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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0. 2022

천하무적 관우가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가?

삼국지에서 관우는 일개 마궁수에서 출발하여 이름만으로도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대장수가 되었습니다. 간웅으로 알려졌으나 인재를 아끼는 조조가 탐을 냈었고, 손권이 사돈을 맺으려고 청하였지만 관우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주유는 관우와 장비를 곰과 호랑이와 같은 장수라고 평가했고 곽가와 정욱은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장수인 만인지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관우의 충의와 절제, 강직함과 용맹함, 그리고 자기 통제와 쉼 없는 자기 계발은 관우를 시대의 영웅의 지위에까지 올렸으나 관우는 절정의 순간에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하였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는 평가처럼 관우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관우의 성공은 그를 아집에 사로잡히고 거만하게 만들었고 양날의 칼처럼 그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관우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살펴보면 가장 자신만만한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승승장구할 때에도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현명한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청년 잡스가 1977년 애플을 출범시키고 25세인 1980년 기업공개를 하였을 때 자신이 처음 만든 회사에서 백만장자를 300명이나 탄생시키며 승승장구했지만 1985년 자신이 2년 전에 영입한 펩시의 부사장 출신의 스컬리에게 애플에서 쫓겨나는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였습니다. 젊은 잡스에게는 와신상담 후의 화려한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위와 오의 연합작전으로 손권에게 죽임을 당한 관우와 촉의 멸망과 함께 방덕의 아들 방회에 의하여 멸족이 된 관우의 후손들에게는 후반전은 없었습니다. 다만 삼국지에서도 화려한 정점에서 비류직하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관우 일족에게 중국 민중들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시선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19년 유비는 생애 처음으로 조조에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중을 점령하였습니다. 내친김에 한중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관우는 이보다 앞서 218년 이미 북벌을 시작하여 220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항상 승리하였습니다. 218년에 후음이라는 자가 조조가 다스리는 남양 태수를 사로잡고 반란을 일으킬 때 의지하였던 것은 조조의 군대가 두렵지만 관우의 북벌군이 이미 출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19년 7월 관우는 번성을 포위하였고 조인을 돕기 위하여 파견된 우금의 군대를 8월 홍수를 이용하여 장수인 우금과 방덕을 생포하였습니다. 위나라의 형주자사와 남향태수가 관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10월에는 윤혼현의 백성이 관리를 살해하고 관우에게 내응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관우의 위엄은 위나라의 중원에까지 퍼졌고 놀란 조조는 한중군에서 유비와의 전투를 포기하고 낙양으로 돌아와 수도를 후방으로 옮기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조조의 모사인 사마의와 장제는 조조를 만류하였습니다.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는 친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소원합니다. 관우가 승리하여 잘되는 것을 손권은 결코 원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사람을 손권에게 보내 관우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고 그 대가로 형주의 장강 이남 지역을 그의 식읍으로 봉하면 번성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고 말하였고 그 이후의 결과는 사마의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군사전략에 있어서 탁월하였던 모택동은 15년간 자신의 경호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마지막 경호실장이었던 이은교에게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에 대하여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 그 근거로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 일과 마속에게 가정을 맡긴 것을 예로 들었다고 합니다. 관우는 오만하였고 동오를 무시했는데, 제갈량의 동오와 연합하여 조위에 대항한다는 전략방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형주를 잃었고 그 자신도 동오에 의하여 패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관우가 뛰어난 장수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인물, 특히 동맹국인 오나라의 인물들을 소인배로 간주했으며 그들을 무시하다 보니 합당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조조는 적이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손권을 과소평가하다가 손권의 포로가 되었고 손권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관우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속되지 않았지만 머리와 몸통이 따로 묻히면서 두 개의 무덤이 생기게 되었고 촉이 망한 후 그의 후손들은 방덕의 아들 방회에 의하여 모두 몰살을 당하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우의 마지막이 비극적이었고 후손들의 삶이 처절한만큼 중국 민중들의 가슴속에 깊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위안도 제갈량이 형주 수비를 관우에게 맡긴 것은 엄청난 실수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제갈량은 관우가 정말 형주를 지켜낼 수 있는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한 번 검증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형주를 단순하게 수비만 하는 것이라면 조운에게 맡겨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조운의 치밀함과 차분함 그리고 뛰어난 전략 수행 능력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안정적으로 형주를 지켜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전략적으로 진격이 필요한 경우에도 단독으로 수장의 역할을 맡을 능력을 조운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갈량은 마량, 이적 향랑, 미축 등의 문관과 미방, 요화, 관평, 주창 등의 무관을 형주에 남기고 자신은 유비의 서천의 공략을 위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유비가 유장에게서 서천을 점령한 뒤 관우에게 사자를 보내 황금 500근과 은 1000근, 돈 5000만 냥. 그리고 채색 비단 천 필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관우는 더없이 기뻐하면서도 사자에게 다른 장군들의 하사품을 물었습니다. 사자는 제갈 군사와 법정, 장비 장군, 조운 장군, 마초 장군과 동등한 재물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관우는 장비, 조운, 제갈량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으나 마초와 법정이 자신과 같은 급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낯빛이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관우는 아들 관평을 불러 큰아버지인 유비에게 마초와 무예를 겨루고 싶다는 의사를 아뢰고 오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유비는 당황하였고 제갈량에게 의논하자 제갈량은 관평 편에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장군께서 마초와 실력을 겨뤄보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초가 용맹함이 대단하나 그래 봐야 서한의 경포나 팽월 정도의 수준입니다. 장비와 견줄만한 실력이긴 하나 미염공(관우의 별명)을 상대하기엔 아직 한참 부족한 자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신경 쓰실 일은 형주 수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만약 서천에 온 사이 형주를 빼앗기기라도 하면 그보다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판단해주시길 바랍니다. "

