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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Oct 28. 2022

유비는 어떻게 남의 마음을 얻었나?

 삼국지연의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선한 유비와 악한 조조의 싸움‘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삼국시대 이후 천년 후에 태어난 명나라의 나관중은 수천 년간 이어온 대다수 평범한 중국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바람직한 지도자에 대한 이미지를 삼국지의 유비라는 인물을 통하여 형상화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중텐은 전통사회의 중국인들은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꿈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꿈은 ‘대동의 꿈’으로 부락 시대의 작은 공동체로 돌아가려는 꿈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꿈인 ‘소강의 꿈’은 고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방국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소박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꿈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민중들은 새로이 ‘태평성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중텐은 전통사회의 중국인들의 태평성대의 꿈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선 인자하고 지혜로운 황제를 바라는 ‘성군의 꿈’과 청렴하고 능력 있는 관리를 바라는 ‘청관의 꿈’ 그리고 성군과 청관이 없어 세상이 어지러울 때 누군가 불의에 맞서 의협심을 발휘해 주길 바라는 ‘협객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나관중의 삼국지는 성군, 청관, 협객이라는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꿈들을 사람들이 마음 놓고 꿈꿀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군은 유비이고 청관은 제갈량이며 협객은 관우와 장비라는 것입니다.      


그럼 삼국지연의가 아닌 현실 속의 유비는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일까요? 삼국시대의 승리자인 위, 오, 촉의 선두주자, 황제 조비는 아버지 조조가 당대의 권세가이자 부호인 환관의 집안에서 출발하였고, 손권은 형 손책, 아버지 손권 3대에 걸쳐서 강동에서 무력으로 기반을 잡아온 군벌 집안을 물려받아 황제가 되었지만, 유비가 태어나 살아간 한나라 말기의 모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던 수준이라고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족의 후손이라고는 하지만, 빈털터리 집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비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적수공권으로 태어난 소년이 후한의 혼란 시절에 황제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비는 평생 다섯 번 주인이 바뀌고, 네 번 아내를 잃었으며 반평생을 비참하게 떠돌았던 삶을 살면서 40대 후반에 스스로 비육지탄을 하던 인물이 어떻게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그 비밀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어린 시절의 유비는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의 집 동남쪽 모퉁이의 울타리 옆에 높이가 5장쯤 되는 뽕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수레 덮개와 같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유비는 이 나무 밑에서 놀면서 “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한 천자의 수레를 탈 거야”라고 말하며 황제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작은 아버지 유자경은 이 소리를 듣고 놀라서 “우리 가문을 멸망시키겠구나”라며 허튼소리를 하지 말라고 교육시켰다고 진수의 삼국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정익은 2019년 유비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관하여 논문을 작성한 바 있습니다. 유비의 삶에서 나타난 39건의 만남을 통하여 유비의 인간관계의 비밀을 탐색하여 나가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비는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사귀기를 좋아하므로 젊은이들은 다투어 그를 가까이했다고 합니다. 다만 평생의 동지이자 의형제를 맺은 관우와 장비를 만나서는 평소의 담담한 느낌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유비, 관우, 장비는 각기 다른 날에 태어났지만 죽는 날까지 함께 하고자 한다며 이를 어길 시에는 하늘이 자신들을 죽여달라”는 맹세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같은 침상에서 잤고 그 행동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관우와 장비는 진정으로 유비를 공경하였고 어려운 시절에 맺은 의리를 평생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유비의 이러한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심지어 유평이라는 사람이 유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자객을 고용하여 유비를 죽이려 하였으나 유비를 죽이러 온 자객이 유비가 사람들을 성심성의껏 대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차마 찌르지 못하고 자신이 자객임을 밝히고 떠나기도 하는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비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가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탁이 어린 황제 소제를 몰아내고 자신과 성이 같은 동태후가 총애하던 진류왕을 헌제로 옹립하는 신하로써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자 후한 시대의 사족들은 동탁에게 걸었던 일말의 기대를 접기 시작했고 폭주하는 동탁은 자신의 야만적이고 포악한 면을 숨김없이 드러내었습니다. 