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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Nov 17. 2022

타향서 고아가 된 공명의 방책은?

제갈량의 위광은 삼국시대 중국을 뛰어넘어 놀랍게도 21세기 서울의 남산과 용산 보광동에도 제갈량의 사당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진수는 당대의 정사 삼국지 촉서에서 제갈량전을 유일하게 독립된 파트로 서술하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뛰어난 인재로 관중, 소하에 비교할 만하다”라고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마침 진수가 삼국지를 쓰던 시절 진의 태조 사마염의 아들 사마충이 역대급의 어리석은 태자여서 적국의 인물이었지만 유선을 보필하던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삼국지 심리학>의 저자 이동연은 제갈량이 한족 최상의 현인으로 부상하게 된 원인은 거란, 여진, 몽골족과 싸우던 남송의 주자, 주희가 촉한정통론을 표방하면서 한족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주희가 지은 시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 한 번 길게 불며 아득한 고인과 친교를 하노라>에서는 출사하기 전 제갈량이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을 자주 불었던 사실을 인용하면서 제갈량이 의(義)와 리(利)의 경계가 분명했고 타고난 자질도 우월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경영학의 변화방정식 이론에서는 DVF가 R 저항값보다 클 때 C Change가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았습니다. 현실에서 D dissatisfaction 불만족이 있고 미래에 대한 V 비전이 있더라도 변화를 실제적으로 발생시키려면 F first step 첫걸음이 시작되어야만 C Change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변화방정식 이론에 제갈량의 삶을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제갈량은 181년에 서주의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나서 10대에 형주로 이주하였는데 그 원인이 193년과 194년에 있었던 조조의 서주 대학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에 관하여 삼국지 <제갈근전>에서는 제갈근이 “자신과 친구 은모가 고향의 엄청난 재난 때문에 그곳의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어 고향을 버리고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제갈량도 그 참상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습니다. 후한서 군국지에서는 서주의 호구수가 270만으로 기록되었고 서주태수 도겸의 통치기간에 각지에서 유민들이 몰려와 인구가 증가한 상황이었는데 도겸이 죽은 후 진등이 유비에서 서주태수가 되기를 청하면서 서주의 호구수가 100만이라며 풍요롭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그 참상을 10대의 제갈량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후세에 제갈량은 촉의 승상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10대 초반의 소년 시절에 조실부모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17세에 형제들을 돌보아주던 작은 아버지 제갈현 마저 죽자 27세에 유비가 찾아와 삼고초려로 출사 하기까지 10년간 타향인 형주의 융중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처지였습니다. 난세에 서주 출신인 제갈량이 객지인 형주에서 어떻게 관중과 악의를 꿈꾸던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시켜 나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제갈량의 Dissatisfaction 불만족     


 제갈량은 나이 어린 10대 초반에 아버지 제갈규를 여의었다고 합니다. 3남 2녀의 형제 중 7살 위의 형 제갈근은 수도인 낙양에서 학업을 이어나갔고 고향인 서주에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의 죽음으로 난리가 나자 장강 이남의 양주로 피신하여 차츰 학문적 명성을 얻어가다 손권의 매형인 곡아사람 홍자에 의해 천거가 되어 점차 손권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노숙과 동급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형인 제갈근을 제외하고 제갈량과 9살이 어린 동생 제갈균,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누나 2명은 작은아버지 제갈현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작은아버지가 당시 후장군 및 남양태수였던 원술에 의하여 예장태수로 임명되었으나 동탁의 조정에서 임명한 주호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하려고 형주로 이주하였습니다. 하지만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을 통하여 <헌제춘추>에서는 제갈현이 197년 백성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며 차이가 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사에서 진수는 제갈량이 17세에 작은아버지 제갈현이 죽자 직접 밭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생계에 쫓기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갈량만의 특별한 대비책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하였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함께 공부한 최주평, 석광원, 서원직, 맹공위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훗날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는 평가받지는 못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제갈량의 Vision  비전   


 제갈량은 평소에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유하였는데 관중과 악의가 무엇이 출중하고 탁월하였기에 제갈공명이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중은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친교를 맺은 포숙아와의 우정을 나타내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인물이며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도와서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을 육성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 수많은 중원의 제후들 가운데에서 환공을 패자로 만든 명재상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관중이 지은 ‘관자’에 나오는 목민 편을 정약용은 치국의 근본으로 여겨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관중은 “백성들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고 하면서 풍족한 물질생활이 보장되어야 백성들의 도덕과 교화가 가능하다는 사고를 하였던 인물로 공자도 높이 평가한 정치가입니다.      


