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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04. 2022

누가 관우를 신으로 만들었나요?

 서울의 동묘라는 지하철역 이름은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삼국지의 관우가 어떻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지하철 이름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42호로 등록되는 일이 생겼을까요? 누가 조선의 수도 한양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관우 묘의 명칭은 우리나라에서는 관왕묘, 관후묘, 관성묘,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 왔고 조선 전역에 모두 27개가 건립되었다가 현재는 전국에 14곳이 남아있습니다. 최초의 관우 묘는 누가 세웠을까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5월에 남대문 밖에 관우 묘를 세울 당시의 기록을 보면 마치 축제 분위기에서 관우 묘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시절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유격장군 진인이 울산성 전투에서 왜적의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고 한양에서 치료를 받아 완쾌되었는데 회복과정에서 관우 장군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관우 장군에 대한 신앙은 진인 뿐만 아니라 다른 명나라 장수들도 마찬가지여서 비슷한 시기에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고금도 등에서도 관우 묘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황제인 신종 만력제가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도 관우에 대한 뜨거운 신앙을 가진 황제였는데 이는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 주원장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황제가 되는 최후의 결전을 파양호에서 벌였는데 그때 진우량과의 싸움에서 관우의 도움을 받고 이기게 되었다고 굳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로부터 전래된 관우 신앙은 조선 선조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왕조 시절 4단계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첫째, 선조에서 현종까지는 소극적 관망기로 선조는 임진왜란에 출병한 명나라 장수들의 권유로 관우 묘의 건립과 참배까지는 하였지만 이후 광해군에서 현종까지의 왕들은 참배도 하지 않고 배척도 하지 않는 관망기였습니다. 하지만 중국과의 사대관계에서 관우 묘는 중국 사신이 오면 필수 방문코스였으므로 기본적 관리는 유지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둘째, 숙종부터 정조까지는 적극적 활용기로 숙종이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태자로 세우는 문제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결국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서인들을 숙청하는 기사환국을 거치면서 숙종은 충(忠)의 이념을 강조할 목적으로 관우 묘에 관심을 기울였고 왕권이 약한 경종 시절이 지나자 영조는 관우 묘의 제사를 정식 국가행사로 삼았며 관우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조도 관우 묘 제례 음악인 제례학도 발전시키면서 왕권 안정에 관우 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셋째 순조에서 철종까지는 수동적 답습기로 이 시기는 세도정치가 극성이던 시절이라 왕권이 허약하였고 안동 김 씨를 비롯한 풍양 조 씨 등 세도정치의 주인공들은 관우에 관심이 없었고 단순히 선왕들이 제정한 의례를 답습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넷째, 고종 시기는 능동적 수용기로 고종 자신이 관우의 영험을 체험하였다면서 관우 신앙에 가장 관심이 많은 왕이었습니다. 고종은 즉위 초부터 관우 묘에 자주 행차하였고 1883년 민비가 북묘를 세웠고 1902년 고종의 또 다른 비인 엄비가 서묘를 건립하여 동서남북에 관우 묘를 세웠고 관우의 봉호를 황제로 승격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을사보호조약 이후 조선왕조의 권력이 상실되면서 1908년 국가 제사가 폐지되었고 북묘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서묘는 경성 고아학교가 세워지면서 사라졌습니다. 1920년도에는 박기홍과 김용식이 관성교라는 교단도 만들고 활동하면서 1928년도에는 일제가 조사한 유사종교 순위에서 천도교를 이어 2위를 차지하였고 1933년에는 천도교와 거의 교세가 비슷한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남묘를 매각하려고 하였을 때 상인들이 화교와 합세하여 저지하였다는 당시의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관성교를 믿는 사람들은 관우 신앙을 사업 번창과 병마 퇴치, 자손 출생 등에서 최상의 신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중국으로 진출하자 자기 땅도 보호해주지 못하는 관우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지 회의하는 시각이 늘어갔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프로그램이 한국인의 문화와 사상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었고 춘원 이광수가 관우 현상을 미신이라고 부정적으로 본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관우를 미신으로 여기며 타파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부정적 시각 등이 영향을 주어 점차 그 힘이 급격하게 사라져 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유비의 동생이자 신하였던 관우가 어떻게 신으로 대접받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무엇이 관우의 어떤 점이 중국인들을 매혹시켰을까요?