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프로그램을 운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소프트웨어가 돌아가는 컴퓨터를 꼭 먼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을 곧바로 MITS의 에드워드 로버츠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시애틀 교통량 데이터 회사'의 대표라고 소개한 뒤 자신들이 개발한 베이식 언어를 조금만 수정하면 앨테어 8800과 바로 연결하여 상용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1주일 뒤에 자신들이 개발한 베이식 언어를 개당 0.5달러에 팔고 싶다고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빌과 폴은 에드워드를 만나 알테어 8800에 사용할 수 있는 베이식 언어를 제공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자신들의 소트트웨어를 판매할 기회를 얻기는 하였지만 아직 프로그램은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빌과 폴은 8주간 학교도 가지 않고 포커나 클럽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서 수맣은 밤을 새우며 앨테어 8800용 프로그램에 매진하였고 결국 3개월 만에 완성해 내였습니다 결국 앨테어 8800이 소비자에게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빌은 사업가로서 화려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입니다. 


빌 게이츠가 설립한 MS사는 매일 수만 명의 직원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는 빌도 1년에 꼭 한 번 '생각 주간'이라는 2주간의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5월에 '생각 주간'을 갖기로 하고 이제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외부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곳에서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직원들에게 근무 시간의 20%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모두 수십 년의 시간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지요.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으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남보다 더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기 않고 자신을 던져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가는 모습,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올인하는 어린 시절부터의 빌 게이츠의 삶의 자세가 그에게 성공의 열매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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