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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0. 2022

동탁의 추락 이유는?

동탁은 서량의 변방에서 태어나 낙양의 혼란의 와중에 황제의 폐립을 단행할 정도의 권력을 얻기까지 남다른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서량에서 이민족인 강족들에게도 큰 형님 리더십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직속 상사인 장온의 명령은 물론 심지어 황제인 영제가 내린 인사조처인 병주로의 발령도 상소를 올리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평시 같았으면 큰 처벌을 받아야 할 항명이었으나 오히려 동탁은 이 기회를 이용하였고 이를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동탁은 포상으로 받은 비단들도 아낌없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동탁의 부하들은 한족과 강족의 혼성 집단이었지만 동탁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결속하여 동탁의 명령이라면 불길 속으로도 뛰어들 수 있는 국가 상비군이 아닌 동탁 개인의 사병처럼 변질되었고 동탁은 이미 변방의 일개 장수가 아닌 군벌로의 변신이 이미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제를 폐위시키고 나이 어린 헌제를 세운 동탁은 이미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탁의 꿈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황제가 되는 것이라면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 이를 천하에 설득시킬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하는데 동탁의 주변에는 그런 인물들이 없었습니다. 건달이었던 한고조 유방에게는  장량이 있었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는 유백온이라는 책사가 있었으며, 유랑하는 군벌이었던 유비에게는 공명이 있었습니다. 동탁의 주변에는 순욱과 노숙 공명과 같은 군주가 어려워하는 책사가 존재하지 않고 동탁에게 복종하는 병사와 동탁을 두려워하는 선비들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유비는 삼고초려하여 제갈공명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였고 출사를 거부하는 공명 앞에서 천하를 위하여 눈물을 보였다고 하였는데, 동탁은 병을 핑계로 출사를 거부하는 채옹에게 “만일 내 명을 거역하면 일족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라고 협박하여 협조하게 만들었습니다. 동탁이 사람을 다루는 방법은 당근과 채찍 2가지 방법만 존재하였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겁을 주거나, 협조하면 당근을 주겠다는 강온 양면책만 존재하는 일차원적인 방법만을 사용하였습니다.      


배송지가 주석을 붙인 정사 헌제기에는 “동탁이 포로로 잡은 산동병에게 돼지기름을 묻힌 베 10여 필로 몸을 묶인 뒤 불을 질러 먼저 발부터 불이 일어나게 했다. 원소의 예주종사 이연을 잡아 삶아 죽였다. 동탁이 아끼는 호병들이 총애를 믿고 방자했는데 사례교위 조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동탁이 대로하여 말했다. “내가 아끼는 개도 타인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이내 사례부의 도관들을 불러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동탁은 자기 사람은 철저하게 챙겨주고, 자신에게 적으로 판명된 사람은 잔인하게 응징하는 방법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동탁 수하의 말단 졸개들을 이끌어 갈 수는 있었겠으나 같은 이념을 가지고 동고동락하는 일급의 참모를 얻을 수는 없는 절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탁은 자신을 찾아온 강족들에게 집에서 밭을 가는 소를 잡아 대접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고, 정원의 부하 여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장온의 부하로 자신을 죽이라고 했던 손견의 능력을 인정하여 사돈을 맺자고 청할 정도로 배포가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이라고 여겨 왕윤을 등용하여 동탁 정권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시도하였으나 사도인 왕윤이 상서복야 사손서와 모의하며, 여포를 포섭하여 자신을 주살하려 모의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를 못한 것은 동탁의 한계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동탁의 측근들은 주로 군부에 속한 군인들로 이들은 동탁이 대권을 잡은 이후에도 계속 병력을 통솔하여 동탁의 군사적 기반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정권의 정치적 역량을 펼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동탁은 조야에 명망 있는 선비들을 찾기 위하여 청류파 인물들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동탁이 성장한 서량의 문화와 낙양이 있는 중원의 문화는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하였습니다.     


동탁이 원소를 토벌하려 대군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정태는 원소를 위하여 이에 반대하면서 동탁에게 자신의 반대 이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원소는 공경의 자제로 수도 출신이고, 장막과 공주도 청담과 공허한 인물평론이나 하는 서생출신이니다. 군사적 재능과 병기를 다루거나 전투 경험도 없는 동탁의 상대가 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서량 출신들은 강족과의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부녀자들도 칼과 창을 잡고 활을 쏠 수 있으나 전쟁을 모르는 산동의 병사들은 이를 당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백성들은 병주의 양주의 군사들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흉노의 항복한 백성들과 서방의 강족들을 동탁공이 장악하여 전위부대가 되었으니 원소를 공격하는 것은 호랑이와 들소로 개와 양을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탁공의 장수들은 장군의 심복이며 오랫동안 생사고략을 같이하여  충성심이 믿을만하니 이는 마치 광풍으로 마른 나뭇잎을 휩쓸어가는 형세입니다.”라고 설득하니 동탁이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탁의 출신지인 서량은 이민족과 강족이 혼거 하는 곳이어서 아무래도 무용을 숭상하는 상무 중심의 분위기가 강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분위기는 낙양이 위치한 중원과는 문화적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서량에서 생활한 동탁은 관습과 전통을 중히 여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살상, 방화, 약탈 등의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사숙고하여할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우는 일,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는 일 등에서 동탁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은 중원 출신의 지식인들에게는 폭압적인 정책이었고 경악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동탁이 말했습니다.

