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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0. 2022

동탁의 집권 성공 이유는?

 삼국지가 스테디셀러가 된 이유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즐기는 마음도 있지만, 수천 년을 사이에 두고서도 인간의 본성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 속에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014년 김재욱은 휴먼큐브를 통하여 <삼국지 인물전>이라는 재미있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32명의 대한민국 리더들을 삼국지 인물에 빗대어 설명한 것입니다. 이어 2017년 대선을 앞둔 2016년에는 <군웅할거 삼국지>에서 20명을 대상으로 비슷한 컨셉의 책을 다시 출판하였습니다. 2년의 시간 간격이 있었는데 대선 출마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였고 등장인물의 대폭 교체로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2002년에 다시 출판된다면 어떤 인물로 비유를 할지도 미지수입니다. 어쩌면 삼국시대처럼 대한민국의 현재도 난세이고 각자가 본성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근경과 원경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 또 변화됩니다. 노벨상을 만들어 칭송을 받고 있는 알프레도 노벨이 노벨상에 거액을 투자한 이유가 자신이 죽었다는 오보를 통하여 자신이 “죽음의 상인”이라는 악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극받아 제정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삼국시대의 빌런을 들라면 망탁조의 4명을 손꼽는다고 합니다.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 이 4명의 인물 중 왕망은 신, 조조는 위, 사마의는 진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였지만 동탁만은 실패하였습니다. 왜 실패하였을까요? 어떤 결함이 있었기에 황제가 되기 직전 극적으로 몰락하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후한말의 난세에 수많은 군웅들이 내심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면서도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주저할 때, 동탁은 과감하게 자신의 병력을 동원하여 낙양을 장악하고 환관과 외척의 싸움으로 혼란에 빠진 천하를 과감하게 정리하면서 당고의 금으로 출금된 사족들을 복권시키고 자신에게 출사를 꺼리는 채옹을 협박하여 어용 지식인으로 만들며 권력투쟁에 흔들거렸던 후한에 서량의 야전군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습니다.     

 

당나라가 성립된 다음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제왕의 일 가운데서 창업과 수성 중 어느 쪽이 어려운가?”

그때 방현령은 ‘창업’이라고 대답하였고 위징은 ‘수성’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당태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방현령은 나를 따라서 천하를 평정하고 구사일생으로 창업의 어려움을 보아왔다. 위징은 나와 천하를 안정시키면서, 부귀하면 방자해지고, 방자해지면 게으름을 피우고, 게으름을 피우면 멸망할 것을 무서워하여, 수성이 어렵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창업이 어렵다는 것은 과거의 일이다. 수성의 어려움을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신중하게 헤쳐나가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5천 년의 중국사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동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탁은 잔인하고 용맹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효웅이라고 불린 인물입니다. 후한 왕조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외척과 내시 같은 집단들은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힘을 길러온 동탁 앞에서 한결같이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급급하였던 왕조의 risk management를 등한시한 당연한 응보이며, 동탁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이제까지 숨죽이며 살아온 사족들을 등용하면서 그들의 호응을 유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동탁의 성공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장점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동탁은 능력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동탁은 서량에서 무관으로 활동하며 크고 작은 공을 세웠습니다. 동탁은 체력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였고, 양쪽에 화살통을 차고 말을 달리며 좌우 어느 쪽으로든 마음대로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환제(146~168) 말기에 동탁은 중국의 변경 서쪽과 북쪽에 위치한 6군(농서, 천수, 안정, 북지, 상, 서하)의 하나인 농서 출신으로 국가 차원에서 이곳 인재들 중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능한 자들을 군인이나 장교로 충당하는 제도인 ‘양가자’ 제도를 통하여 무장으로 출세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는 동탁과 서방의 강족과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탁은 젊어서 강인의 거주지에서 살았고 그들 추장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한 번은 강인들이 집에 놀러 오자 농사짓는 소를 죽여서 그들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강인들은 이에 감동하여 나중에 가축 1,000여 마리를 선물로 동탁에게 주었다는 일화는 그가 강인들의 언어에 능통하였고 뛰어난 처세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고 최진열은 ‘역사삼국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민족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중용되었던 동탁은 한양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인들을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종으로 발탁되고, 그 포상으로 비단 9,000 필을 하사 받았는데 동탁은 이를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 이 포상은 나에게 주신 것이지만, 본래는 너희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동탁의 이런 행동이 계산된 거인지 어떤지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적어도 주변에서는 동탁을 협기가 있는 인물로 평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후한서의 열녀전에 등장하는 후한의 무장인 황보규의 아내가 과부 시절 동탁을 꾸짖으며 “너는 강호의 종자인 주제에 천하에 해를 입히는 것이 어찌 이토록 끝이 없단 말이냐!”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동탁이 혈통상 강인의 후손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욕설로서의 의미만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사실과 함께 훗날 동탁의 부하 우보의 부하로 있다가 이각, 헌제, 단외, 장수, 조조, 조비를 섬긴 가후처럼 동탁은 유교적 관점이 아닌 마키아벨리적 관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두 가지만 기억하자. 상대의 욕망과 두려움 이걸 파악하고 정확히 그곳에 당근과 칼을 찔러 넣자.”는 사고방식을 가졌던 <재벌집 막내아들>에 등장하는 순양 그룹의 진양철 회장의 관점을 가졌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동탁은 정권을 잡기 전에 모두 6번의 전투에 출전하였는데 두 번은 자신이 직접 지휘관으로 출전한 경우 황건적의 장각과의 전투에서는 패했고, 185년 강족인 선령강과의 싸움에서는 무승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보숭과 장온의 휘하에서 종군할 때에는 2승 1무 1패라는 비교적 양호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 내에서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서쪽 변경에서는 강인과 한족 토호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혼란하였는데 오히려 이런 상황이 동탁이 군벌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동탁은 최초로 군벌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으며 동탁이 이끄는 서량의 무력 앞에서 문벌의 허망함을 깨달은 원소가 낙양을 탈출한 후 군벌로 전향하였으며,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는 것을 비난하였던 원소는 세력을 형성한 다음 황족이었던 유우를 설득하여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유우 본인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 기회 포착에 능한 동탁 