  

제갈량의 이 편지는 관우에게 승리감, 만족감, 자부심을 안겨주었으나 관우의 안하무인의 성격을 더욱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왔습니다. 관우의 거만함이 커질수록 제갈량이 관우에게 신신당부했던 동오와 연합하여 조위에 대항한다는 촉한의 기본전략은 관우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유비가 서천을 함락시키자 손권은 이제 형주를 돌려달라고 제갈근을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제갈근은 제갈량에게 눈물을 보였고 오나라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우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유비는 형주의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돌려주라는 편지를 관우 앞으로 작성해서 제갈근에게 주어 보냈지만 손권의 부하들은 관우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눌려 두려움 속에 도망칠 뿐이었습니다. 노숙은 관우를 임강정으로 초청을 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술자리에 도부수 50명을 매복시켰으나 관우는 주창만을 데리고 홀로 오나라 진영을 찾아와서 연회를 마치고 노숙을 인질로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관우는 오나라를 더욱 우습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갈수록 이 세상에 자신을 대적할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거만의 씨앗은 사간이 흐를수록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 이미 관우의 머릿속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은 것은 꼭 나쁜 일이 아니지만 행운이 너무 자주, 계속해서 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면 이는 불길한 징조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혼자서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보면 스스로를 행운아로 여기며 ‘내가 하면 무엇이든 다 된다’라는 착각 속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임강정에서의 일은 관우의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하는 분수령과도 같은 사건이었고 이날 이후 관우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우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갈근은 관우의 딸과 손권의 세자와의 혼담을 주선하겠다고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손권에게 ”관우가 혼사를 받아들이면 그와 힘을 합쳐 조조를 공격하시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조조와 힘을 합쳐 형주를 빼앗으십시오. “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손권이 제후에 불과한 관우에게 혼사를 청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관우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손권의 최대의 적이 조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손권의 승낙을 얻어 관우를 찾아간 제갈근은 혼담을 제안하였습니다. 손권이 강동의 지배자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제안한 이 혼담을 듣고 관우는 ”감히 내 여식을 손권의 아들과 엮으려 하다니 더 이상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그대 아우만 아니었어도 지금 당장 그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오! “     


오만한 관우는 편견에 사로잡혀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무능한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귀한 여식을 손권에게 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손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손권은 강동 6군과 81주를 다스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우는 유비 휘하의 제후에 불과한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관우가 이 혼담을 거절했다는 것은 관우가 제갈량이 신신당부했던 동오와 손을 잡고 조위에 대항하라는 촉한의 대외 전략을 무시했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에 손권은 보즐의 제안에 따라 조조와 연합하여 관우를 공격하는 대외관계의 방향 전환을 단행하였습니다.      


