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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Sep 06. 2022

후한의 황제들의 관심사는 어떠했을까?

 삼국지를 처음 읽으면 유비는 선하고 조조는 악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두 번째에는 조조는 유능하고 유비는 무능해 보인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읽으면 유비는 대인배이고 조조는 소인배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진짜 그렇게 느낄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기울어져가는 한나라를 다시 되살리려고 하는 유비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한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조조는 악한 인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느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럼 먼저 후한의 황제들이 어떤 정치를 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허수아비 황제 자리에 분노를 느낀 후한의 환제는 159년 28세에 대장군 양기를 제거하는 친위쿠데타에 성공하여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환제는 국고가 텅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메뚜기 떼로 인해 피해를 본 백성들을 구제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이 지출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타난 결과입니다. 고민하던 환제에게 과거 한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이라는 왕조를 세운 왕망처럼 새로운 화폐를 주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학자 출신의 창업 군주였던 왕망의 신나라는 여러 혁신적인 정책을 시도하였지만 1대 15년 만인 서기 23년에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멸망했던 왕망의 화폐정책을 따라서는 안된다고 유도라는 신하는 건의를 하였습니다. 

  “지금의 근심은 화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굶주리는 데 있습니다. 백성은 100년 동안 화폐가 없어도 괜찮지만 하루라도 굶주려서는 안 되니 먹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 무릇 백성이 넉넉해지고 재물이 쌓이게 하는 요점은 부역을 중지하고 수탈을 금하는 데 있으니, 그렇게 하면 백성은 저절로 풍족해집니다. (중략) 각박한 금법을 넓혀주시고 야금과 주조의 논의를 뒤로 미뤄주십시오.”      

 환제는 화폐 발행을 보류하고 대신 관직 매매를 통하여 국고 부족을 해결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환제의 관직 매매로 말미암아 대지주들은 쉽게 합법적인 ‘대토지 소유’가 가능해졌으며 귀족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질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매관매직의 길을 열었던 환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두 황후는 환제의 12세 조카인 유굉을 다음 황제로 선택했는데 유굉은 후세에 최악의 군주라고 평가받는 영제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삼촌이었던 환제보다 더욱 방탕한 생활을 하였던 영제는 무절제한 사치로 돈이 더욱 필요하였고 이에 과거의 황제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과거의 황제들은 대부분 명예직인 작위를 팔았을 뿐,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직을 파는 일은 없었는데 비하여 영제는 위로는 총리급 관직인 삼공으로부터 아래로는 군 행정을 책임지는 지방 고위 관직인 군수, 현령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암암리에 모든 관직을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제는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3가지 가격 차별 방법을 개발하였습니다. 1급 가격차별은 상대방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금액을 파악하여 가격을 정하는 방법이고, 2급 가격차별은 수량에 따른 차별로 하나를 구입하면 다른 하나를 절반 가격에 파는 등의 방법으로 한 자리에 300만 전인 군수를 한 집안에서 3자리를 구입할 경우 현령 자리를 하나 덤으로 주는 방법입니다. 3급 가격 차별은 소비자에 대한 차별화된 가격 제시 방법으로 명사들은 관직을 구입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명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명사가 관직을 구입하는 경우 명분을 보장하기 위하여 반값으로 할인을 해주어 총수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입니다. 이외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관직을 판매하는 경쟁입찰 방식도 사용하고 관직의 대금을 일시불이 아닌 분할 지불과 같은 방식을 허락하여 원래의 정가보다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영재의 관직 매매는 심각한 후폭풍을 가져왔는데 영제에게 비싼 값으로 관직을 구입한 관리들은 조선시대 말기의 삼정의 문란에서 보여주었듯이 가혹한 가렴주구를 시행하였습니다. 관리들은 관직에 부임하자마자 가혹하게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음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더 높은 관직을 구입하였고 그런 자리를 이용하여 더 많은 재산을 모으고 토지를 늘려나갔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천지에 울려 퍼지게 되면서 가난한 농민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기 184년 종교를 이용하여 국가 타도를 처음으로 시도한 장각의 황건적의 난이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고 한나라 조정은 뒤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황건적의 난으로 후한의 치안은 완전히 마비가 되었고 장각은 병사하고 동생인 장보, 장량이 전사하면서 난은 진압되었지만 잔당들이 봉기를 이어나갔고 호족들이 무장을 시작하면서 군벌들이 대두하였고 천하는 미증유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신흥종교에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현재 신도수 1억 명이라는 파륜궁을 비롯하여 기존 종교인 가톨릭, 불교, 개신교,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항상 일정한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중국 역사상 빈털터리에서 황제가 된 두 명의 인물을 들자면 백수건달로 살다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 생활을 하다가 홍건적에 가담하여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는 한나라 6대 황제 경제의 후손으로 오늘날 허난 성과 후베이 성 일대를 가리키는 남양군 출신의 호족이었습니다. 남양 일대의 지역은 한나라 제국 시절인 B.C. 50~40년대에 대규모 관개 시설이 건설된 이후 매우 안정적인 번영을 구가하였는데 이 지역이 선진 농사 기술을 도입한 이후로 토지 집중화에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되었습니다. 소농 가구들은 빚을 갚지 못해 땅을 몰수당했고, 그 결과 대토지 소유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B.C. 7년 관중 지역에서 한 가구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30경으로 제한하려는 제도를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토착 지주 세력과 결탁한 관리들의 방해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1경(頃)은 주나라 주공이 정한 토지 단위로 1 경이 100 무로 약 10,000제곱미터의 면적을 가리킵니다. 후한의 광무제의 경우 사유 재산이 250~300경이었다고 하며 유산으로 식읍 457호를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대략 농지 200경을 소유했을 때의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광무제 유수의 처가인 음씨 즉 장렬 황후 음려화의 가문이 소유한 토지는 700경, 식읍이 1000호를 넘었다고 합니다. 광무제 유수의 외가인 번씨와 처가인 음씨 모두 남양군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었고, 유수의 부하 장수들도 과반수가 남양군 출신의 호족들이었습니다. 후한 말기에 오면 중국의 빈부격차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후한 시대의 대다수 관리들은 지방 호족 계층 출신자들이었고 이들이 경력을 높여가기 위해서는 지방장관 출신이나 중앙정부의 발탁이 필요한데 그때의 판단 자료가 되는 것은 호족 사회에서의 평판과 명성이었습니다. 후한은 환관 외척 세력과 이들에 맞서는 청류파 관료들 사이의 정치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정치투쟁은 한 왕조의 구심력을 계속 약화시켰고 각지에서 독자적인 경제 기반을 갖춘 호족들은 국가권력의 강화보다는 지방의 분립을 촉진하는 존재로 되어갔습니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면서 조조가 세력을 강하게 하였고, 황제를 옹립하면서 원소 세력을 격파하는 관도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장강 하류지역의 오나라와 사천 지방의 촉은 조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중국에는 3명의 황제가 병립하는 시대가 되면서 우리들에게 익숙한 삼국시대가 펼쳐진 것입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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