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가방 Dec 31. 2022

원소가 조조에게 패한 이유?


원소와 조조, 허유는 젊은 시절 낙양의 골목을 함께 누비던 사이였습니다. 원소가 모친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적모와 양부의 삼년상을 연이어 모시는 6년간의 혹독한 시묘살이를 이겨내면서 외부적으로 당대 최고 가문의 대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조조와 같은 환관 집안 출신 입장에서는 명문가와 마주친 강남 졸부처럼 초라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허베이의 패권을 가르는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허유가 원소를 버리고 자신을 찾아오자 참모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허유의 계책에 따라 원소의 식량 창고인 오소를 직접 기습하여 기울어져가는 전황을 돌려놓고 승기를 잡는 대전환을 이루어냅니다. 황하이북의 경쟁자였던 유주의 공손찬 백마부대를 격파하고 기주, 병주, 유주, 청주 4개 주의 패권을 장악한 원소가 평소 우습게 여기던 조조에게 패배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봉천자와 협천자      


 수많은 군벌의 하나에 불과하던 조조가 일약 국가 중심인물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순욱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제를 모시는 봉천자(奉天子)를 결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산동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고 하였고 누군가는 한섬과 양봉이 막 천자를 낙양으로 데리고 온 상황이라 했고 누군가는, 북쪽으로 장양과 동맹을 맺었으므로 진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조조는 논리 정연한 순욱의 의견을 듣고 천자를 모시는 일을 단행하였습니다.       

“진나라 문공이 주나라 양왕을 수도로 영접하자, 제후들은 사물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같이 따르고 복종했으며, 한 고조가 동쪽으로 항우를 정벌하러 가서 항우에게 살해된 의제를 위해 상복을 입자, 천하의 인심이 모두 따르고 복종했습니다. 천자가 사방으로 떠돌아다니시매 장군은 가장 먼저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의로운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중략) 천하에 비록 반역의 무리가 있다지만 결코 우리의 근심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한섬과 양봉이 감히 해롭게 하겠습니까! 만일 때가 이르렀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방의 준결들이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을 것이고, 이후에는 이렇게 하려고 생각해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황제를 받들게 된 조조에게 한 차례 도약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천자와 황실의 거취는 온전히 조정 최고의 실력자로 급부상한 조조의 몫이 되었으니, 조조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다름 아닌 수도 이전 즉 천도였습니다. 동탁의 폭정으로 황폐해졌으며 주변 군벌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낙양에서 벗어나 조조의 세력 기반에 가까운 허도로 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욱 이전에도 천자를 모시자는 건의를 올린 참모에 모개가 있었습니다. 모개는 연주 진류군 사람으로 난리를 피하여 형주로 가려하다가 유표가 정령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노양으로 갔다가 조조의 초빙을 받았습니다. 조조를 만난 모개는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습니다.      

“지금 원소와 유표는 비록 백성은 많고 세력은 강성할지라도 모두 천하를 다스릴 원대한 생각이 없으며 기초와 근본을 세울 능력도 없습니다. 무릇 전쟁이란 정의를 갖고 있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며, 재력이 있어야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응당 천자를 받들고, 신하답지 못한 신하들을 호령하여 농경에 힘쓰며 군수물자를 축적하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를 제패하는 사업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 조조가 모개를 중용하자 사직이 바로 섰다는 소리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순욱이 조조에게 간언을 올리기도 전에  이미 원소는 저수에게서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자는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候)의 건의를 받았습니다.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충과 의로써 세상을 구제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고, 종묘는 파괴되어 무너졌으며 여러 주군을 살펴보면 외적으로는 서로 의병이라 칭하나 내적으로는 서로를 쳐 병탄할 것만 도모하니 사직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을 구휼할 것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기주는 대체로 안정되었고 군대는 강력하며 선비들도 귀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맞이하여 업도에 궁궐을 마련한다면 바야흐로 천자를 끼고(挾天子) 제후를 호령하게 됩니다(令諸候). 이에 군마를 양성하여 조현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한다면 누가 감히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모사인 전풍도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면 사해를 쉽게 평정할 수 있다. “고 건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반대파의 반박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역시 원소를 보좌하고 있던 참모인 곽도와 순우경은 ”한 왕실은 현재 오랜 기간에 걸쳐 쇠퇴해 왔습니다. 이제 와서 부흥시키려 해도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대가 지금 영웅들은 주와 군에 할거하며 그들을 따르는 무리는 만 단위로 세야 할 지경입니다. 이를테면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으니 먼저 그것을 차지하는 자가 왕이 된다는 형국입니다. 만일 천자를 맞아들여 그와 가까워지면 무슨 행동을 취하든 상표문을 올려야 합니다. 천자의 명령을 따른다면 주군의 권위가 약화될 것이고, 그 뜻에 거스른다면 천자의 명을 거역한 것이 되니 불충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자를 영입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계략이 아닙니다. “라며 반대한 것입니다.      