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는 촉서에서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등 5명의 오호대장군을 관장마황조전의 한 편으로 구성하면서 관우를 선두에 배치하였습니다. 정사에 나오는 관우의 삶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원래 소금 산지로 유명한 하동군 해현 사람으로 고향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하여 유비와 장비의 고향인 탁군에서 의형제가 되어 평생을 함께하였습니다. 200년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유비는 원소에게로 도망가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혔지만 조조와 원소와의 싸움인 백마 전투에서 원소의 대장군 안량의 목을 베는 공을 세울 때에는 1만 명의 원소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넋을 놓고 관우의 위세를 구경만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조조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갔고, 유표가 있는 형주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적벽대전 후 유비가 익주를 점령할 때 관우는 형주를 책임졌고 219년 조인의 번성을 공격하며 우금을 포로로 잡고 방덕을 참수하는 공을 세웠으나 조조와 한 편이 된 손권에게 포로가 되어 아들 관평과 임저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삼국지 초반에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중반에 위, 촉, 오로 정리가 되다가 종반에는 사마중달의 진나라로 마무리되어 최후의 승자는 265년 사마중달의 손자가 세운 진나라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사마중달의 진나라는 그 후 동진으로 쫓겨가게 되고 420년 유우가 건국한 송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 왕조의 3대 황제 문제가 정사 삼국지를 읽다가 너무 간략하다며 배송지를 불러서 보충하라고 황명을 내리자 배송지가 150여 종의 사서를 읽고 정리하여 주석서를 발간하였다고 합니다. 황제인 문제는 배송자의 자가 세기(世期)인데 “배세기의 이름은 오래도록 크게 남을  것이다”라며 크게 칭찬했다고 합니다. 정사 등에서 관우의 분량은 대략 900자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배송지의 주석에서 관우에 관한 분량은 늘어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잡극이나 소설 등에서 관우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관우는 장군에서 출발하였지만 마지막에 신이 되어버린 존재입니다. 중국 역사에서도 어쩌면 유일한 케이스이고 이를 ‘관우 문화현상’이라고 부르며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형이자 황제였던 유비나 귀신을 부리는 재주를 지녔다는 공명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유독 관우만이 관왕이 되고 나아가 관제가 되었다가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인으로 신으로 숭배받으며 신성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2009년 남덕현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도 중국에서는 춘제(설날)를 포함하여 관우 화상을 벽에 붙여 놓고 예를 올리는 것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또한 관우 화상을 살 때에는 절대로 ‘산다(買)’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청해서 모셔온다(請)’고 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숭배받고 있습니다. 중국의 민간 신앙으로 관우상은 음식점이나 찻집 입구 등에서 쉽게 눈에 띄고 도교 사원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 재물신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가게 입구에 관우 화상을 모셔놓고 돈이 펑펑 쏟아지게 해 달라며 ‘텐텐파차이(天天發財)’나 ‘복(福)’이라고 적힌 문구를 붙여놓고 있습니다. 해외의 화교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관제묘들이 세워져 있고 중국인들은 관우상을 발견하면 무조건 향불을 피우고 ‘재물과 복’을 구한다고 합니다. 재물신으로는 문신 출신의 비간과 범려, 무신 출신으로는 조공명과 관우가 있는데 관우가 가장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비간은 포악한 은나라의 마지막 주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심장이 꺼내지는 형벌을 받은 충신인데 사심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고 범려는 월왕 구천의 신하로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운 후 월왕 구천을 떠나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던 도주공으로 불린 인물입니다. 조공명은 악신으로 등장한 신화적 존재인데 명나라 봉신연의라는 소설로 유명해진 존재로 명나라의 상업이 발달하면서 신적인 지위로 승격되었습니다.       


