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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31. 2022

조조에게 콤플렉스를 준
남자의 콤플렉스

      

조조가 아버지 조숭의 죽음의 책임을 물어 서주를 공격하자 여포는 진궁의 책략을 따라 조조가 없는 연주를 공격하니(194년 흥평 원년) 조조는 서주에서 돌아와 여포와 격전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진궁은 복양성 내에 대대로 살아온 전씨 씨족을 이용하여 반간계를 꾸며 조조를 유인하였습니다. 조조는 성 안으로 진입했으나 함정이었고 성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여포의 창을 피하여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00여 일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사상자는 늘어가는데 군량은 거의 떨어지고 메뚜기떼가 일어나 대기근이 닥쳤습니다. 그때 원소가 사자를 보내서 조조를 설득하였습니다. 조조의 가족을 자신이 있는 업성으로 보내면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조조가 이를 수락하려고 하자 사신으로 외지에 나갔다 돌아온 정욱이 조조를 찾아왔습니다.


 “장군이 가족들을 원소에게 보내어 원소와 연합하고자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조조는 “그렇소.”

정욱이 말했습니다.

 “장군은 스스로 판단하건대 원소 아래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장군은 용과 호랑이와 같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닌이나 팽월이 했던 것과 같이 남의 번장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비록 연주가 재앙을 만났지만 아직 성 3개가 남아있습니다. 전쟁에 능한 장수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욱의 충간을 듣고 조조는 가족들을 원소에게 인질로 보내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훗날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무찌르고 난 뒤 조조는 자기 휘하의 인물들이 그동안 원소와 내통한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이를 읽지도 않고 모두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자신도 원소가 강성할 때 원소를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면서. 삼국지의 판세는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를 이기면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벽대전이나 이릉대전이 있었어도 승패는 있어도 판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탁의 죽은 후 삼국지 최고의 유망주는 단연 원소와 원술의 싸움이었습니다. 사세삼공의 집안인 원씨 가문이 동탁의 힘을 보면서 군벌로 방향을 선회하였고 가문의 힘으로 당대 최고의 세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먼저 종놈의 자식으로 태어난 원소가 어떤 과정을 거쳐 병주, 유주, 기주, 청주의 하북 4개 주의 영주가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삼국지 최고의 세력을 가진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패배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천하대란의 원흉은 원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소가 십상시의 난을 유발하지 않았다면, 동탁의 쿠데타도 없었을 것이고, 원소가 낙양에서 산동으로 도주하지 않았다면 원씨 일족도 멸족되지 않았을 것이며, 천하대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하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나라도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나라는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원소를 중심으로 한 산동반군이 거병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이 일어나자 천하의 야심가들이 일제히 원씨 일가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무장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한나라의 멸망은 촉진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원소와 조조는 낙양의 방탕한 불량소년들이었습니다. 원술, 장막, 포신, 허유, 오광, 오경 등이 그들이 놀던 무리였습니다. 어느 날 원소와 조조는 함께 놀러 나갔다가 어떤 집에서 혼사 치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소년 불량배들은 장난기가 발동되어 신부를 납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두 악동은 한창 신혼을 준비하는 혼주의 집에 잠입하였습니다. 조조가 큰 소리로 ‘도둑이야!’를 여러 번 외치자 집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밖을 살피러 나간 사이 둘은 신방에 뛰어들었습니다. 조조는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신부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자 신부는 놀라 입을 벌리지 못하였습니다. 두 악동은 그 틈에 재빨리 큰 부대로 신부를 뒤집이 씌었습니다. 덩치가 큰 원소가 둘러매고 조조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정신을 차린 신부가 악을 쓰자 사람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급해진 원소가 허둥거리며 신부를 멘 채로 뛰었습니다. 신부가 온몸을 뒤틀자 원소가 중심을 잃고 울타리로 친 탱자나무 덤불 속으로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원소는 가시덤불에 걸려 꼼짝달싹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원소는 조조에게 눈빛으로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조조는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신부를 보쌈하다가 가시덤불에 걸린 도적놈이 여기 있다.”

