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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Oct 12. 2022

고려에 유교의 씨를 뿌린 안향

안향은 고려 사람이지만 조선시대 동방 18현에 올라 문묘에 종사되었던 조선 유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정승 3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3명이 문묘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학자들에게는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화폐의 인물이 되거나 올림픽 금메달이나 훈장을 수여받는 것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문묘에 배향되는 현인을 배출한 가문은 권문세가를 뛰어넘는 국반으로 대접받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황을 배출한 진성 이씨, 이율곡을 배출한 덕수 이씨, 이언적의 여주 이씨, 송시열의 은진 송씨, 김집의 광산 김씨, 박세채의 반남 박씨가 조선 6대 국반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안향은 신라 2현인 최치원과 설총과 더불어 고려시대에 이미 문묘에 종사되는 대접을 받았고 훗날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2현이 되어 조선시대의 14현과 함께 동방 18현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안향을 배출한 순흥 안씨 중 가장 이름 있는 인물은 단연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향이 태어난 13세기의 고려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고려의 중부와 동부를 장악한 왕권 세력과 북부를 장악한 몽고군과 친원세력, 남부를 장악한 삼별초등 반원 세력이 심하게 갈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 북부와 중부 세력이 연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면서 고려의 무신정권(1170~1279)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원의 간섭기(1259~1356)가 시작되었습니다. 1259년 고종의 아들로 몽골에 인질로 있다가 귀국한 원종은 원나라처럼 과거를 통하여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때 안향도 급제하여 관리가 출사하게 되었습니다. 안향의 관료생활을 살펴보면 초기부터 최고위직인 재상에 오르기까지 지방관리나 실무행정관리보다는 중서 문하성 같은 최고정책결정기관과 정동행성과 같은 원나라 감독기관에서 주로 직무를 맡았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충렬왕 때 재상이 되었지만 왕의 측근들에 밀려 실권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고 합니다.     


 안향의 업적을 손꼽는다면 ‘동방의 주자’라고 불릴 정도로 주자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안향은 성균관 학생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근래에 전란의 여파로 학교가 파괴되어 유학을 배우려는 학자는 배울 바를 모르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불경을 즐겨 읽어서 그 아득하고 공허한 교리를 신봉하니 나는 이를 매우 슬퍼한다.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있다. 선불교를 배척한 주자의 공로는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여러 학생은 주자의 새로운 서적을 돌려가면서 읽고 배우기를 힘써 소홀하지 말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안향은 주희의 호인 회암을 본받아 자신의 호를 회헌으로 지었고 원나라에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안향은 당시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인 위기가 가중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안향이 충렬왕 원년(1275) 상주 판관으로 있을 때의 무당과 관련된 사건을 보면 안향의 단호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당시 여성 무당 세 명이 요신을 모시며 지역 주민을 현혹시켰다. 합주로부터 여러 군현을 돌아다닐 때 이르는 곳마다 공중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를 읊조렸는데 그 소리가 은은하여 “길을 치라”라고 하는 듯했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서둘러 다니며 제사상을 앞 다투어 차렸다. 수령도 일반 백성과 마찬가지였다. 상주에 도착해서 안향은 여성 무당에게 곤장을 치고 칼로 씌웠다. 무당은 귀신의 힘을 말하면서 겁을 주고 자신이 복을 줄 수 있다고 유혹하였다. 상주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지만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옥에 갇힌 무당이 풀어달라고 애원하자 요신 숭배가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안향의 의연한 모습은 원나라 황제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였다고 합니다. 몽골 간섭기에는 원나라 황제의 마음대로 하루아침에 아버지 왕과 아들 왕이 물러나고 즉위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안향이 아버지 충렬왕이 고려의 왕으로 복위되고 난 뒤 아들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 연경에 들어가 원나라 세조의 질문에 응하게 되었던 시절의 일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원의 세조가 충선왕을 급히 부르니 왕이 두려워하였는데, 원나라 승상이 말하기를 ’ 수석 대신‘인 자가 입대하라’고 하였다. 안향이 들어가니 원나라 승상이 묻기를 ‘너의 왕은 어찌하여 고려 왕의 부인인 원나라 공주에게 가까이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안향이 이르기를 ‘내전의 일은 외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물으신다면 어찌 물음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승상이 이 말을 원의 세조에게 그대로 말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 이 사람은 가히 일의 근본을 아는 자라 할 수 있다. 어찌 먼 곳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서 경멸히 대할 것인가’ 하고는 다시는 묻지 않았다”     


안향은 자신의 사명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고 하였고 이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1301년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헌납하고, 순흥부에 있는 자신의 토지 30 결과  남녀 노비 각 100인을 국학에 귀속시켰습니다. 1303년에는 관리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공자와 공자의 제자 열 명의 모형과 문묘에 사용한 제기를 구입하여 오도록 하였으며 1304년에는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 은과 포목을 내게 하여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만들도록 하였고, 중국의 강남에서 유교의 육경과 제자 백가서와 역사서적 등을 수입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 죽은 후 ‘문성‘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안향이 양현고의 사용할 자금을 마련하고자 6품 이상은 은 1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포목을 내게 하여 그 이자로 장학금으로 사용하자고 하자 고세라는 무인이 자기는 무인이라고 돈내기를 거부하였는데, 이를 들은 안향이 이르기를

“공자의 교는 만세에 법으로 내려온 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신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부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서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이럴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니 고세가 듣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즉시 돈을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안향의 풍부한 재력에 대해서는 국학과 섬학전 설치 과정에서 여러 재물을 기증한 사실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안향의 후손들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소속 노비들이 ’ 우리의 상전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하였고, 성균관 관원들도 안향의 후손들을 특별 대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안향이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를 맡았을 때에는 급제자 30명 모두에게 고가의 돈피이불을 선물하고 음식을 대접할 때 은그릇을 사용할 정도로 부유하였다고 기록되어있고 훗날 조선시대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집터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을 건립하려는 공사를 하다가 안향의 집터에서 구리 그릇 300여 점을 발굴하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향의 부는 고려시대 가문 대대로 흥주의 호장으로 읍리전을 보유하였던 것을 토대로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고, 아버지 안부가 재상에 해당하는 밀직부사로 있었으므로 과전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과 안향의 전처의 장인이 경상도 안찰사로 있으면서 가렴주구가 심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장인 김록연의 재산의 일부가 아내를 통하여 안향에게 상속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유학자들은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였는데 안향도 공동으로 대장경 1부를 인행 하여 원나라 사찰에 기증하기도 하였고 후처인 염씨의 이름으로 수보살계법을 발원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안향은 안자라는 경칭으로 불릴 만큼 조선시대에도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전반적인 삶을 살펴보면 고려가 대원몽고국의 제후국으로 정착하던 시점에서 정치적 현실을 인정하면서 안정된 내치와 문풍의 진작만이 왕조를 보존할 수 있다는 현실인식을 가졌던 관료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당시의 고려말에 안향은 직접 시대의 모순을 척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문풍을 일으키는 방법을 통하여 보다 나은 국가의 미래를 만들고자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바친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되며 그런 정신이 흘러 흘러 조선시대 말의 안중근 의사까지 전달된 것은 아닌가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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