악의는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 소왕이 현자를 초빙한다는 말을 듣고 본국인 위나라에서 연나라로 이주하여 당시 세력을 떨치던 교만한 제나라 민왕을 치기 위하여 조, 진, 한, 위, 연나라 연합군을 결성하여 제나라 수도 임치를 함락시키고 제나라의 재보를 연나라로 옮기는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훗날 소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하자 모함을 받고 조나라로 달아났다가 제나라의 공격을 받은 위태로워진 연나라 혜왕이 사죄하자 연, 조 양국의 객경을 겸임한 장군입니다. 제갈량은 문무를 겸비한 자만이 중원의 강자가 된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관중과 악의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서 부단하게 자신을 준비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17세에서 27세까지 10년간 유비에게 출사 하기 전에 꾸준하게 공부하며 사색하였는데 당시 그의 공부방법이 당대의 지식인들과 판이하게 달랐다고 합니다. 당시는 유교 경전의 내용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훈고학이 주류라 경전을 정밀하게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이 주된 공부방법이었음에 비하여 전체 내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둔 제갈량의 공부방법은 너무나 다른 방법이었다고 박광순은 제갈공명병법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갈량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었고 출사하기 전까지 이름 없는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나라의 조도일이 쓴 <진선통감>에는 제갈량의 공부방법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갈량이 형주에 있던 시절 수경선생 사마휘가 학업에 정진하라며 여남 영산에 은거하고 있는 풍구를 소개해 주었다고 합니다. 제갈량은 그곳에서 1년을 머물렀지만 풍구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앟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풍구를 항상 스승의 예로 대하였고 제갈량의 향학열의 진정성을 느낀 풍구는 그제야 삼재비록, 병법진도, 고허상왕 같은 숨은 책들을 주었다고 합니다. 제갈량은 100일 동안 3권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깨우칠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난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해결책을 얻을 수 있있다는 것입니다. 제갈량의 공부법은 전체의 흐름을 읽고 그 속에서 문제점과 해답을 찾는 방법으로 주입식과 암기식의 일반적인 공부방법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융중에서의 10년은 제갈량이 지식과 지혜를 기르는 시기였고 제갈량은 천시를 기다리며 유비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기다리며 유비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자신의 정치적 무게를 높여가는 시간을 만들어갔다고 생각됩니다.     


3. 제갈량의 first step 첫걸음

    

조조가 환관의 손자로 인식되던 자신에 대한 세평을 바꾸고자 허소를 찾아가서 월단평을 얻는 것이 first step라면 제갈량은 학업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였습니다. 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제갈량의 동문이었던 서원직은 그를 유비에게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 장군께서는 몸을 굽혀 수레로 찾아가야만 합니다.“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에게 말하기를 ”유학자나 속인이 어찌 시국의 중요한 일을 알겠습니까? 시국의 중요한 일을 아는 자가 영걸이고, 와룡과 봉추가 그런 인물입니다. “     

 

고향인 서주에서 타향인 형주로 이주하고 난 뒤 제갈량은 혼맥을 통하여 형주의 명사들과 친교를 맺어나갔습니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큰누나는 괴월, 괴량으로 유명한 양양의 명문가인 괴씨 가문의 자제인 괴기와 결혼하였는데 괴기는 훗날 위나라 소속으로 일하다가 촉의 장수 맹달에게 패해 전사하였습니다. 작은누나는 양양의 명문 귀족이며 명성이 높은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과 결혼하여 봉추로 알려진 방통의 사촌형수가 되었습니다. 9살 나이 어린 제갈균은 계모의 아들인 이복동생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그 사실여부는 불확실하며 역시 형주 양양의 명문가인 임 씨와 결혼을 하면서 형주지역사회에 인맥을 형성하였고 훗날 제갈량과 함께 촉에서 고위직에 임용됩니다.     


 제갈량 자신은 장인인 황승언이 자신의 딸을 소개하면서

”그대가 부인을 고른다고 들었소. 내게 못난 딸이 있는데 노란 머리에 얼굴이 검지만 그 재주가 서로 배필이 될 만하오. “

 제갈량이 그 자리에서 혼인을 승낙하여 제갈량은 양양의 상류 귀족층에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공명의 부인 고르는 것은 배우지 마라. 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게 되었다"라고 조롱하였으나 제갈량은 괘념치 않았다고 한다. 장인인 황승언은 형주태수 유표와 동서지간이었고, 유표와 황승언의 처남인 채모는 유표 시절에는 강하, 남군, 장릉 태수를 지냈으며, 조조에게 항복한 이후에는 진남대장군군사를 거쳐 한양정후 등 높은 관직에 봉해졌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반간계에 의하여 장윤과 함께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유비를 괴롭히던 채모를 보기 싫어했던 나관중의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합니다.  