원소는 정신이 번뜩 났습니다. 신부집의 사람들에게 잡혔다가는 뒷일은 불문가지였습니다. 원소는 온 힘을 모아 덤불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옷이 찢어져 나가고 살점이 뜯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소는 체면을 중시했지만 과단성이 없었고 꾀를 내기는 좋아했으나 말과 실행이 어긋나는 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악소년의 일원이었지만 난세를 만나 종년의 후손이라는 가문에서 받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그동안 환관과 외척에게 빼앗긴 관리추천권을 청류파들이 독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원소는 총대를 메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화제 때는 두태후가 국정을 맡고 두헌이 정권을 잡았고, 안제 때는 등태후가 국정을 맡고 등줄이 정권을 잡았고, 북향후 때는 염태후가 국정을 맡고 염현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환제 때는 양태후가 국정을 맡고, 양기가 정권을 잡았고 양기가 정권을 잡았고, 영제 때는 두태후가 국정을 맡고 두무가 정권을 잡았으며, 소제 때는 하태후가 국정을 맡고 하진이 정권을 잡으면서 6번 태후가 국정을 맡고 6변 외척이 정권을 잡았는데 원소 이전에 진번이 사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외척 두무와 영제의 조부인 종실 유숙이 ‘삼군’이라 불리며 기대를 모았으나 환관과의 싸움에서 패하면서 두무는 자살하고 진번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원소는 이제 자신의 어깨 위에 원씨 가문을 비롯한 사족과 청류파의 염원인 관직추천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사명이 올려있음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원소는 청류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사용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여론의 중요성을 알고 선전전에 능한 원소      


원소는 누구보다도 사족들 사이의 세평이 중요함을 절실하게 인식한 인물이었습니다. 원소는 사세삼공의 집안에서 태어나 뭇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남다른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원소는 홍길동처럼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어서 원칙적으로는 원씨 집안의 후사를 이를 자격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아버지 원봉의 서자로 태어났으므로 배다른 동생이었던 원술에게서 늘 ‘종년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 원봉의 형인 원성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원소는 숙부인 원성의 아들로 입양이 되었고 첩의 자식이 원씨 집안의 적장자로 신분이 세탁되면서 홍길동의 신세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소는 태생적 열등감 때문에 원씨 집안을 중심으로 한 사족계급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어머니가 사망하자 원소는 초막을 짓고 3년간 복상을 하였고 이어서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양아버지인 원성에 대한 복상을 하여 총 6년 동안 시모살이를 하였습니다. 후한 시기에는 사족들에게는 효가 중요한 가치였고 3년도 아닌 총 6년간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통하여 사족들에게 원소의 명성을 드높이는 중대한 계기로 원소는 이 기회를 활용하였습니다. 후한서에는 “원소는 사도 원탕의 손자이며 부친 원성은 오관중랑장이었다. 원소는 신체가 건장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였는데, 대장군 양기 이하 모두가 원소를 좋아하였다. 원소는 젊어 낭관이 되었고 복양 현장으로 재직 중에 모친상을 당해 사임하였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진수는 “원소는 풍모가 빼어나고 위엄 있는 용모였으며 지위가 낮은 선비도 허리 굽혀 존경했으므로 수많은 선비가 그에게 의탁하였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조조가 허소의 인물평을 얻기 위하여 잔머리를 무수하게 굴려야 했지만 원소는 무난하게 세상을 이끌 ‘동량지재’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작은 위기는 있었습니다. 원소가 모친상을 당하여 복양에서 낙양을 돌아올 때 수많은 인사들이 무리를 지어 원소를 배웅하였습니다. 배웅하는 마차가 길게 늘어서 거리를 메울 정도였습니다. 관내외의 인사들이 전별금으로 내어놓은 재물과 선물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습니다. 원소는 상을 당한 사람으로 삼가야 했지만 잠시 그 분위기에 도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내 여남 경내에 이르자 여남에 사는 허소의 날카로운 필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부 하나만을 거느리고 다른 수행원들과 짐수레들은 길을 돌아가도록 조치하였습니다. 허소의 비판에 자신에 대한 세평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려는 대처였습니다. 하지만 원소의 귀행길 이야기는 이미 허소의 귀에 들리었고 허소는 그의 형 허정과 의논하여 원소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이런 내밀한 준비를 원씨 가문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엄청난 압력과 회유가 시작되었습니다. 원씨 가문의 인재를 작은 실수를 가지고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문의 위세를 건 공갈과 함께 거절하기 어려운 뇌물공세가 이어졌습니다. 천하의 허소도 결국 원소에 대하여 입을 다물게 되었습니다.      