조조가 거병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제갈량에게 의견을 구하였고 제갈량은 관우에게 번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조조의 기세는 저절로 꺾일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동안 관우가 손권의 혼사를 거절하고 모욕감을 준 사실과 이로 관우에게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유비는 사마 비시에게 고명을 들고 관우에게 출병하는 명령을 전하라고 하였고 사신을 맞이한 관우는 연회를 열어 사마 비시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날 형주성 밖에 주둔한 부사인과 미방의 선봉 부대에서 술을 마시다가 실수로 초를 떨어뜨려  막사에 화재가 일어났고 불길에 화포가 폭발하여 병사들이 불에 타 죽은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관우는 미방과 부사인을 불러 질책하며 당장 참수하겠다고 하였지만 사신으로 온 사마 비시가 다급하게 관우를 말리며 달랬습니다. 관우는 사마 비시의 충고를 듣고 각각 곤장 40대의 형벌로 감형하고 미방과 부사인을 각각 남군과 공안 수비로 임무를 교체하였습니다. 관우는 선봉을 요화에게 맡기고 관평을 부장군으로 삼았으며 자신은 중앙군을 통솔하고 마량과 이적을 참모로 삼았습니다. 출병 전의 화재사고는 부대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고, 관우와 두 장수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으며 출정 후의 형주 수비에도 큰 구멍을 생기게 하였습니다.      

천위안은 조조와 손권이 연합하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갈량이 서천에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위연 등 맹장들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관우의 능력을 믿고 형주에 지원병력을 보내지 않은 제갈량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출병을 하러 나선 어느 날 관우는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합니다. 소처럼 큰 검은 돼지가 자신을 덮친 뒤 발을 세게 물어뜯는 꿈이라는 것입니다. 관우는 아들 관평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관우는 관평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구나.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더 이상 전쟁터에서 싸움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 관평은 이를 듣고 ”아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돼지는 용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이 발을 물었다는 것은 높이 날아오른다는 의미이니 이는 필시 길조일 것입니다. “ 관평의 이런 말은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선택해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심리 패턴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아주 객관적으로 이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머릿속 생각은 어떤 특정 대상에 편향되어 선택적 투사를 하게 되면서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도 그 해석을 자신이 기대하는 방향에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침 이때 유비의 사자가 도착하여 관우를 전장군 가절월로 임명하였습니다. 가절월이 갖는  의미는 형양 9군에 대한 전권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부하들은 관평의 해몽이 옳았다고 그의 식견을 극찬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동탁이 죽기 전 꿈에 용 한 마리가 자신을 휘감는 꿈을 꾸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동탁에게 왕윤이 황제 등극을 위한 단상이 이미 지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아흔이 넘는 노모가 최근 살이 떨리고 마음이 불안하다며 아무래도 불길한 징조 같다고 하였지만 동탁은 자아도취에 빠져 위급함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동탁은 이를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예지몽으로 해석하고 기뻐하는 쪽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가절월은 유비는 관우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동안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 달래주려는 마음으로 보냈는데 가절월의 월은 황제의 신분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절은 아랫사람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이며 가는 임시로 위임한다는 의미인데 가절월이 내린 사실에 모두들 관우에게 축하는 분위기였으나 미방과 부사인에게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가절월이 없는 상태에서는 미방과 부사인에 대한 처형은 유비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 했지만 가절월이 내린 상태에서는 관우가 독단적으로 미방과 부사인을 참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므로 이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현실이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관우의 출병에 대하여 조조는 위기에 처한 조인을 돕기 위하여 우금을 보내기로 하고 방덕을 선봉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우금은 방덕의 주인이었던 마초가 유비 밑에서 오호대장군이고 방덕의 형 방유도 유비의 신하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자 조조는 즉각 교체하려고 하였으나 방덕의 목숨을 건 결기를 보여주자 그대로 강행하였습니다. 조조는 의심도 많은 인물이지만 나름 대범한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관우와의 싸움의 결과 조조의 정예군은 패배하였고 장수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관우의 수공 작전으로 포로가 된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을 하였지만, 방덕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였고 관우의 손에 참수되었습니다.     

