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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Nov 07. 2022

조조는 어떻게 열등감을 극복했나?

삼국지연의는 한마디로 착한 유비와 악한 조조와의 싸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유비는 보수를 대변하고 조조는 진보를 대변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한이 망하고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새롭게 한나라의 명맥을 이어간 것처럼 유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쫓겨난 뒤 촉한을 내세우며 한나라의 질서를 다시 복구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지만, 환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조조는 위선적인 당대의 허례허식을 비판하고 오직 실력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려고 시도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이나 개인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탐색하는 변화 방정식 이론은 DVF가 R보다 더 값이 클 때 Change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D(불만족), V(비전), F(첫걸음)을 곱한 값이 R(저항)보다 그 값이 클 때 C(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조조의 변화 방정식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환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조조는 불만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소년 시절의 조조는 임협 방탕(任俠放蕩)한 건달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조는 비슷한 부류의 소년배들과 패거리를 지어서 놀러 다니곤 했는데 매를 날리고 사냥개를 몰아 짐승을 잡거나 도박을 즐기고 여염집과 술집을 드나들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한 말기의 시대상황에서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단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직으로 나가거나 농사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을 배우거나 장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위는 낮고 비천했습니다. 사족이나 권세가의 자제들은 학문을 배워서 관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지만 평민의 자제들은 집안의 농사일을 돕다가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생업에 종사하던 시절이었다고 김경한 삼국지 1권은 말하고 있습니다. 후한 말의 인구조사의 집계 결과는 당시 중국 전체 인구가 5000만 정도였으나 100년 후 통일된 서진(西晉)의 인구는 1,600만의 인구로 대략 3,000만의 인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워낙 난세였으므로 백만이 넘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각 곽사의 난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유랑민이나 도적이 되었고 권세가의 노비가 되어 중앙에서 파악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의 풍속에서는 젊은이들이 패거리를 지어 작당하고 방탕하게 놀면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소년들을 악소년이라고 불렀는데 일종의 건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제가 거주하던 낙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문세족과 권문들의 자제들 중에는 리더십은 있으나 글방에 들어앉아 품행이나 닦으며 공부만 하기에는 혈기방장한 청소년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원소나 원술과 같은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집안 출신과 훗날 원소를 배반하던 허유, 또래의 장막, 포신, 오광, 오경 등이 있었습니다. 빈한한 가문이나 평민 출신의 자제들도 명문가의 자제들을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하거나 함께 무리를 지어 방탕한 짓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조는 원소와 더불어 소년배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대산맥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지만 가문의 위세로 볼 때 환관 집안인 조조는 원소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조조의 내면에는 치명적인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내시의 양자 조숭의 아들. 명문세족, 특히 사족들이 보기에는 버러지 같은 가문이었습니다. 양자의 아들은 정통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에 조조는 양자의 아들이자 내시의 손자였습니다. 명문 사족들의 손가락질의 대상인 내시의 양자, 그 양자의 아들 조조는 주류 계급들에게는 멸시 섞인 비아냥거림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조조가 어린 시절 방탕하게 놀았던 것도 이런 심리가 밑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덕행을 쌓고 학업에 정진한다고 하여도 주류 계급에 속하는 명문 사족들에게는 내시의 후예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전한을 세운 유방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200년 후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는 남양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습니다. 