2. 천하에 퍼진 원씨 가문의 문생고리들의 힘을 활용하는 원소  

    

원소가 사족들에게 신망을 얻기 시작하면서 원소를 찾아오는 수레가 거리를 메우자 궁궐의 환관들이 이를 싫어하였다고 <후한서>는 기록하였습니다. 중상시 조충이 사족들의 인기를 끌려고 하는 원소를 경계하는 말을 하자 원소의 숙부인 태위 원외를 원소를 불러 주의를 주었으나 원소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소는 한나라 영제를 지키던 근위군의 두 번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부대는 모두 8명의 장수가 있어서 ‘서원팔교위’로 불렸는데 첫 번째 인물은 환관 건석으로 상군교위이자 대장이었고 두 번째가 원소로 중군교위, 세 번째는 포홍으로 하군교위, 네 번째인 조조는 전군교위였습니다. 영제는 환관 건석에게 하태후의 아들인 소제가 아닌 왕미인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건석의 하진 암살 시도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하진에 의하여 건석은 주살되었습니다. 원소는 하진의 부하로 지방 군벌의 낙양 입성을 추진하였으나 예상과 달리 천하는 동탁의 손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동탁이 서량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들어오자 하진의 명을 받고 태산으로 모병하러 다녀온 기도위 포신은 하진이 사라진 낙양에서 원소를 찾아가 권유하였습니다. 

“동탁은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다른 뜻을 가질 것이니, 지금 일찍 제거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제압당할 것입니다. 지금 막 낙양에 들어와서 피로할 것이니 급습하여 처치하여야 합니다.” 당시 낙양의 서원 8교위가 거느리는 황제 직속군의 병력은 동탁이 동원한 서량의 3000 군사보다 많았으나 낙양의 명문가 출신인 원소는 강족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형성된 동탁의 카리스마가 무서워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진과 하묘가 거느린 낙양의 병권을 모두 흡수하고 동탁에게 맞서던 병주 출신의 집금오 정원의 병력도 여포를 포섭하여 흡수한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동후(진류왕, 헌제)를 옹립하자고 원소에게 말하자 원소는 반대하였습니다. 그러자 동탁은 칼을 뽑아 들고 원소를 협박하였습니다. “천하의 권력이 나에게 있는데, 감히 누가 거부하겠느냐”

이에 기세가 눌린 원소가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나가서 태부와 함께 의논합시다.”라고 한발 물러서자 

동탁이 “유씨 후손을 더 남겨둘 수 업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원소가 발끈하여

“천하에 힘센 자가 어찌 동공뿐이겠는가!”는 말을 남기고 

원소는 칼을 비껴 잡고 길게 읍을 한 뒤에 지름길로 달려 나가 상동문에 부절을 걸어놓고 기주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동탁은 현상금을 걸고 원소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원소의 젊은 시절 친구인 오경 등이 은밀하게 원소를 위하여 동탁을 설득하였습니다.  