동탁의 병사들은 민간에 난입하여 노략질과 강간과 살인을 저질렀고, 동탁은 연회 중에 여포를 시켜 장온의 목을 잘라 쟁반에 담아오면서 공포로 낙양의 사족들을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낙양성의 모든 호족과 부자들이 동탁의 칼 아래에서 제물이 되기 시작하자 반동탁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190년 정월에 원소와 원술 형제,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하내 태수 왕광, 진류 태수 장막, 동군 태수 교모, 산양 태수 원유, 제북상 포신 등이 동탁을 토벌하자고 일어섰습니다. 모두 당대의 유력한 호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담금질 속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어처구니없게 쓰러지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에는 세력이 미미하였던 조조, 유비, 손권이라는 인물들이었고 최후의 승리는 조조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사마중달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말을 우연이라고 평가할지, 아니면 당연한 필연이라고 보아야 하는 걸까요? 어쩌면 유비는 이들 호걸들 중에서는 출발점에서는 가장 형편이 열악한 상황이었음에도 어떻게 트리오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지 그 비결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유비는 15세에 친족인 유원기의 후원을 받아 당대의 대학자인 노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공부에 열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사귀는데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 공손찬과 동문수학 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훗날 유비와 공손찬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공손찬이 원소와 싸우면서 패하였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공손찬의 최측근이 점쟁이 유위대, 거상 악하당, 비단장수 이이자 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 명이 의형제를 맺고 점술에 의지하며 공손찬의 뜻을 빙자해 멋대로 하는 바람에 뛰어난 장수들과 책사들이 하나둘 공손찬을 떠나고 그중 일부는 적장인 원소에게 투항하였습니다. 원소에게 밀리던 공손찬은 도망치다가 어이없게도 유우를 초대해놓고는 문전박대하였습니다. 화가 난 유우가 10만 군사로 공손찬을 공격했지만 전투 경험도 부족하고 백성들의 피해를 염려한 유우는 우왕좌왕했는데 공손찬은 유우를 사로잡아 바로 처형해버립니다. 유우를 죽이고 유우가 다스리던 유주 땅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평소 선정을 베풀던 유우를 흠모하던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합니다. 유우는 그 지역의 한족은 물론 심지어 북방 민족에게도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고 이제 유우를 죽이면서 허베이 지방에서 공공의 적이 된 공손찬은 자신의 근거지에 역경성을 쌓고 고립되어 있다가 성밑에 굴을 파서 공격하는 원소에게 몰려 자기 가족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와 정반대로 유비는 서주의 태수 도겸이 죽기 직전 서주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조숭의 복수를 내세운 조조의 서주 공격에 몰린 도겸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도겸을 도와주던 유비는 도겸이 죽기까지 자신의 두 아들은 공부만 해서 문약하다며 서주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도 이를 거절합니다. 진등이 나서서 “서주는 풍요로우며 인구가 100만입니다. 당신이 이 주를 맡아 주시기를 머리 숙여 원합니다”라고 부탁을 해도 사양합니다. 많은 백성들과 지역의 세력가들이 맡아달라고 아우성이었고 북해태수 공융도 권유를 하자 유비는 지역의 민심을 확인하고 마침내 수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때 삼양 서주(三讓徐州)라고 서주를 세 번 사양했다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유비에 대한 백성들과 제후들의 평가는 높아집니다. 이때 얻어진 유비에 대한 높은 평가는 훗날 유비가 여포의 배신으로 큰 어려움을 겪을 때 도겸이 다스렸던 서주 지역에서 제일의 부자로 이름 높은 미축의 행동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미축은 자신의 누이를 어려움에 처한 유비에게 시집을 보내고, 노객 2,000명과 금은과 재물을 유비에게 지원해 주었습니다. 유비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아낌없이 지원한 것입니다. 유비가 처음 황건적의 난에 대항하여 거병하였을 때에도 중산 지역의 큰 상인 장세평과 소쌍 등이 천금의 재산을 모아 탁군 일대에서 말을 사려다가 유비를 보고 뛰어난 인물이라 여겨 유비를 지원하였고 그 덕분에 유비는 많은 무리를 모을 수 있는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고 진수의 삼국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형주에 있을 때 조조가 남하하면서 공격을 가하자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유비는 신야의 백성들과 함께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비를 따르는 무리가 10여 만에 이르자 피난민들의 행렬이 하루에 10여 리밖에 가지 못하자 주위에서는 무리는 많으나 갑옷을 입은 자들은 적으니 막을 방도가 없다며 시간이 없다며 빨리 관우가 기다리는 강릉으로 도피해야 한다고 강권하였습니다. 이때 유비는 “무릇 큰 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 하는데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라며 고생길을 자초하였습니다. 