영제는 살아생전에 동탁의 병권을 회수하려고 하였습니다. 죽기 전인 189년 영조는 동탁을 소부로 임명하여 낙양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습니다. 소부는 황실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주치의, 요리사, 환관, 후궁, 비서 등을 관리하는 관직이었습니다. 이 자리는 장관직인 구경의 하나로서 지방 야전군 사령관이었던 동탁에게는 군력의 핵심부 요직으로의 승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받으려면 병권을 내놓아야만 했습니다. 동탁은 이민족 병사들이 자신의 이임을 반대한다는 말이 안 되는 명분을 내세우며 소부 취임을 거부하였습니다. 무엄한 불충이자 항명이었습니다. 영제는 죽음이 다가오는 가운데 한 번 더 동탁의 병권 회수를 시도하였습니다. 영제는 동탁을 병주목에 임명하고 군대를 황보숭에게 넘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동탁은 상소를 오려 이마저도 거부하면서 오히려 병력을 낙양 북쪽의 하동군으로 옮겨 주둔하면서 정국을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은 황하를 건너면 바로 낙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지였습니다.      


낙양성의 하진이 환관들을 직접 제거하지 못하고 원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 병력의 소집령을 내리자 동탁은 하진의 명령을 받들어 하동군에서 낙양 발치의 석양정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하진의 의도는 동탁과 정원의 군대로 하태후를 협박하려는 목적이었으나 하진은 실수였다고 판단하고 동탁이 민지현에 이르자 충소라는 신하를 보내 진군을 멈추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동탁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낙양 서쪽의 하남현까지 진군하였습니다. 이에 충소가 반발하자 일단 병력을 석양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석양진에서 주둔하면서 낙양을 관망하던 동탁은 낙양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난리가 났음을 직감하고 병력을 이동시켰습니다. 황제인 소제가 황화를 건너는 나루터인 소평진으로 도망쳤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황제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는 소평진과 낙양 사이의 북망산으로 향했습니다. 북망산은 낙양성 북부의 야산으로 황제나 고관들의 무덤으로 쓰이는 곳이었습니다. 동탁은 북망산에서 소제와 마주쳤습니다. 생전 처음 유혈이 낭자한 변란을 겪은 어린 황제는 동탁을 보고 무서워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본 조정 고관들이 나서서 동탁군의 접근을 제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뒤로 물려라! 퇴병하라는 조명을 내렸다.”

동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공들은 국가의 대신으로서 왕실을 바로잡지는 못하고 국가가 파탄에 이르게 했으면서 어찌 나보고 병사를 물리라 하는가!”

 보다 못한 전 태위 최열이 동탁을 꾸짖었습니다.

 “감히 황명을 거역하려는가?”

동탁은 최열에게 욕을 하며 말했습니다.

 “주야로 삼백 리를 달려왔는데 어찌 물러가라 하는가? 내가 차마 경의 목을 못 벨 줄 아는가?” 

