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가방 Sep 12. 2021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 결정을 내렸습니다. 오바마도 트럼프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사안입니다. 바이든은 어떤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결정을 내렸을까요?  미국의 철군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선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도 이기적으로 자신들만의 집단이익을 위하여 움직인다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보여준 관점과 미국 특히 민주당이 국제정치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보여주고 있는 오바마의 고문이기도 했던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을 읽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치인 바이든의 자서전을 통하여 개인적 성향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이든의 정치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는 자서전의 내용입니다. 198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당시 현직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카터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너지 위기, 경기 침체, 인플레이션, 이란 인질극 등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미래에 대한 우리 신뢰가 잠식되면서 미국인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라고 스스로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은 카터를 비관론자, 꾸지람만 일삼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카터는 곤경에 처했고 케네디 형제 중 넷째이자 막내 테드 케네디는 입후보를 선언하였습니다. 민주당 선거 전략가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둘 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존 바이든을 대안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몇 명은 바이든을 찾아와서 대선 후보로 출마하면 어떨지 의향을 물었습니다. 바이든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바이든이 보기에 공천을 따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1972년 첫 번째 상원의원 출마에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공화당의 거물 보그스를 1%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는 것이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내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고 있는 걸까? 운명이 날 유혹하는 것일까? 이제 대선 출마 이야기까지 나오다니."

그때 바이든의 선거 참모였던 존 마틸라가 그에게 조언하였습니다.

"의원님, 전술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대선에 출마해서는 안 됩니다. 의원님께서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왜 대선에 출마해야 하느냐,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까지 출마해서는 안됩니다."

바이든은 1980년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바이든의 별명은 조 임페디멘타였다. 라틴어 단어로 발달을 방해하는 응어리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바이든은 말을 심하게 더듬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른 아이들은 학생 250명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바이든만 제외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이든에게 '바보'라는 모자를 쓰고 구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바이든은 말더듬이가 묘비명으로 남게 될까 봐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이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죽고 살기로 노력했습니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작은 조약돌을 10개쯤 가져와 입안에 넣은 다음 담너머까지 들리도록 소리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수녀님이 바이든의 말 더듬는 버릇을 가지고 놀린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소심하고 성당을 존중하던 바이든의 어머니는 학교로 수녀님을 찾아가 말하였다고 합니다.

"또 한 번 내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땐 다시 와서 그 모자를 머리에서 벗겨내 갈가리 찢어버리겠어요. 알아듣겠어요?"

바이든의 어머니는 바이든이 어머니에게 영국 여왕을 알현한다고 하자

"영국 여왕에게 고개 숙이지 마'

라고 하였고 교황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는

 "그의 반지에 키스하지 마.'

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바이든에게

"기억해 조이, 넌 바이든이야. 너보다 나은 사람은 없어. 너도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지 않지만 너보다 뛰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로스쿨 마지막 학기에 바이든은 구직 첫 면접에서 탈락하였습니다. 바이든은 구직활동을 하였고 몇 주후 월리엄 프리킷 법률 사무소에 채용되었습니다. 바이든은 평소 조지타운대, 하버드대, 예일대 출신들을 고용하던 회사의 대표가  왜 시러큐스대학 출신의 85점 만점에 76점에 불과한 성적의 자신을 채용한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의문은 풀렸습니다. 대학 학장의 추천서와 교수의 추천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특히 책임감이 매우 뛰어나다. 그는 모험도 기꺼이 불사할 사람이다. 그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는 학교 교수님들의 추천사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바이든은 스스로 법률사무소를 퇴사하였습니다. 그의 회사는 대형 보험사, 철도 건설사 석유 회사들을 대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회사 대표는 바이든에게 자신의 민사소송 변론을 지켜보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원고는 작업 중 심하게 화상을 입은 용접공이었고 법률회사는 고소당한 회사를 대리하고 있었습니다. 대표는 용접공이 안전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가 회사를 위하여 변론할 때 바이든은 원고의 가족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원고와 그의 부인은 바이든과 바이든 부인과 동갑이었습니다. 바이든은 회사 대표가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원고는 장애인이 되는 영구 손상을 입었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바이든은 가슴 아프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이든은 원고를 대표했어야 한다고 느꼈고, 자신의 역할이 제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느끼면서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72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는 권고를 민주당 선배가 제안했을 때 바이든은 상원의원 연령제한을 넘는 나이인지 계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당시 창업한 로펌을 경영하느라 분주했었고 새로 구입한 노스 스타의 집을 수리하는 시간도 빠듯하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더구나 공화당 소속의 보그스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바이든은 상원의원이 되면 전쟁과 평화, 환경, 범죄, 시민권, 여성권 등 중요한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는 상원으로써 델라웨어와 미국 전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고 과감하게 출마를 결심하였다. 바이든의 가족을 제외하면 모두 그의 당선 가능성을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선거운동  2개월 차의 여론조사에서 47대 19로 뒤졌지만 선거 결과 그는 총 투표수 23만 표인 선거에서 3000표 차이로 승리하였다. 인상적인 것은 '커피 타임' 전략이라는 선거운동 방법이었다. 케네디 가문의 선거운동 기법을 모방한 것이었다. 여동생이 이웃집 여주인을 찾아가 이웃 30명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커피타임에 참석할 것인지를 확인하였다. 자연히 온 동네에 소문이 퍼지고 여성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선거캠프는 커피와 더넛을 모임을 여는 집에 준비해놓았다. 바이든과 어머니가 8시에 모임에 참석하면 여동생은 9시 모임 준비를 시작했고 부인 닐리아는 10시 모임을 준비하였다. 9시 15분이 되면 바이든은 어머니를 두고 여동생 모임으로 가고 어머니는 8시 모임에 잠시 더 남아있다가 11시 모임으로 이동하였다. 종종 아이들도 이 선거운동에 동참하였고 이런 방법으로 하루 300명 이상의 사람들과 처음 만날 수 있었고 한 집에서 45분씩 참석자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바이든은 고등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1972년 선거가 18세가 투표할 수 있는 첫해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지만, 바이든의 시각은 달랐다. 15~17세의 경우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아이가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입장이었다. 고등학생이 부모에게 바이든을 호평한다면 부모들은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로 공화당 지역의 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선거가 극적인 승리로 발표되자 갑자기 많은 이들이 수표를 보냈다며 자신이 바이든 편이라는 것을 알리는 연락이 쏟아졌다. 바이든은 선거자금담당자에게 승리에 편승하려는 자들의 돈을 받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남동생 지미는 모두 접수하였다. 바이든도 선거운동으로 저당 잡힌 집을 생각하며 자신의 결정을 지키지 않은 남동생의 판단을 다행스러웠다는 표현을 하였다.