 

관우의 상승세에 조조는 천도까지 고민하였지만 사마의는 손권과의 동맹을 제안하였고 관우가 예상하지 못했던 조조와 손권의 동맹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형주 공략을 책임진 오나라의 여몽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관우가 형주에서 출병하면서 만들어놓은 20~30리 간격으로 세운 봉화대였습니다. 여몽은 형주를 함락시킨다고 하여도 봉화대가 있는 한 관우가 며칠 내로 들이닥칠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었고 여몽의 이 고민을 해결한 인물이 육손이었습니다. 육손은 여몽의 고민을 예측하고 여몽에게 찾아왔습니다.      


”지금 관우는 거만해질 대로 거만해져 스스로 천하무적이라 자부하고 있을 겁니다. 소인이 오나라의 신입 도독으로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교만함을 부추기면, 관우는 분명히 소인을 하찮게 여겨 형주를 지키는 병사들을 옮겨 번성 쪽에 병력을 늘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형주가 텅 비게 될 것이니 이때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습격하면 형주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육손의 계책에 따라 여몽은 병을 핑계로 도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육손을 천거하였습니다. 육손은 명마 한 필과 진귀한 비단 두 단의 선물과 함께 관우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통 써서 사자를 불러 관우 앞에서 반드시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관우는 사자를 만나 고개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한참을 웃었고 사자의 선물을 거둔 뒤 연회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거만한 사람은 언제나 거만함이 절정에 이를 때 실패를 겪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합니다. 관우는 육손의 예상대로 형주의 병력을 대부분 번성 쪽으로 이동배치하였습니다.      


여몽은 3만의 군사와 쾌속선 80척을 준비하였고 선발대로 10척을 보내 봉화대를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십 수년간 오나라가 절치부심하며 기다리던 형주가 함락된 것입니다. 여몽은 형주의 기존 관리들에게 기존 관직을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병사들의 약탈을 엄금하였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평민의 집에서 삿갓을 훔치는 병사를 잡고 보니 마침 동향의 병사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여몽이 병사를 참수하자 형주의 민심은 여몽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관우가 10년간 형주를 다시리며 엄격한 법 집행을 하였다면 여몽은 하룻밤 만에 형주의 민심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주를 점령한 여몽은 우번을 시켜 호형호제하던 부사인에게 보냈습니다. 관우의 출병하는 날 화재를 일으켜 관우의 처벌을 기다리던 부사인은 친구인 우번의 설득에 넘어갔고 손권은 항복한 부사인에게 그대로 공안의 수비를 맡겼습니다. 부사인은 손권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미방을 설득하여 손권에게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미방은 유비의 둘째 부인인 미 부인의 오라비였지만 미방은 자신이 유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섭섭했던 마음과 관우가 출병하면서 말했던 처벌에 대한 공포가 미방의 두려움을 자극하였고 결국 마침 찾아온 관우의 사신의 목을 벤 부사인의 설득에 넘어가 미방마저 손권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미방의 배신으로 관우가 죽자 유비의 창업공신인 미축은 스스로 몸을 묶고 유비에게 벌을 청하였습니다. 유비는 용서하였지만 미축은 번뇌 속에 죽고 말았습니다. 서주 최고의 부자였고 자신의 재산과 여동생을 유비에게 올인한 미축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이었습니다. 

     

