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가방 Oct 05. 2022

한나라 최후의 명장, 황보숭

      

184년 갑자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전 북지 태수 황보숭, 전 교주 태수 주준, 전 여강 태수 노식에게 황건적 진압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충성스럽게 황건적 토벌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동탁의 집권과 이각 곽사의 난에 휘말려 고생을 하다가 말년에 모두 병이 걸려 사망하는 것으로 업적에 비하면 조용하게 마지막을 맞이하였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을 삼국지의 큰 흐름에서 살펴보면 황건적 토벌 과정에서 황보숭은 조조를, 노식은 유비를, 주준은 손견을 역사에 무대에 등장시키는 배역을 충실히 수행한 조연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건적 토벌 과정에서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마치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을 한 명만 손꼽는다면 단연 이순신 장군 이듯이 황건적의 난 진압과정에서 최고의 업적을 세운 인물을 든다면 단연 황보숭 장군을 들어야 하지만 정작 삼국지연의에서는 부각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능력에 비하여 욕심이 전혀 없고 순수하게 전투에서만 능력을 발휘한 한나라 최후의 충신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만일 황보숭이 정치적으로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동탁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조조나 손권 같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펼칠 기회를 잡아보지도 못하고 조조는 난세의 간웅이 되지 못하고 단지 치세의 능신으로서만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인물입니다.    

  

황보숭은 서방의 강족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양주삼명으로 불렸던 단경, 장환, 황보규 3인의 장군 중 황보규의 조카인데 황보규처럼 강직하고 전투에는 용감하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141년 마현 장군이 강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했는데 황보규는 현지의 정황상 패전을 예측하고 이를 경고했으나 결국 마현은 전사하였습니다. 군 태수가 황보규를 발탁하자 강족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144년 순제 때 인재를 등용하려면 양기가 겸양해야 한다며 당시의 황제의 외척이며 권력자인 양기를 비판하는 주장을 하여 원한을 사게 되었다. 양기에 의하여 죽음 문턱까지 갔으나 살아남았다. 강족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양기가 실각한 후 권력을 잡은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무고를 당하여 투옥되었다가 대신들과 태학생들이 구명운동을 하여 석방되었다가.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 대고 물러나려고 하였고, 사직이 허락되지 않았다가 결국 병사하였던 강직하였던 명장 황보규가 황보숭 장군의 큰아버지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그 재능이 널리 인정을 받아 추천을 받아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했지만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다시 복직하여 북지 태수 등을 지내었습니다. 184년 갑자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 당시 환관들의 청류파 유생들에 대한 탄압인 당고의 금으로 인하여 쫓겨났던 청류파들을 다시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황건적 토벌을 위하여 궁중에서 관리하는 말들을 진압에 차출하여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하였는데, 다행히, 중상시 여강도 이에 동조하여 후한의 영제는 황보숭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황보숭은 노식, 주준과 함께 토벌에 나서 큰 공을 세웠는데, 위세가 대단하였던 황건적 파재가 이끌던 황건적 세력을 조조와 협공하여 대파하는 공을 세웠고, 함께 출전하였던 노식이 큰 공을 세웠지만 환관 출신으로 감찰을 나온 좌풍에게 뇌물을 거절하였다가 쫓겨나고 임명된 후임자인 동탁은 패전을 거듭하자 조정의 명을 받아 황건적의 본진과 대결하여 인공 장군 장량을 죽이고, 병으로 죽은 장각의 시신을 발견해내어 부관참시하였고, 지공 장군 장보도 살해하는 등 큰 공을 연달아 세웠습니다. 황건적 토벌에 있어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것입니다.      


황보숭이 황건적 토벌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우자 한양 사람 염충이 황보숭을 찾아가 은밀하게 권유하였다고 합니다. “장군의 기세는 한고조 시절의 한신보다 강하며, 지금 황제는 한고조 유방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한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여십시오.” 400여 년 전 초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괴철이 한신을 찾아가 유방과 항우에 맞서 한신의 나라를 세우라고 권유하던 것처럼 염충도 황보숭에게 대권을 권했지만 한신이 괴철의 말을 거절하였듯이 황보숭도 염충의 말을 거절하였다. 훗날 염충은 서량의 한수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는데 그 와중에 병사하였습니다.      


서량에서 한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보숭은 이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동탁과 함께 참전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게 되었습니다. 동탁은 전투보다는 자신의 세력 확장에만 관심을 보였고 역심을 드러내었고 이를 바라본 황보숭의 조카 황보력은 동탁 제거를 주장했지만 황보숭은 조정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며 시간을 허비하며 조정에 이를 보고하고 명령만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정은 동탁에게 휘하 병력을 황보숭에게 넘기라고 지시했지만 동탁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병력을 늘려가다가 하진이 십상시를 제거하려고 국경의 병력을 낙양으로 소환령을 내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력을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진군하여 낙양을 점령하면서 서량병의 세력을 통하여 후한의 정국을 장악하였습니다.   

   

190년 수도 낙양을 한 손에 휘어잡은 동탁이 황보숭을 죽이려고 그를 낙양으로 부르자 황보숭 주변의 참모들은 모두 반대하면서 낙양에 가면 안 된다며 동탁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순순히 낙양으로 향했습니다. 황보숭은 동탁에 의하여 낙양에서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평소 동탁과 친했던 아들 황보견수가 구명운동을 하여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동탁이 “아직도 내게 복종하지 않을 거이냐?”라고 묻자

황보숭은 “공께서 이렇게 되실 줄은 차마 몰랐었다”라고 복종의 의사를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황보숭은 동탁 치하의 낙양에서 목숨을 이어가다 왕윤과 여포에 의하여 동탁이 죽임을 당하면서 정서장군에 임명되어, 동탁의 동생 동민, 동탁의 조카 동황 등 동 씨 일족과 90이 넘었던 동탁의 생모 지양군 모두 멸족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훗날 당나라 시절 낚시꾼의 대명사인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진 주나라 태공망의 무덤에 무인석을 만들면서 총 70명의 역대 장군들의 무인석을 만들었는데 그중 11명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군들이었습니다. 위나라 출신의 장료, 등애, 양호 3명 오나라 출신은 여몽, 육손, 육항, 주유 4명, 촉은 관우, 장비, 제갈량 3명인데 황보숭은 위, 오, 촉과 관련 없는 한나라의 마지막 충신으로 등장하였던 인물입니다.       


훗날 청나라 말기의 1850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만주족 정권의 무능함이 드러나고 한족 출신의 증국번이 이를 진압하자 주변에서 증국번에게 청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자고 유혹하는 소리가 많았는데 증국번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청조의 서태후에게는 자신이 대권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지휘하의 병력을 한족인 이홍장에게 넘기는 테크닉을 구사하여 무사하게 살아남았던 사실이 오버랩이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인품과 군사적 능력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이고, 청렴하며,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되지만 정치적 감각은 별로였던 인물로 거의 하급 공무원처럼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하지 독자적인 판단이나 결정은 기피하였던 인물이 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황보숭이 염충의 황제가 되라는 권유를 거절한 것은 올바른 것인가, 아니면 좋은 기회를 놓치고 훗날 동탁에게 수모를 당하게 되는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볼 것인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황건적의 난 이후 진나라가 통일되기까지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참화, 그리고 진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북방의 흉노족, 선비족, 저족, 갈족, 강족의 침범으로 진나라는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을 가고 남북조로 갈려 수많은 전쟁 속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수 백 년간의 혼란의 참화는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삼국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실패한 황건적은 불의이고, 성공한 홍건적은 정의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