동탁이 칼을 어루만지며 눈을 부릅뜨자 기세에 밀린 공경 대신들은 더 이상 제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동탁은 휘하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조정 대신을 몰아내고 황제를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최열은 매관매직이 당연시되던 당시에 지방장관 정가가 2천만 냥이었던 자리를 영제의 유모를 통하여 5백만 냥에 사도라는 관직을 얻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명망이 높았던 최열이 뇌물을 바쳤다는 소문에 평판이 추락하였고 아들인 최균도 천하 사람들이 아버지에게서 동취가 난다고 싫어한다는 말을 했다가 지팡이로 때리려 하였습니다. 아들이 도망가자 최열이 효자가 아버지가 때린다고 도망갈 수 있나고 꾸짖자 순임금도 아버지가 큰 지팡이를 들면 달아났다고 적혀있다고 대답을 하였다는 일화를 남긴 인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매관매직의 인물이었습니다. 


3. 상국이 된 동탁.      


거칠 것이 없어진 동탁은 소제 유변을 폐하고, 이복동생인 진류왕 유협을 새로이 황제로 내세우면서 자신은 스스로 상국에 취임하였습니다. 상국은 유방이 당시 창업공신이었던 소하에게 내렸던 관직으로 그동안 후한에서는 한 명만 임명되던 상국과 승상직을 폐지하고 3명의 재상, 즉 태위, 사도, 사공의 삼공을 두어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권력 집중을 막았는데 동탁은 스스로 상국이 되었고 이로써,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였습니다.     

 

동탁이 처음 낙양에 입성하였을 때에는 그의 군대가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3,000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당시 다른 군대의 병력 규모는 사료에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동탁의 병력이 소수인 점은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탁은 기지를 발휘하여 병력 수를 들키지 않으려고 병사들을 밤에 몰래 낙양성 밖으로 나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군악대와 함께 떠들썩하게 재입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쪽에서 온 동탁의 군대가 낙양에 도착했다”라고 선전을 반복하였습니다. 낙양 사람들은 처음 들어온 군대는 선발대이고 계속해서 후발대가 입성한다고 생각하여 동탁에게 대항할 생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도위 포신은 하진의 명령으로 고향인 태산군에 병사들을 모으러 갔다가 돌아오니 하진은 죽고 동탁의 세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동탁은 원소를 찾아가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제거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동탁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고 장차 다른 뜻을 품을 것입니다. 지금 먼저 그를 도모하지 않으면 후일 공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탁에게 제어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동탁의 군대는 지금 막 낙양에 도착하여 몹시 피로할 터이니 급습하면 그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정의 정예부대를 지휘하는 기도위였던 포신과 원소가 거느린 병력은 동탁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보였는데 우유부단한 원소는 동탁을 두려워하여 군대를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동탁은 죽은 하진과 그의 동생 하묘의 군대를 흡수하였고 여포를 부하로 거느리고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집금오 정원을 여포를 통하여 죽이고 정원의 군대를 흡수하자 이제 낙양에서 동탁에게 대항할 세력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동탁은 민심을 얻기 위하여 환관들이 사족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으킨 ‘당고의 화’로 피해를 입은 지식인들을 사면 복권하고 그들을 관리로 등용하였습니다. 이로써 파당을 일으킨다는 죄목으로 환관들에 의하여 투옥된 사람들과, 종신토록 관리가 될 자격을 박탈당하였던 사람들이 동탁에 의하여 구제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동탁은 환관과 싸우다 죽은 진번과 두무의 박탈된 벼슬과 작위도 복귀시켜주고 그들의 자손들도 관리로 발탁하였습니다. 이는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였을 당시 신하들이 영제에게 건의하였던 내용인데 영제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동탁이 이를 받아들였고 이것으로 동탁에 대한 평가가 호전되었습니다.      


동탁은 이외에도 주비와 오경, 정태, 하옹, 순상, 진기 항융 등 조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을 대거 발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직속 부하나 총애하는 무장들의 벼슬을 중랑장과 교위로 묶어두는 지혜도 발휘하였습니다. 새로이 발탁된 주비와 오경은 지방 출신의 야전사령관인 동탁에게 개혁정치를 주문하였습니다. 동탁에게 대항하여 도망간 원소를 발해 태수로 너그럽게 임명하였고, 한복을 기주목에 유대를 연주자사, 공주를 예주자사로 임명하고 장막을 진류 태수, 장자를 남양 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 만약 동탁이 이후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대로 이어갔다면 역사는 동탁을 정적마저도 포용한 대인배로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최진열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탁의 선정을 여기까지였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동탁의 기회 포착에 능한 성공요인을 뛰어넘는 실패 요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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