“지금 급히 원소를 잡으려 한다면 틀림없이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원씨 가문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은덕을 베풀었기에 문생과 옛 관리가 천하에 널렸으니 차라리 원소를 사면하면서 군수 자리를 내린다면 원소는 면죄를 기뻐할 것이니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전한과 후한 시대에 중앙과 지방의 관청을 책임지는 장관들은 부하들을 스스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벽소’라고 불르는데. 삼공이나 구경, 군현의 장관에게 발탁되어 속리가 된 사람들은 자신을 등용해준 사람을 스승이나 부모처럼 받들었습니다. 등용된 사람을 ‘문생고리’라고 불렀는데 ‘문생’은 학생 혹은 제자라는 뜻이고 ‘고리’는 옛 부하라는 의미입니다. 등용시켜준 사람을 ‘좌주’라고 부르는데 이 양자의 관계는 좌주문생 관계라고 불렀습니다. <후한서>에 보면 손상, 이순, 왕윤 등이 자신을 추천해준 고관이나 태수가 죽자 삼년상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삼공을 모두 역임하고 태부까지 거친 원로 호광이 82세에 죽자 그의 옛 부하였던 삼공과 구경, 태부, 박사, 의랑 등 고관과 핵심보직을 맡은 수백 명이 상복을 입고 장사를 지내 문생고리의 성대함이 호광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후한서>에 기록된 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한 인물이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관청의 장관직을 역임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부하로 거두게 되고, 이들은 숙명적으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반대로 처벌을 받게 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자, 형제는 물론이고 문생고리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조정은 이들을 삭탈관직하고 금고에 처했는데, 지금의 관점에서는 매우 가혹한 처분이지만 그 당시 좌주문생 관계가 얼마나 강고한 결속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한 배를 탄 동지였고, 외부에서는 그렇게 간주하여 판단하였습니다.      


원소가 산동에서 반동탁 연합군을 이끌자 동탁은 낙양과 장안에 사는 원씨 일족을 모두 멸족시켰습니다. 여론은 자연스럽게 원소에게 기울었고 원소에 대한 신망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결국 반동탁 연합군은 손견이 낙양에 진입하였으나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자 우왕좌왕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초평 2년(191년) 4월 전선은 교착되었고 동탁에 의하여 발해태수의 직함을 가지고 있던 원소는 기주목 한복에게 식량을 의존하고 있었으나 한복이 다스리는 기주 땅을 탐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봉기의 계책을 받아들여 공손찬에게 한복을 공격하자고 권하고 위협을 느낀 한복이 도움을 청하면 그것을 기회로 기주를 차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복은 자신의 가신들에게 

“나는 본래 원 씨 가문의 문생고리였소. 재능도 원소만 못하오. 덕이 높은 자에게 양보하는 것은 옛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바였소.” 하면서 가신인 기도위 저수나 경무, 민순, 이력 등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원소에게 기주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3. 시커먼 속마음을 명문가의 후예로 포장하는 원소      


한복의 신하 경무와 민순은 원소가 자리를 잡자 곧 처형되었습니다. 기주목 한복에게는 분위장군이라는 이름뿐인 직책을 주고 아무런 실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평소 도관종사 주한이 한복에게 원한이 있었는데 한복을 암살하려다 한복의 큰아들만 중상을 입히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놀란 한복은 진류태수 장막에게로 도망갔는데 원소의 사자가 장막과 밀담을 하자 위협을 느끼고 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조가 황하 이남에서 군웅들과 싸우고 있을 때 원소는 공손찬과 하북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한복의 부하 국의가 한복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원소는 이를 지원하였는데 국의는 양주 출신으로 강족과의 전투에 능하였다고 합니다. 공손찬의 기마부대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공손찬과의 계교전투와 흑산적과 어부라와의 전투, 흐간적 영채 등의 격파 등에서 국의는 항상 선봉이었고 늘 승리를 거두는 장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의가 자신의 공을 믿고 매우 교만방자하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어느날 국의가 유주에서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돌아오자 원소는 이를 빌미로 바로 처형해 버렸다고 합니다.      

원소는 191년 기주를 차지하고 199년 한때 동탁보다 강하였던 공손찬의 역경을 함락시키면서 유주마저 차지하면서 기주, 청주, 병주, 유주 등 하북 4주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4주의 총 호수는 약 205만 호로 전체의 22%이고 인구는 약 1,238만 명으로 전체의 25.9%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대략적인 추계일 뿐입니다. 어쩌면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 중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던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자신보다 세력이 약했던 조조에게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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