유비는 천하를 얻기 전에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제후들도 모두 다 알고는 있으나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백성과 고난을 함께 하면서 마음을 얻었고 재능이 있는 인물들에게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방법을 통하여 마음을 얻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장로의 공격으로 사천지방에 위치한 익주가 위기에 처하자 장송은 조조를 만나 해결책을 얻고자 하였지만 어렵게 만난 조조에게 장송은 모욕만 당하였습니다. 그런 장송을 유비는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장송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부의 높은 명성을 우레처럼 들은 지 오래입니다. 구름과 산으로 가로막혀 머나먼지라 가르침을 듣지 못해 한스러웠습니다. 듣자니 성도로 돌아가신다기에 오로지 이렇게 맞이할 뿐입니다. 만일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저희 보잘것없는 고을이나마 방문해 잠시 쉬어가십시오.” 삼국지연의에 기록된 유비의 이 말이 조조에게 모욕과 무시 속에서 꽁꽁 얼어붙은 장송의 마음마저도 모두 녹아버렸을 것임은 불문가지라고 보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였던 유비의 진정한 마음은 과연 어떠하였을까요? 유비는 진정 인격적으로 욕심이 하나도 없는 무결점의 인물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한 것일까요? 촉을 얻는 과정에서 방통과 유비와의 사이에 벌어진 일화는 유비가 자신의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얼마나 노력하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시금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비는 양회와 고패를 참수하고 촉의 수도인 성도로 향하면서 번번이 승전하였습니다. 유비는 주연을 베풀면서 방통을 항햐여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모임이 가히 즐겁구려” 방통이 말하길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군대가 아닙니다” 술에 취한 유비는 화가 내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무왕이 주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추었는데 그도 어진 이가 아니었단 말이오?” 유비가 화를 내자 방통도 자리를 피해서 물러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비의 마음속에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촉을 빼앗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고뇌가 있었지만 현실적인 욕망 앞에서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인간적인 욕망이 달성되었기에 자신의 본심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비가 촉을 얻은 후 객장으로 떠돌아다니던 시절에는 경험하지 못하였던 경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촉이라는 기반은 생겼지만 이제 자신을 위해 그동안 고생을 한 장수들에게 포상도 하여야 하고 군대와 경제 건설에 돈은 필요한데 국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유장 밑에 있다가 투항한 사천지방의 경제 담당 관리인 유파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유파는 해결방법은 간단하다며 100전에 해당하는 대전을 주조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유비는 유파의 방법이 어떤 경제적 후유증이 발생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제갈공명에게 다시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제갈공명은 화폐 남발이 정권을 위태롭게 한 전한 말기의 왕망과 후한 말기의 동탁의 일을 거론하며 반대하면서 보다 정교한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제갈량은 유비를 통하여 포상을 내리면서 제갈량, 법정, 관우, 장비에게 각각 금 500근, 은 1000근을 하사하고 다른 장수들과 투항한 장수들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습니다. 이어서 창고에 있는 군량미로 민간의 금은보화를 구입하면서 동시에 유파가 말한 대전을 발행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난세에 곡식은 화폐이자 유용한 양식이므로 곡식과 금은보화를 자발적으로 교환하였고 새로이 얻은 곡식들을 먹을 양식이 확보되면 거래에 사용하여 상품 유통 속도가 활발하여졌다고 합니다. 또 금은보화를 받은 장수와 사병들은 새로운 재화가 생겼으므로 이를 시장에 유통시키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수요의 증가로 화폐의 수요도 증가하여 대전의 주조 및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경제가 안정적으로 순환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갈공명이 과거 왕망과 동탁의 화폐 남발의 폐단의 원인과 결과를 감안하여 성공적으로 경제를 이끌어 낸 효과라고 평가할 수 있고 제갈량이 심혈을 기울이여 양성한 촉의 비단은 위나라와 오나라에 수출되어 국고를 풍족하게 하였고 지금까지도 사천지방의 비단 산업은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유비가 천하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가난한 황족의 신분에서 촉한의 황제에 까지 이르게 된 비밀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유비의 노력을 청나라 말기의 이종오는 유비와 조조 모두가 얼굴은 두껍고 마음은 시커멓다면서 후흑학의 달인이라고 평가하는 관점도 존재하고 있지만 오랜 기간 유비가 중국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의 마음을 얻은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면서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그 결과 상대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유비의 탁월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의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는 높이 평가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파이팅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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