형주가 함락되었고 부사인과 미방까지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우는 독화살에 맞았던 상처가 터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관우는 여몽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해보자는 조루의 의견에 따라 사신을 보냈지만 여몽은 이를 이용하여 관우의 사자를 환대하였고 관우와 함께 있는 장수와 병졸들의 가족들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가족들은 사자에게 자신들의 소식을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형주에서 돌아온 사자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관우를 비롯한 장병들에게 형주의 가족들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관우는 여몽의 계락이라며 화를 내며 사자를 꾸짖었지만 미처 사자의 입단속을 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였고 관우 수하의 장수들은 그를 통하여 가족의 소식을 듣고 하나 둘 이탈하게 되었고 급기야 여몽이 점령한 형주로 투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밤 관우, 관평, 요화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조의 정예부대 7군을 수몰시킨 관우의 부대가 순식간에 몰락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관우는 관평과 맥성으로 도주하였고 요화는 포위망을 뚫고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봉의 기억 속에는 과거 유비가 구봉의 외모를 보고 감탄하며 양자로 삼고 싶어 하며 양자로 맞이하는 의식을 진행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구봉의 성을 유 씨로 바꾸고 유비에게 절을 올려 부친으로 모시도록 하고 관우와 장비에게도 절을 시키고 숙부로 부르도록 하였을 때, 관우가 굳은 표정으로 ”형님께서는 이미 친자가 있는데 어찌 양자를 들이려 하십니까? 훗날 분명 분란이 생길 것입니다. “라고 반대하던 기억이 생생하였다. 유비가 유봉의 풍채와 기품, 총명함을 보고 양자로 삼으려 하였을 순간에 관우가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사실이 유봉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유봉은 맹달을 찾아가 상의하였습니다. 유봉이 맹달과 상의를 한 순간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습니다. 유비가 순조롭게 서천을 차지하게 되는 과정에는 익주 출신의 장송, 법정, 맹달 세 사람의 공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송은 내통한 사실이 발견되어 처형당하였고 법정은 유비에게 중용되어 승승장구하였지만 맹달은 유비의 관심에서 멀어져 유봉 밑에서 상용을 지키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맹달은 유봉에게 ”자네가 관공을 숙부로 생각하는 것처럼 관공도 자네를 조카로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며 ”관 장군이 언제 그대를 사람 취급이나 했소? “라고 질문하자 유봉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맹달의 말은 유봉의 복수심을 자극하였고 유봉은 요화의 원병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유비의 관점에서만 생각한 관우가 뿌린 씨앗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맥성을 지키는 관우에게는 500여 명의 병력만 남았으며 그마저도 태반이 부상병이었습니다. 그런 관우에게 제갈근이 나타나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화를 낼 것으로 예상한 제갈근에게 관우는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공께선 일개 병사에 불과한 나를 수족처럼 대해주셨소. 은혜 입은 처지에 어찌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적국에 투항하겠소? 성이 함락되면 죽는 일밖에 더 있겠소? 죽는 것이 뭐 그렇게 두렵겠소? 옥을 부술 순 있으나 그 절개까지 훼손할 순 없소. 육신은 죽어 없어져도 이름은 남아 있지 않겠소. 여러 말 말고 손권에게 가서 전하시오. 나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오. “      


관우는 관평과 조루 등의 장수와 병사 200여 명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가 돌진하였습니다. 30여 리를 달리니 산속 어디선가 북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매복병이 뛰쳐나왔는데 이는 오나라의 주연과 반장 등이 매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병들이 풀어놓은 올가미에 걸리면서 관우도 바닥에 나뒹굴어졌고, 관우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반장과 마충이 달려들어 관우를 붙잡았습니다.     


포로로 잡힌 관우에게 손권은 항복을 권하였지만 관우는 호통을 쳤습니다. ”파란 눈, 빨간 수염의 쥐 세끼 같은 놈, 내 너의 간계를 모를 것 같더냐!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에게 항복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      

관우는 손권에게 모욕을 주었고, 미방과 부사인에게 두려움을 주었으며, 유봉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었습니다. 여몽의 겉모습만을 보았고, 육손의 능력을 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관우는 신의를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긴 인물이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민중들과 상인들은 배신과 통수가 일상화된 난세에 젊은 시절 도원결의를 맺고 이를 평생토록 지켜온 유비, 관우, 장비의 모습에서 이상형을 발견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특히 몸은 당양에 묻히고 머리는 낙양에 묻힌 관우의 최후를 기억하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비극이 화려한 승전보 직후 조조가 위의 수도를 후방으로 천도하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의 절정 직후에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관우가 참수한 방덕의 아들 방회가 등애와 종회를 따라 촉나라를 공격하며 성도로 들어온 뒤, 복수를 위하여 관우의 일가족을 모두 몰살시켰다고 담양소의 2017년 책에도 기록되어 있고 그래서 관우는 지금까지 직계 후예가 남아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탄식하고 안타까워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무속신앙의 대상이 된 최영 장군은 고려말의 우왕의 장인이면서 이성계와 함께 무패의 장군이었지만 이성계에게 죄인으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유자광의 밀고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청년 남이 장군도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어 민중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게 된 것처럼 관우와 관우 후손의 비극적 최후가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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