살아생전의 관우는 유비 수하의 한 장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전문가들은 관공 신앙은 수나라 당나라 시절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위진남북조 시절부터 향토색이 짙은 촌락 공동체 정신이 약해지면서 마을 수호신 신앙이 사라지게 되었고 시대의 혼란으로 많은 유랑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 이주민들이 형주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면서 형주 근처에서 사망한 관우를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관우의 신격화가 시작되었고 관우를 믿는 민간신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당나리에서는 불교가 절정을 이루었는데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불경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관우에 관한 전설을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도교가 당나라 황실 차원에서 믿는 국가 종교가 되면서 관우가 도교의 한 신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송나라 시대가 되면서는 삼국지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민간에서 분위기가 뜨면서 송나라에서는 왕조 차원에서 신격화가 시작되면서 국가 호국의 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시호가 내려지고, 높게 받들어지다가 휘종 시절에 왕조 재정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산서성의 염지의 소금 생산량이 줄어 고민하는 황제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고향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겠다”라고 나섰다고 하였고 관우의 호언장담대로 문제가 풀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 관우는 소열무안왕으로 왕의 작위를 받게 되면서 한 단계 올라가게 됩니다.      


몽골족 정권인 원나라 왕조에서는 한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공 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원나라 황실에 의한 신격화가 민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관우 사당이 20여 곳에서나 세워지게 됩니다. 명나라 시대에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출판되고 정식으로 관제묘에 매년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제도화되었습니다(1477년). 또 임진왜란 시절의 황제인 신종 만력제(1594년)는 관우를 매우 존경하던 황제였으므로 드디어 관우는 왕에서 황제가 되었습니다. 청나라 시절에는 모종강 부자가 삼국지연의를 새롭게 정비한 개정판을 내면서 더욱 완벽한 관우 현상이 나타났고 청대에는 각지에 관우 사당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관우 숭배 분위기가 최고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에는 “천하 어디를 가나 관제묘가 있네. 궁핍한 변방과 몇 가구뿐인 작은 마을에도 아름다운 관제묘가 있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신중국이 되면서 관공 신앙은 쇠퇴하였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모든 관우 묘들이 문을 닫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다시 관공 신앙도 부활하였으며 현재 중국에는 약 2000여 곳에 관우 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런 관우에 대한 신격화 과정에서 삼국지의 스토리가 어떻게 가필되고 삭제되어 나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 관우의 용맹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유비가 여포와의 싸움에서 함께한 조조의 품을 떠나  원술을 공격한다며 탈출하여 서주를 차지하면서 조조가 파견한 장수인 차주를 관우가 죽이는 장면과 조조가 보낸 장료의 권유로 항복한 관우가 조조의 부름을 받아 원소가 자랑하는 맹장 안량의 위세에 조조의 부하 장수들이 모두 숨죽이고 있을 때 관우가 일기토 하면서 원소의 안량을 한 칼에 죽이는 전투 장면,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로 가던 길에 장비를 만나 조조에게 항복한 것으로 의심하는 장비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마침 지나가는 조조의 수하 장수 채양을 한 칼에 죽이는 장면, 형주에서 위나라의 번성을 공격하다가 우금의 부하 방덕이 관을 메고 와서 싸움을 거는 것을 수공 작전으로 우금을 포로로 하고 방덕을 죽이는 모습 등에서 관우의 용맹과 지략이 강조되었고 화살 독으로 고통받는 관우의 팔을 수술하는데 관우는 의연하게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극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시대에 맞지 않게 화타가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으로 멋있게 윤색되었습니다.     

  

둘째, 부정적인 요인으로 관우의 완전한 인격 조성에 해가 되는 사건은 사라졌습니다. 관우가 유비, 장비와 태행산에 가서 산적이 되었던 사건은 삭제되었습니다. 조조가 하비성의 여포를 공격할 때, 여포의 부하 중에 진의록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포의 사신으로 원소에게 갔다가 그곳에서 한 황실의 여자와 결혼하였고 하비성에는 전처인 두 씨 부인이 진랑이라는 아들과 조용하게 살았는데 미색이 유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관우가 성이 함락되면 두 씨 부인을 자신에게 달라고 청을 하여 조조도 승낙하였는데 막상 성이 함락되자 조조가 약속을 어기고 부인을 차지합니다. 관우는 인간적으로 분노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던 사건은 축소된 느낌이 듭니다. 훗날 역사 기록에 의하면 진의록은 훗날 장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조조의 양자가 되었던 진의록의 아들 진랑은 조조의 손자 명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됩니다.        