“관동이 바야흐로 어지러우니 적도들이 일어나는 곳이 되었다. 효산의 함곡은 험요하고 견고하니 나라에서 중히 여기는 방어지이다. 또한 농우에서 재목을 얻으면 공역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두릉의 남쪽 산 아래 효무제께서 만든 옛 도요지가 있으니 벽돌과 기와를 만들 수 있어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으니 궁실과 관부는 어찌 족히 말할  바가 있겎는가? 백성과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야 어찌 족히 의논할 거리가 되겠는가? 만일 앞에서 계속 막아선다면 내가 대병으로 핍박할 것이니 어찌 스스로 머물 곳이 있겠는가?” 모든 신료들이 두려워 낯빛을 잃었다. 황완이 동탁에게 말했다.

“이것은 큰일입니다. 양표 공의 말을 어찌 신중하게 생각하려들지 않는 것입니까?”

동탁은 논의 자리를 파한 뒤 즉일 사례교위로 하여금 양포와 황완의 일을 상주하게 하여 모두 면직시켰다.      

동탁이 집권한 중앙조정의 내부 인사들은 동탁의 강퍅하고 잔혹한 성격적 문제로 그를 두려워하고 꺼리게 되었고 바로 여기에서 사단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동탁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은 자연스레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후한서의 순상전에는 “순상은 동탁의 잔혹 무도함이 심해지는 것을 보고, 사직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라 여겨 천거한 자들 중 재략이 있는 선비를 모아 함께 동탁을 도모하려 하였다. 또한 사도 왕윤과 동탁의 장사 하옹 등과 더불어 안에서 동탁을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상은 순숙의 아들이며 조조의 참모인 순욱의 숙부로 동탁이 발탁하여 95일 만에 삼공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당세의 명사로 동탁에게 깊은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상은 동탁의 잔혹 무도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 여겨 기회를 보아 동탁을 도모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부의 적은 물론이거니와 은밀히 도사리고 있는 내부의 적을 맞이하게 된 동탁은 위기의식  속에서 더욱더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후한서에는 ”태사가 하늘의 기운을 살피니 마땅히 대신들 가운데 죽여야 할 자가 있다고 하였다. 동탁이 사람들로 하여금 위위 장온과 원술이 서로 교통한다고 무고하게 한 후, 마침내 장온을 저잣거리에서 태형을 가한 후 살해하여 천변을 막으려고 하였다.“     


장온은 동탁이 중랑장으로 있던 시절 손견이 동탁을 주살하자고 건의하여도 이를 거부한 사공 겸 행거기장군으로 있었던 직속상관이었는데 장온을 저잣거리에서 태형을 가하여 살해한 것은 동탁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인 특정의 타인을 본보길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보이며 이를 통하여 노리는 것은 주변에 공포심을 자극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동탁의 주변에 이런 행동을 제어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참모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충실하게 동탁의 명령을 집행하는 하수인들로만 주변이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정사에서 언급하고 잔혹한 동탁의 모습은 그다음 역사에 등장하는 조조의 대권 장악을 위한 일종의 견제장치라고 언급한다고 한형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탁의 포악 무도한 행보는 뒤이은 조조가 정적들을 잔혹하게 제거하고 집권하는 사건들에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하고 마침내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몰아내고 위나라의 제위에 오르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가 이른바 ’ 조위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동탁의 아버지 동군아는 영천의 윤씨 현위였고 동탁은 3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은 어려서 죽었고, 동생의 이름은 동민이었습니다. 훗날 정권을 잡은 뒤 동탁은 동민을 좌장군으로 삼았고 형의 아들 동황을 중군교위로 삼아 모든 군사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고 종족들을 조정의 일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동탁의 사위이자 양자였던 우보의 부곡장이면서 동태후의 조카인 동승이 동탁의 부하로 있었던 것이 동탁의 동생인 동민이 낙양에서 봉거도위로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낙양의 중앙정부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전형적인 변방의 장수였습니다.


또 명나라의 나관중이 동탁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은 동탁이 중원의 권문세족이 아니라 변방인 서량의 무관가문 출신으로 중앙 조정의 최고 재상에 오른 것을 중원의 사람들이 시샘하였다는 관점도 있다는 주장도 존재합니다. 당시 관동의 반동탁 연합군의 주인공들이 모두 전통적인 권문세가들이라는 점을 주목할 때 그들은 신흥 지배세력에게 자리를 빼앗긴 기성 지배세력들의 관점에서 동탁을 비판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여가에서 단기간 권좌에 있다가 무너진 인물의 경우 반드시 사서에서는 나쁘게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왕조에서 잠시 집권한 인물의 경우는 흉포하고 잔학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기록되는데 동탁의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탁이 악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서량의 이질적인 문화에 거부감이 있었던 중원의 사족들이 동탁에게 가진 거부감도 큰 원인이 있었지만 동탁의 리더십과 칼로 위협하면서 출사의 길을 열어주면 사족들은 충성하리라는 단순한 인간 이해만 가지고는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니었나 하는 한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후세의 많은 야심가들이 동탁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 그의 길을 뒤따랐고 일부는 실패하였고 일부는 성공하였지만 군벌로 집권한 자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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