부인인 처족, 어머니인 외가 부하 장수들도 대부분 남양의 호족들이었습니다. 후한의 광무제는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전한에서 시행하는 수전제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나눠주고 세금을 걷는 제도입니다. 이를 위하여 전국의 토지를 측정하여 매년 토지현황을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전한의 토지 분배의 기준이 100무임에 비하여 후한의 농민들은 적으면 몇 무가 전부였고 대다수는 20~30 무를 넘지 않았습니다. 100 무를 보유한 농민은 극소수였지만 전한 시절부터 세력을 키운 지주 호족들은 전국 범위로 가진 토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호족들의 힘은 황제마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광무제의 아들 명제가 전한 시절의 제도인 ‘상평창’을 건립하여 빈민구제를 하려고 했으나 개국공신이자 수만 무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태부 등우부터 매우 불쾌해하며 진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에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므로 심사숙고해 주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명제가 등우를 설득하려 하자 남양의 명문가 출신인 태위 조희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상평창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명제는 깊은 탄식과 함께 명령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사와 외척들이 지방과 중앙을 모두 장악한 상태에서 황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한은 호적관리를 실시하여 모든 백성들은 호적에 기록되어 편호로 불렸으며 이들은 모두 평등한 관계로 이를 제민이라고 칭했습니다. 하지만 전한 말기에 이르면 제민은 고르지 않게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비천해지고 극소수는 부유하거나 고귀한 호족이나 명문 귀족으로 되어 사회구조가 크게 변화되었다고 이중텐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후한의 초대 광무제는 62세, 2대 명제는 48세로 비교적 장수하였으나 3대 장제 이후로는 모두 미성년의 황제가 즉위하였고 특히 5대 상제는 생후 100일 만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나라는 외척과 환관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어려서 태후가 섭정하게 되면 외척들이 독재정치를 펼치게 되고 황제가 커서 권력을 되찾아오려고 하면 환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외척과 환관이 돌아가며 권력을 독차지했습니다. 외척들은 하진과 같이 백정 출신의 천민도 있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대부분은 사대부 출신이었습니다. 이 사대부들은 환관 세력의 부패를 맹렬히 비판하며 자신들은 깨끗한 물이라는 의미로 ‘청류파’, 환관 세력들은 더러운 오물이라는 의미로 ‘탁류파’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거세당해 궁중에 들어온 환관들 중에는 새디즘 성향을 지닌 자들이 많았고 “너의 불행이 곧 나의 쾌감”이었던 환관들은 수시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대부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즐겼습니다. 환관들은 새로운 가학적 방식을 고안하여 타인들이 자신들에게 자비를 갈구하도록 만들고 자신들이 계속 통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조조는 그런 환관과 같은 탁류파 출신으로 청류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조조가 가지고 있는 비전에 대하여 살펴보면 진수의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는 조조를 설명하면서 성은 조(曺)이고 휘는 조(操)이며, 자는 맹덕(孟德)이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맹덕은 맹자의 덕을 말하는 것인데 조조의 이름과 자는 순자 권학 편의 구절인 ‘덕조’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조의 가장 핵심적인 참모인 순욱이 순자의 후손인 것도 이런 성향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맹자의 덕을 추구한 조조는 세간의 냉혹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르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데, 신하들이 황제에 오르라고 권하여도 조조는 “만일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이다”라고 선언하며 왕의 자리에 만족하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조조는 자신의 임무는 시인입덕(施仁立德)이라며 자신의 아들에게 길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경극에는 관우의 얼굴은 충심을 나타내는 붉은색임에 반하여 간사하고 음흉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조조의 얼굴은 흰색이라고 합니다. 오랜 기간 고정된 조조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데 시인으로도 명망이 높은 조조가 지은 호리행(죽은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는 젊은 시절의 조조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병사의 갑옷엔 이가 득실거리고