셋째, 원래 이야기가 관우답지 않은 관우 이야기가 있으면 내용이 수정되어 버렸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이야기는 관우의 명성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항복한 이야기가 관우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자 삼국지연의의 작가는 스토리를 고쳐 관우가 유비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유비가 관우에게 “그대가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이라면, 기꺼이 그대에게 내 목을 바칠 터이니 온전히 공을 세우라”는 편지를 진진 편에 보내니 관우는 유비에게 “지난번 하비성을 지킬 때, 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밖에는 원병이 없어 죽으려 했사오나, 두 분 형수님이 계신 까닭에 감히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잠시 조공에게 의탁하여 후일을 기약한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추가하여 항복한 관우의 과실을 아름답게 만들고 관우의 ‘충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냅니다.      


또 장료가 관우에게 죽음으로 충절 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는 장면을 창조합니다. 여기서 관우가 죽으면 안 된다면서 항복하면 3가지 기회가 생긴다고 설득합니다. 첫째, 유비의 두 부인을 지킬 수 있고, 둘째, 도원결의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게 되고 셋째, 후일에 유용한 몸을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인 장료의 충고를 듣는 관우는 그 상황에서도 신중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관우는 마지막까지 정정당당한 대장부의 모습을 지키고 대의명분을 지킨 의인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는 이에 더하여 관의의 충의정신을 더욱 부각하기 위하여 “삼약(三約)”도 구상해 냅니다. 첫째, 한나라에 항복하지만 조조에게는 굴복하지 않는다. 둘째, 두 부인에게 봉록과 안전을 제공할 것, 셋째, 유비의 행방을 알면 바로 떠나게 해 줄 것 이 삼약을 통하여 관우는 전혀 초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투항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관우 현상을 만들기 위하여 삭제, 과장, 강화의 기법을 사용하고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적토마와 청룡언월도가 시기와 시대에 맞지 않게 등장하게 되고 반동탁 연합군이 여포의 부하 화웅 앞에서 고전하다가 관우가 조조가 건네는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을 베어 오는 장면은 실제로는 손견의 공적이고, 화용도에서 조조를 관우가 풀어주는 장면은 작가가 관우가 의리를 중시하는 면모를 부각하려고 의식적으로 조조를 놓아주었다는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 장사성에서 관우가 황충과 무예를 겨루다가 황충을 풀어준다는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는 정사에서의 원문에 기록된 위질(委質)이라는 표현은 귀순했다는 의미이고 황충이 지키는 곳은 장사성이 아니라 유현으로 장사 전투를 위하여 일부러 전출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참전할 이유가 없는 지역으로 관우와 황충의 전투 장면은 허구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특히 위연이 황충과 함께 항복했다고 삼국지연의에 나와있지만 정사에서는 “부곡으로 선주 유비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로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부곡이란 공식 군사조직이 아닌 개인이 조직한 군대를 의미하여 위연의 출신이 비천함을 알 수 있고 위연은 유비가 개인적으로 양성한 사병에 속한 병졸이나 하급 군관일 뿐 결코 항복한 장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의 관우는 미인을 보면 욕심을 내고, 한중 장로 밑에 있다가 귀순한 마초에게 경쟁심을 느끼다가 마초는 장비와는 동급이지만 관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공명의 편지를 연회를 열어 찾아온 손님들에게 두루 자랑하는 성격이며 황충과 동급의 대우를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면서, 여몽과 육손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가진 장군일 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의 필요와 황제의 관점에 따라 관우에 대한 우상화는 점차 심화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영웅 만들기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역사적 팩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의도와 영향을 바로 아는 것도 깨어있는 삶을 위한 자세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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