곽도와 순우경은 천자와 함께 할 때의 단점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 장점의 크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수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원소가 재고하기를 몇 번이고 간청했으나 원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원소는 사세삼공의 명문가의 자제로써 황실의 권위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원소는 영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만든 서원팔교위에서 건석을 이은 이인자였습니다. 이시절의 원소는 순우경과 같은 동급의 서원팔교위의 장수였습니다. 영제가 건석에게 헌제를 부탁하여 숨을 거두자 건석은 하진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하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원소는 소제를 옹립한 하진의 최측근이었습니다. 훗날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자 원소는 이에 반발하여 낙양을 탈출하여 반동탁연합군을 이끌었지만 실패하였고 동탁이 옹립한 헌제를 대신하여 유우를 새로이 황제로 추대하려다 유우 본인의 반대로 실패하였습니다.      

원술은 손견이 차지한 전국옥새를 가진 것을 기화로 스스로 천자에 올랐다가 천하의 공적이 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뒤 교만한 마음에 경포를 시켜 ”한나라의 붉은 덕이 이미 쇠잔하여 다하였고 원씨 가문은 황윤이 되니 마땅히 하늘의 뜻에 순응하십시오“라는 말을 퍼트리도록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경포가 망령된 말을 한다고 하자 경포를 죽여 자신의 야심을 숨기는 선에서 마무리하였습니다.      

훗날 한나라 헌제를 받들자고 건의한 순욱은 위왕 등극에 반대하다 조조에 의하여 자살을 강요당하였고 모개도 훗날 참소를 받고 모진 고문 끝에 목숨만을 건지고 살아남았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참모를 대하는 자세 

    

원소와 조조는 젊은 시절을 함께 하였기에 같은 인맥을 공유하는 처지였습니다. 원소 밑의 순심은 조조의 핵심 참모 순욱의 형이었고 원소 밑의 곽도는 조조의 모사 곽가와 같은 영천 곽씨이며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향도 같은 영천군 양책현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며 먼 친척 사이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원소의 참모들은 크게 초기의 참모들인 봉기, 곽도 등과 기주 출신의 저수, 전풍과 같은 호족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원소와 조조가 대립할 때 대다수 천하의 공론은 공융과 같은 의견이었다고 합니다. 

”원소는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전풍과 허유처럼 지모가 뛰어난 선비가 그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있고, 심배와 봉기처럼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그의 업무를 맡고 있으며, 안량과 문추처럼 삼군을 다스릴 수 있는 용장이 그의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기기 힘들 것입니다! “      

하지만 이에 대한 순욱의 반론은 논리 정연하였습니다.

”원소가 비록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군법이 정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전풍은 강인하나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심배는 독단적이고 계획성이 없고, 봉기는 과단성은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니, 이 두 사람이 원소를 위해 기주에 남아서 뒷일을 관리할 때 허유의 가족은 법을 위반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관용을 베풀 수 없을 것입니다.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허유는 반드시 반역할 것입니다. 안량과 문추는 필부의 용맹이 있으나,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 순욱은 놀라울 정도로 원소 휘하의 참모들의 미래의 모습을 선명하게 예측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관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조조가 지배하는 황하 이남은 전란으로 인하여 피폐된 상태였으나 원소가 다스리는 황하 북방지대는 공손찬 토벌 이후 상대적으로 전란의 피해도 적었으며 기주 1개 주에서만 정병 20만을 차출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원소는 조조가 웅거하는 허도를 공략할 결심을 하고 참모들의 의견을 구하였습니다. 이에 저수와 전풍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거듭되는 출병으로 영민들은 완전히 피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사자를 허도로 보내서 천자에게 전리품을 헌상하고, 식량 증산에 힘써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토록 하는 두 가지를 주상 합니다. 저정과의 접축이 실패했을 때는 그것이 조조의 방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천하에 공표합니다. 그런 다음 정병을 보내어 차근차근 공격하면 3년도 지나지 않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심배와 곽도는 반대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 주군의 비할 데 없는 용맹과 우리 북방의 강대한 병력이 있으면 조조 따위는 누워서 떡먹기입니다. 지금이라고 당장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원소는 진림을 시켜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을 작성하게 하였습니다.

