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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Oct 02. 2022

실패한 황건적은 불의이고, 성공한 홍건적은 정의인가?

 후한 말기 일반 백성들의 삶을 당시를 기록한 역사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환제기>에 따르면 그해 4월 ‘경사에 가뭄이 들어 임성과 양국에 기근이 들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적혀있고 4년 후 ‘2월에는 사례와 기주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살 집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으니 아파도 의원을 부를 수 없고, 글을 배운다는 것은 언감생심 이었던 시절이었다.      

 위안 텡페이의 <삼국지 강의>를 보면 당시 사회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5를 돌파했고, 전체 인구 3%의 부자들이 사회 전체의 부 97%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런 사회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난한 백성들과는 달리 당시의 호강 지주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며, 집안에 수백 명의 식객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소유한 저택이 곳곳에 자리하고 논밭 또한 서로 잇닿아 있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특히 고위급 관리나 환관들은 자신들의 권세로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완을 발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황제였던 영제는 20여 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고 궁녀들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황음무도하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황제로 알려져 있었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괜찮은 황제라고 생각해서인지 대신들에게 자신의 삼촌이자 전임 황제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하였다. 

 “그대들이 보기에 짐이 환제와 비교하면 어떤 황제인 것 같소?” 그러면 대신들은

 “폐하는 선제와 마찬가지로 요순과 같은 황제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제는 주색잡기에 빠져 결국 서른이 넘자마자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영제가 죽은 후 받은 영제의 영(靈) 자는 그가 받은 시호이자 신하들에게 받은 평가인데 그 의미는 “혼란을 일으켰으나 손실을 입히지 않은 이를 영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며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혔다는 뜻이므로 결코 죽을 당시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보인다다. 영제가 황제 자리에서 죽었을 때, 국정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은 고스란히 후대의 소제와 마지막 헌제에게 넘겨졌다. 정치는 암흑에 빠지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억압이 심해지자 반항도 격렬해지기 마련이었다. 후한 말기에 유행하던 민요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부추처럼 잘라도 또 나고, 모가지는 닭과 같아 잘라도 또 우네. 관리라고 두려워할 필요 없으며 백성이라고 가벼운 것이 아닐세. “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지자 점차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민간의 저항이 날로 심해지면서 진압하러 온 병졸들조차 반란자들과 함께 조정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란은 조정에서 파견한 군대나 호족들의 개인 무장세력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한의 조정은 서쪽 강족의 반란의 진압에만 10여 년간 80여 억 냥의 막대한 군비를 투자해야 했다. ”장수들은 군량을 중간에서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고, 황제 주변 측근들에게 진귀한 보물을 뇌물로 바쳤다. 위아래가 모두 제멋대로 불법을 저지르고 군무를 처리하지 않아 병사들이 제명에 죽지 못했으며 들판마다 백골이 나뒹굴었다 “고 <후한서 서강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허베이 성 거록 출신의 장각이 <태평경>을 얻은 후 태평도를 창립하고 스스로 대현양사로 칭하면서 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황제와 노자의 도를 받들고 제자를 길렀으며, 부적을 담은 물과 주술로 환자들의 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수많은 환자들의 병이 치료되고 백성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이는 기존의 한나라 시대에 존재하던 농촌에 존재하던 농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잘못된 정치로 무너지고 향리의 전통적인 질서가 붕괴되는 시점에서 농민들에게 의지할 곳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장각이 포교를 시작한 지 10여 년 동안 신도는 수십 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대부분 광신도를 방불케 하는 열렬한 신도들이 모인 조직으로 변하게 되었다. 신도들은 자신들의 가산을 팔아 장각에게 달려갔고, 어떤 이들은 장각을 보러 가는 길에 명이 다해 죽기도 하였는데 이들의 숫자만도 수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장각은 전국 각지의 신도를 36방으로 나누었는데 마치 군사 편제와 유사하였다고 한다. 대방은 1만여 명, 소방은 6000~7000명이고 각기 우두머리가 있었다. 장각은 여덟 명의 제자를 각 주로 보내어 선교를 명목으로 군중을 조직화하여 무장폭동을 준비하였다. 대방 마원의 가 형주와 양주의 수만 명을 이끌고 먼저 거사를 하기로 계획을 짰고 궁중의 환관들과도 결탁하여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태평도 내부의 분란이 일어나면서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하였다. 184년 갑자년에 장각의 제자의  밀고로 태평도의 거사 계획이 드러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조정은 급하게 마원의를 체포하여 낙양에서 거열형으로 죽이고 황제였던 영제는 황궁 내부와 조정, 군대와 일반 백성들 가운데 태평도 신도를 조사하여 1,000여 명의 신도를 사형에 처했다. 장각은 모의가 누설되었음을 알고 각지로 연락하여 기일을 앞당겨 거병하도록 지시하였다.      

 184년 갑자년 2월 장각은 천공 장군으로 자칭하고, 동생인 장보와 장양을 각기 지공 장군, 인공 장군으로 부르고 신도를 이끌고 관아를 불태우고 약탈을 시작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1개월 만에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수도인 낙양성은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환관들은 계속되던 유학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그들에게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다. 황보숭과 노식 등이 관군을 이끌어 진압에 나섰고 각지의 호족들이 이들을 공격하면서 황건적들은 한때는 봉기 군이 100만에 이르렀지만 점차 몰락하였고 잔당들도 그 힘을 잃어갔다. 마지막 남은 세력들은 조조가 순욱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주에서 항복을 받아내어 30만에 달하였던 황건적의 잔당들이 조조의 군사적 기반인 청주병으로 재편성되면서 조조의 세력 기반이 되어버렸다.       

 황건적의 난은 실패로 끝나면서 실패한 난으로 평가되었지만 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은 반란에 성공하여 그 지도자인 주원장은 명나라의 홍무제로 역사의 무대를 새롭게 열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던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가정환경도 홍무제 주원장과 비교하면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유방의 가족관계에 관하여 살펴보면 아버지는 태공, 어머니는 유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를 오늘날 표현으로 알아보면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 어머니의 진짜 이름은 전해지고 있지 않았다. 유방의 형제들의 이름도 유백, 유중으로 태어난 순서를 의미하고 있으며 한고조 유방의 본명으로 전하는 것도 유씨네 막내 정도인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다. 건달로 살아왔지만 초나라 명문가 출신의 항우와 싸워 승리한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400년의 역사적 권위에 도전하였던 태평도의 교주이자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은 역사의 무대에서 반란의 괴수로 평가되었다. 진나라 말기의 진승, 오광의 난. 왕망의 신나라 말기의 적미의 난, 명나라 말기의 이자성의 난 등이 실패로 끝났다. 한나라 말기 황제의 폭정으로 먹을 것이 없어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던 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황제는 황음무도한 쾌락을 즐기던 상황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던 초기의 의미는 사라지고 단지 일개 실패한 반란의 괴수로 그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 황건적의 난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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