백성들은 다 죽어가는구나.

온 들판에 백골이 뒹굴고

천리에 닭 울음소리 끊겼으니

살아남은 사람은 백에 하나나 될까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누나.      


조조는 66세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에는 “병사를 통솔하며 수비지에 주둔하고 있는 자가 부서를 떠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담당 관리는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하라. 시신을 쌀 때는 평상복을 사용하고, 금은보화는 묘에 넣지 마라. ” 진수는 조조를 평하여 “한나라 말기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호걸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중에서 원소는 네 주를 근거로 하여 호시탐탐 노렸으며 강성함이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는 책략을 이용할 계획을 세워 천하를 편달하고,(중략) 마침내 국가의 큰일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오직 그의 명석한 책략이 가장 우수했던 덕분이다. 따라서 그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조조는 맹덕이라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현실에서의 조조는 환관의 자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조조의 퍼스트 스탭, 첫걸음은 무엇이었을까? 후한시대는 ‘태감, 명사의 천하’라고 불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여기서 명사(名士)는 일반적으로 현이나 군 단위의 거대 가문의 자제나 황제 외가 친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나라는 과거제도가 없어서 관리가 되려면 일반적으로 고위 관리의 추천이나 심사를 거처야만 했는데 그 기준은 사족들 사이에서의 평판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조조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 할아버지 조등이 추천한 사람들 중에 공경의 지위에 오른 이들이 많았습니다. 조조는 이들을 통하여 태위 벼슬을 지낸 교현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삼공의 최고 지위에 오른 교현은 조조를 높이 평가하여 장차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늙은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한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교현은 조조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허소의 인물평을 통하여 세인과 고위직들에게 이름을 드러내라고 권하였습니다. 허소가 공식적으로 조조를 평가해준다면 조조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새로워지겠다는 것입니다. 조조는 당시 1억 전의 돈을 써서 태위 벼슬을 산 조숭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조조가 후한 예물을 보내고 겸손한 말로 청을 넣어 사귐을 청하여도 허소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허소의 입장에서는 조조는 근본 없는 내시의 후예일 뿐이었고 환관 가문의 건달배에 대하여 인물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족들의 인망을 해치는 일이었습니다. 오기가 난 조조는 허소의 약점을 공략하였습니다. 회유가 통하지 않으니 협박을 할 작정인 것입니다. 허소의 약점을 찾아낸 조조는 허소의 먼 친척인 허유를 시켜서 허소에게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원소가 모친상을 당하여 복양에서 낙양으로 돌아올 때 원소 가문의 위세에 수많은 인사들이 전별금으로 내어놓은 재물과 선물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소는 막상 허소가 사는 여남 경내에 이르자 다른 수행원들은 길을 돌아가도록 하고 마부 하나만을 동반했습니다. 여남에 사는 허소의 비판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지만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은 허소는 기존의 나라를 이끌 동량지재라는 원소에 대한 평가를 수정한 재평가를 할 계획을 동생인 허정과 논의하였습니다. 이런 내밀한 계획을 원소 가문에서 알아채고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허유는 원소의 편에서 허소를 설득했는데 이번에는 조조의 편에서 원소를 배반한 것입니다. 결국 허소는 조조를 만나 조조에 대한 월단평을 하였습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治世之能臣 難世之奸雄)


허유의 인물평을 얻은 이후 조조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치세의 능신이라는 허소의 인물평에 힘입어 사마중달의 아버지 사마방은 황제의 비서실 부실장에 해당하는 상서우승에 있었는데 낙양령에 조조를 추천하였습니다. 하지만 상서 양곡이 조조가 출신이 나쁘고 품행이 좋지않다며 반대하여 결국 낙양 북부위로 임용되었습니다. 당시 낙양 북부는 궁중의 권세가들과 고위직 환관들의 사저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개 안하무인이었고 법을 어기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자가 거주하는 낙양에서 치안 책임자는 질서를 유지시켜야 하는데 잘못하면 환관들에게 찍혀 멸문지화를 당할 위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족들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권세가 환관들의 지역에 환관의 자제인 조조를 책임자로 보내려는 의도였습니다. 조조는 부임한 지 한 달도 되기 전 대형사고를 발생시켰습니다. 통행금지를 어긴 중상시 건석의 삼촌을 몽둥이질로 죽인 것입니다. 중상시 건석은 영제 초기에 대장군 두무와 태위 진번이 환관들을 숙청하려 하자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인 환관이었습니다. 훗날 영제가 죽기 직전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할 것을 부탁받은 권력의 핵심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건석조차도 대선배인 조등의 손자인 조조를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수도 낙양의 치안은 좋아졌고 밤에 금령을  어기는 사람들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불편해진 환관들은 조조를 현령으로 승진시키면서 외지인 돈구현으로 좌천시켜버렸지만 조조는 낙양을 비롯하여 사족들에게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서기 174년 후한 광무제 유수가 왕망의 난으로 망한 한나라를 다시 세운 지 15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훗날 동탁의 폭정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동탁의 책사 이유는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왕윤과 함께 조조를 동탁에게 추천하였습니다. 낙양에서 청렴하고 강직하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 왕윤이었다면, 최고의 법치주의자는 조조였습니다. 왕윤과 조조는 황실을 지킨다는 심정으로 동탁 정권의 핵심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동탁의 전횡을 피하여 도성을 탈출한 원소와는 다른 선택이었습니다. 조조는 허상 뒤에 숨어있는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는 눈을 가졌고 그것이 그의 성공과 세간의 악평의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쩌면 실용주의자 조조는 허례허식에 물든 후한을 정리하는 자신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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