‘막부는 하늘의 신령을 두려워하며 한나라를 받들고 온 세상의 창끝을 들어 난적을 치고자 하니 장극을 든 보병이 100만이요 오랑캐 출신의 기병부대가 1000이다. 정예병 중에서 가려 뽑고 잘 훈련시킨 갑장들을 떨쳐 일어나게 하고, 훌륭하고 굳센 궁노수들을 기세좋게 달려 내려가게 하고자 한다. 

작금 한나라의 근본은 업신여겨진 지 오래되어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간적 조조가 정병 칠백으로 궁궐을 둘러막고 겉으로는 호위한다하면서 속으로는 천자를 구류하고 있다. 그가 이것을 기화로 작락을 치고 찬약의 화를 저지를까 두렵도다. 충신은 간뇌도지할 때이고 열사는 공을 세울 기회이니 때를 놓치지 말라!“    

  

당시의 형세로는 원소가 압도적인 우세를 과시하는 모양새였으나 각지의 영웅호걸들은 각가의 논리대로 대응하였습니다. 원소는 형주의 장수에게 사신을 보내 참가를 촉구하자 장수는 손님으로 대우하는 가후에게 친서를 보내 조언을 요청하였습니다. 장수는 원소에게 가담하려 하였으나 가후는 원소의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서 원소에게 이렇게 전해주기 바라오. 형제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천하의 우국지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 가후는 원소와 원술의 사이가 나빴던 것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가후는 조조를 추천하며 그 이유를 셋을 들었습니다.     

”첫째, 조공은 천자를 받들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둘째, 원소는 강성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쪽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이끌고 따른다고 하여도 중용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조공은 병력이 열세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환영을 받습니다. 셋째 조공에게는 패왕의 뜻이 있으며 그런 점에서 과거의 사사로운 원한 따위는 곧 잊어버리고 덕을 천하에 나타내고자 할 것입니다.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장수가 항복하자 가후가 말한 대로 조조는 그들을 중용하였습니다. 한편 원소의 참모인 전풍은 지구전을 간언 했으나 원소는 화를 내며 전풍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풍이 관도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조조는 ’ 이것으로 원소의 패배는 결정되었다”며 웃음을 띠었다고 하였습니다. 순욱이 공융에게 예측한 것처럼 후방에서 심배가 부정을 이유로 허유의 가족을 옥에 가두자 허유는 조조에게 귀순하였고 원소는 1만 대에 이르는 치중차를 오소에 집결시켜 놓았으나 적의 습격에 대한 대비는 소홀하였습니다.      


허유의 정보를 듣고 조조는 직접 오소에 출격하는 결단을 내리었고 순우경의 역전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식량은 모두 불타고 말았습니다. 위기상황에서 장합은 오소를 지원하자고 하고 곽도는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자고 의견이 나뉘자 원소는 곽도의 의견을 따랐으나 결과는 장합의 예측대로 전개되었습니다. 곽도는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고자 장합을 모함하였습니다. 장합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조조의 본진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오소의 패배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원소는 장수들의 신망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항복한 원소군이 8만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저수는 황하를 건너오지 못하고 조조에게 잡히어 결국 죽임을 당하였고 원소에 의하여 옥에 갇힌 전풍은 패전을 기뻐한다는 봉기의 참소를 들은 원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3> 명분과 실질       


건안 5년(200년) 겨울 10월에 관도대전이 끝났을 때 원소의 10만 대군 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들은 800기에 불과하였습니다. 원소 군이 붕괴된 이유는 조조가 군량 공급을 차단하였기 때문이었고 조조 군도 이미 군량이 거진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항복한 원소군은 그 수가 8만에 달아혔고 이들은 거의 다 기주 출신으로 부모형제와 처자를 고향에 남겨둔 처지였습니다. 원소의 병사들은 군대가 붕괴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항복했지만 조조에게 심복 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지치고 피로한 군사를 거느린 조조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들을 놓아주어 고향에 돌아가면 원소 군의 세력은 다시 일시에 회복될 것은 분명했습니다. 조조는 결심했습니다.     