    

형주에서 학문과 사색을 통하여 때를 기다리며 형주의 유력한 가문과 혼맥을 이어가던 제갈량은 주도권을 장악하고 몸값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주변에 출사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퍼트리면서 자신의 미래를 의탁할 주군을 물색하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 제갈량이 사는 형주의 태수 유표는 장인 황승언과 동서지간이나 난세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므로 제외하였고, 둘째, 조조는 세력이 강대하나 서주 대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제갈량에게는 거부감이 있었으며, 이미 그의 수하에는 수많은 책사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셋째 손권 밑에는 친형 제갈근이 있어서 소개해줄 수는 있었겠으나 손권은 자신에게 모든 대권을 맡기기에는 기존의 토착 호족세력들의 기반이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훗날 이궁의 변에서 나타나듯 손권의 성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유비가 자신의 융중대의 초막으로 삼고초려하여 그 은혜에 감동하여 북벌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긴다고 주장하였으나 당대인 삼국시대에 쓰인 어환의 <위략>과 서진시대에 쓰인 사마표의 <구주춘추>에는 제갈량이 조조의 침공 가능성이 있음을 보고 유비를 먼저 찾아가 돗자리를 짜며 시간을 보내는 유비에게 형주에는 호적이 유실되어 쓸만한 인적자원이 사장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사전에 호적을 재편하라고 권고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유비에게 보여주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비 진영에 참여할 경우 가장 큰 문제가 당연히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관우와 장비의 텃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비가 제갈량을 찾을 때 제갈량이 <양보음>을 노래 부른 것은 유비에게 앞으로 관우와 장비의 단속을 잘해달라는 일종의 메시지 전달 차원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훗날 유비와 제갈량 사이를 질투하는 관우와 장비에게 ‘수어지교(水魚之交)’라며 자신이 제갈량을 만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였던 유비의 상황을 미리 예측하였다는 것입니다.    

  

양보음의 양보는 태산(太山) 아래의 작은 산의 이름으로 매장지로 사용되는 곳으로 양보음이라는 노래는 일종의 장례식 노래인 만가(晩歌)라고 합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이었던 안영이 복숭아 2개를 제나라 경공에게 올리면서 제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2명이 나누어 먹도록 제안하였다는 것이다. 마침 고야자가 없는 사이에 전개강과 공손접이 마땅히 자신들이 먹어야 한다고 먹어치웠는데 돌아온 고야자가 이를 규탄하자 먹은 2 사람이 수치를 느끼고 자결하였고 이에 상심한 고야자도 자결하자 안영은 이 3 사람 후임으로 사마양저를 추천하여 제나라를 부흥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3명의 용사의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안영의 지혜로움을 노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가 한때 태산군의 승이라는 벼슬에 있었고 그곳이 옛날 제나라 수도인 임치와 가까워 어린 제갈량이 이 지역 민요인 양보음을 고향을 생각하며 불렀을 것이라고도 의견과 한나라 명사들이 환관과 적신들의 금고 형벌 때문에 절개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을 슬퍼하는 노래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국정 방향에 맞지 않으면 제거되어야 한다는 냉정한 진리를 유비에게 풍간하는 제갈량의 관우와 장비를 통제하여 달라는 의도라는 의견도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제갈량은 융중대에서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하여 유비를 감동시켰습니다. 유비는 한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이 있고 관우와 장비라는 만인을 상대할 수 있는 장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부릴 수 있는 전략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천하삼분지계는 진한시대의 책사인 괴통이 한신에게 제나라 산동성을 탈취하여 유방과 항우에 대항하여 제3세력으로 자립할 것을 권고하면서 처음 등장한 이론인데 정작 한신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남기고 여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후한의 혼란 시기에 오나라의 감녕과 주유, 형주의 방통, 익주의 법정 모두 비슷한 전략을 구상하였고 노숙은 천하이분지계를 구상하였지만 현실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현실에 반영하면서 역사를 추진한 사람은 오직 제갈량이 유일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제갈량은 난세에 조실부모하여 타향에서 생활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인 한나라 부흥을 위하여 중간 목표로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하였고 이를 실천하는 첫걸음으로 먼저 형주의 지식인 사회에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고 자신의 형제들을 양양의 명사들과의 정략결혼을 통하여 인맥을 형성하고 수많은 천하의 영웅들 중에서 유비를 선택하여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면서 주도권을 형성해 나가면서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여는 핵심 브레인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제갈량의 사당이 서울의 남산과 용산의 보광동에도 남아있습니다. 고려 시절에 문인 이제현은 직접 아미산에 들려 제갈량의 사당에 참배하고 <제갈공명사당>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에 피난한 선조(宣祖)는 평안도의 와룡산에 제갈량을 모시는 무후묘를 세우도록 지시한 바도 있습니다. 


청나라 시절 궁정 작가들은 삼국지 스토리를 배경으로 <정치춘추>라는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스토리를 손질하여 도원결의를 차용하여 만주족을 유비로 몽골인을 관우로 삼아 형제임을 약조하면서 유비와 그의 아들인 유선에게 충성을 다하는 제갈량이야말로 만주족 통치자들 입장에서 널리 홍보하고 찬양할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과 맹획의 칠종칠금의 스토리와 거리상 상당한 차이가 있는 지역인 운남과 미얀마 지역에서도 제갈량 관련 유적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지역의 역대 지배계급이 제갈량의 권위를 차용하여 자신들을 치장할 현실적 필요가 있었고 이는 <삼국지연의>와 <삼국지>의 차이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고 2018년 정면은 주장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비가 세운 나라 이름은 한(漢)이지만, 당시 진나라는 한(漢), 위(魏), 진(晉)의 법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한서(漢書)가 아닌 촉서(蜀書)로 기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 현실적 제약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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