바이든인 평소에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였다고 전해지고 김대중 대통령과 넥타이를 교환하는 이벤트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이든의 별명에 김대중과 같은 인동초라는 별명이 있었던 것은 그가 많은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극복한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1972년 상원의원 당선 직후 그는 자신의 부인과 딸을 사고로 잃은 후에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성장하였던 자신의 장남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그가 정치적 성공가도를 달리던 영광보다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그의 정신력과 약자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2002년 부시 행정부 시절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라술 아민 교육부 장관의 안내로 복구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학교는 소수의 남학생들이 여러 연령에 걸쳐서 함께 섞여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바이든은 아이들에게 질문하었습니다.

"여자애들이 커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은 그냥 낄낄거렸습니다.

누군가가 "갈 시간입니다. 의원님."이라고 하였고 바이든은 아이들에게 "이제 가야 해."라고 일어서면서 말했습니다.

"가면 안 돼요!"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열세 살 짜리 여자아이가 교실 한가운데서 똑바로 서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가면 안 돼요."

 여자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읽는 법을 배워야 해요. 난 우리 어머니처럼 의사가 될 거예요."

바이든은 말했습니다.

"미국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바이든은 강한 책임의식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보다는 이라크에 전력을 집중하였고 바이든은 당시 부시 미국 정부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었다면 어떻게  상황이 전개되었을까요?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식 가치를 전파하기를 원하였던 바이든이 왜 대통령이 되어서 철군이라는 결정을 내렸는지는 2007년에 나온 자서전에는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1년 9 11 테러 이후 전개된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은 1 경원의 돈과 90만 명의 인명을 희생했다고 브라운대의 연례보고서는 '전쟁 비용 프로젝트'에서 발표하였다. 2001년부터 2022년까지 직접 비용이 6824조 원이고 향후 2020년까지 미군 참전용사 돌봄 비용을 추가하면 2569조가 추가부담이 될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사망자는 9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민간인들이 37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치는 전쟁으로 인한 질병이나 시설 파괴 식수오염으로 인한 2차 피해를 제외한 수치라는 것이 발표의 내용이었다. 바이든은 2021년 8월 31일 아프간 종전 기념 백악관 연설에서 미국에 실익이 되지 않는 전쟁에서 더 이상 자금과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미국을 위한 결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아프간에서만 매일 3억 달러 총 2조 달러 이상이 들었고 파병된 미군 80만 명중 2만 744명의 미군과 여성이 부상하고 2461명이 숨졌다고 밝히며 미국 대통령 4명을 거친 전쟁을 오래전에 끝냈어야 할 전쟁이라고 규정하였지만 국제사회는 '실패한 전쟁'이라는 혹평과 함께 국제사회의 미국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미국은 1899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첫 번째 식민지로 얻은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할 때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장개석을 지원하다 실패하였고 월남에서 사이공 정부를 지원하다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동안 탈레반과 싸우며 정부군을 지원했지만 철군하고 말았습니다. 모택동은 장개석보다 병력과 장비의 열세를 극복하고 중국 대륙을 차지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호지명 군대를 이끌던 지압 장군은 적이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싸운다는 3불 정책을 주장하였고 승리하였습니다. 강대국의 무덤이라고 불리던 아프간에서 미국은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을 내고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는 탁구대회를 촉매로 중공과 다시 수교하였고 베트남과도 다시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미국은 탈레반 정권과도  다시 외교관계를 복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세계에서 유일한 휴전상태인 국가 대한민국으로서는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스티브 잡스는 누구였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