새벽 4시 조조 군은 영채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늦게 잠에 빠진 원소군에 대한 작전이 시행되었습니다. 소란과 비명소리에 깨어난 병사들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죽어나갔습니다. 간신히 군영의 담장 밖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있었으나 참호밖의 완전무장한 조조의 병사들에게 즉시 모조리 죽임을 당하여 참호 속에 던져졌습니다. 새벽 공이 트기 전에 살육은 끝이 났습니다. 이날 조조가 학살한 원소군의 수가 8만 명이었습니다. 유사 이래 항우가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죽인 이후 포로에 대한 최악의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원소는 사세삼공의 명문 집안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인물들이 그 밑에 모여들어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책략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용할 능력이 없어 번번이 기회를 놓쳤고 조금씩 뒤지게 되었습니다. 조조의 모사가 된 순욱도 일찍이 원소에게 영입되었던 인물이었으나 “원소는 대업을 이룰 만한 인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원소를 떠나 조조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조조가 서른 살 되던 해에 태위 관직을 돈으로 사서 악명을 남겼습니다. 할아버지 조등은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정치적 흑막의 주역으로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조조는 직접 새를 쏘고 스스로 맹수를 사냥했으며 일찍이 허베이 성 남피에서 사냥할 때 하루에 꿩 36마리나 쏴 떨어뜨렸다고도 했습니다. 병법서를 읽고 <손자>에 주를 달아서 실제 전장에 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건안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서도가로서도 이름을 떨쳤고 음악도 바둑도 당대의 명인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생활은 소박하였고 후궁은 많았으나 사치하지 않았고 시중드는 자의 신발도 단 두 가지 색만 넣도록 하였고 커튼이나 병풍은 해지기 전에는 갈지 않았고 침구 역시 따뜻하기만 하면 되어서 일체의 장식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식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정성을 기울여 장남인 조비의 회상에 따르면 여섯 살 때 활 쏘는 법을 가르치고 여덟 살 때에는 말 타는 법을 가르치는 한 편, 시를 노래하고 오경 및 사서 제자백자의 말을 공부시켰다고 합니다.    

  

조조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데다 참모의 의견을 잘 수렴하고, 기회에 맞추어 결단을  내리고 행동했기 때문에 많은 난세에 저지른 수많은 악업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위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조조는 진림의 대신 작성한 격문에서 보이는 수많은 악행을 자행하였습니다. 

“ 또 발구중랑장과 모금교위를 설치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무덤을 파헤쳐 유해가 노출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몸은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하는 짓은 오랑캐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국가를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학대해 그 해독이 사람과 귀신에까지 미쳤다.”      

조조는 자신의 저지른 잘못이 있었던 때문인지 유언으로 “병사를 통솔하며 수비지에 주둔하고 있는 자가 부서를 떠나는 일은 허락지 않는다. 담당 관리는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하라. 시신을 쌀 때는 평상복을 사용하고 금은보화는 묘에 넣지 마라.”는 실용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조조는 실질을 숭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구현령을 내리면서

“ 반드시 청렴한 선비가 있어야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나라 환공은 어떻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는가! 여러분은 나를 도와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 추천하라. 오직 재능만이 추천의 기준이다.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기용할 것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전사자의 가족들을 위해서는

“전사자가 있는 집 가운데 기본적인 일거리가 부족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현의 관리는 창고를 열어 나누어주는 일을 끊지 마라. 장리는 그들을 구휼하고 위로하여 나의 뜻에 맞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가 있으며  병사들에게 군전의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며 기주를 평정하고 나서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마지기당 4되, 호당 비단 2 필과 면 2근씩만 걷도록 하고 그 이상은 거두지 못하게 단속하여 힘 있는 자들이 죄인들을 몰래 감추어 세금을 떼먹지 못하게 하고 약한 백성들의 부역을 대신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조의 교량이 엄격하게 시행되자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조조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고 김경한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자라도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조조처럼 다방면에 높은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임협방탕한 인물이었던 조조가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한나라 조정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한 나머지 세상을 바로잡을 실력을 축적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색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결국 명분에만 매달렸던 원소는 조조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조조에게 콤플렉스를 준 남자의 콤플렉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