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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Mar 06. 2023

왠일인지 방술을 숭상한 손권


    

1.손권의 아버지 손견   

   

 184년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은 자신을 천공장군, 동생 장보는 지공장군, 막내동생 장량은 인공장군이라

칭하고 위군에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3월 5일 신도 36만 명이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군과 현의 관부에 불을 지르고 지방 관원들을 죽였습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거기장군 황보숭과 중랑장 주준에게 황건적 토벌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주준은 오나라의 회계군 출신이었으므로 황제에게 표를 올려 고향이 같은 손견을 좌군사마로 임명하기를 청했습니다.      


손견은 고향 하비와 회수와 사수 지역에서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모집하여 총 1천 여명을 이끌고 앞장서서 적을 물리쳤습니다. 여수와 영수에서 적을 무찌르자 황건적은 완현의 성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손견은 성벽에 직접 올라 돌진하였고 그의 병사들은 손견의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가면서 황건적들을 크게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주준은 손견의 공적을 상세히 적어 조정에 올리니 손견은 그 공을 인정받아 별부사마로 임명되었습니다. 손견은 손책, 손권, 손익, 손광의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첩이 낳은 손인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진수는 손견이 용감하고 강인하며 가난하고 비천한 지위에서 집안을 일으켰다고 평가했습니다.     

 

2. 손권의 형 손책      


원술이 손견을 시켜 형주의 유표를 치게 하였고 유표는 황조를 보내 번성에서 싸웠습니다. 손견은 황조를 격파하고 양양을 포위하였습니다. 하지만 손견은 말을 타고 현산을 순시하다가 황조의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손책은 손견의 유해를 갖고 돌아와 곡아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손책은 처음에는 여범 손하와 함께 오경에게 의지하다가 원술을 따랐습니다. 원술은 손견의 부대를 손책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손책은 원술 밑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원술은 약속했던 태수로 임명하지 않고 계속 선봉장의 역할만을 맡겼습니다. 불만이 많았던 손책은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편지를 보내 이를 꾸짖고 원술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원술과 사이가 나쁜 조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손책의 힘을 이용하고자 자신의 딸을 손책의 동생 손광에게 시집보냈고, 아들 조장을 손견의 형, 손강의 아들 손분의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손책은 조조와 겹사돈이 되었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200년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싸울 때 조조의 허점을 노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손책은 은밀하게 조조가 자리를 비운 허도를 습격하여 한나라 헌제를 조조에게서 빼앗아 올 기습을 준비하였습니다. 손책은 비밀리에 군대를 조직하고 장수들에게 임무를 분담시켰습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과거 오군 태수 허공을 죽인 사건의 복수로 그의 문객의 기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손책은 100일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손책은 거울을 꺼내 자신을 비춰보다가 “얼굴이 이 지경인데 어찌 다시 공적을 세울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합니다.     


손책이 기습을 당하기 전 오나라 회계에서 활동하던 도교 지도자인 우길은 곡양의 샘물 가에서 <태평청령서>를 얻어서 그 책을 기반으로 종교집단을 만들고 정사를 세워 종교의례를 행하며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며 인기를 얻었고 절강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우길을  따랐다고 합니다. 200년 손책이 건재하였을 때, 어느날 수도 성문 위에서 손책이 많은 장군과 손님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우길이 나타나자 모여있던 장군과 빈객 중 3분의 2가 밑으로 내려와 우길에게 절을 하며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접대를 맡은 관리가 이를 저지하려고 하여도 사람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손책은 이를 보고 우길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인을 시켜서 손책의 모친을 통하여 죽이지 않도록 손책에게 청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책은 우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장군들로 하여금 군신의 예를 잊어버리게 하는 무례를 범했다면서 바로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손책은 자신의 권위를 넘어서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패기 넘치는 ‘소패왕’이라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우길이 죽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제사지내고 복을 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태평도와 신선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3. 오나라의 손권      


손견과 손책은 전쟁터에서 용맹스러운 장수로써 직선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손권은 기반이 잡힌 오나라를 물려받아 관리했던 어린 군주로써 신비하고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향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조는 손책을 달래려고 한나라 조정의 명의로 손책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공물을 상납했으므로 보상으로 사자 유완을 보내어 손책에게 작위와 관복을 내려보냈습니다 유완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손씨 형제들은 비록 각기 재능이 뛰어나고 사리에 통달했을지라도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오직 둘째 손권만은 모습이 남달르고 골상도 평범하지 않아 아주 귀해질 징조가 있으며 수명도 가장 깁니다. 여러분은 제 말을 시험삼아 기억하십시오.” 당시 손권은 열다섯 살의 나이로 영선현의 장이었습니다.      

200년 손책이 갑자기 죽기 전에 손권에게 인수(印綬)를 넘겨주며 말했습니다. “그대는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며 충돌하는 것에 관하여는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력있는 자를 임용하며 그들이 각자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그대만 못하다.”  

   

손책이 죽자 손권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손책의 장사(長史) 장소가 손권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이 어찌 울고 있을 때입니까? 지금 사악한 자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시랑같은 자들이 길에 가득 차 있는데 이처럼 울고 있는 것은 이는 문을 열고 강도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을 뿐 인(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손권의 상복을 군주의 의상으로 바꿔 입게 하고 말에 올라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도록 했습니다. 장소와 주유 등은 손권이 자신들과 함께 대업을 이룰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맡기고 손권에게 복종하여 섬겼고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 태수를 겸하도록 했습니다.    

  

219년 관우를 잡은 오나라의 명장 여몽의 병이 악화되었을 때 손권은 도사들로 하여금 별을 향해 살려달라고 빌게 하였는데 이는 손권이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몽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손권은 여몽을 궁궐의 내전으로 맞아들이게 하고 치료를 위하여 온갖 처방을 다했으며, 나라 안에서 여몽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내리겠다고 포고하여 불러모았다. 질병을 앓는 중에 병세가 나아지면 여몽을 위하여 사면령을 내렸고, 신하들은 모두 축하하였다. 뒤에 병세가 더 나빠지자 손권은 몸소 가까이에  지키고, 도사에게 명하여 별빛 아래서 여몽을 위하여 기도하여 그 생명을 지켜달라고 청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손권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향년 42세로 죽고 말았습니다.       


신기한 술법에 관심이 많았던 손권은 어느날 진시황이 서복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봉래산에 가서 선약을 구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복은 봉래산에는 가지 못하고 바다 가운데 단주로 갔었는데 그 자손 수만 호가 그곳에 거주하면서 가끔 오나라 회계 지방에 베(布)를 사러 오곤 하는데 너무 멀어서 좀처럼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230년 장군 위온과 제갈직에게 명하여 무장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단주와 이주로 보냈습니다. 손권은 진시황처럼 불노장생의 선약을 구해오기를 명령하였지만 위온이 이주로 가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수천 명을 데리고 오는 성과 만을 거두었습니다. 손권의 희망이었던 불노장생의 선약을 구해서 오는 것은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손권이 부하를 보냈던 이주를 대만으로, 단주를 필리핀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손권은 술법을 부리는 방사들의 방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몸을 여러 개로 만들 수 있다는 분형법과 불에도 타지 않고 칼에도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요광, 벽곡과 방사들의 말을 믿고 그들을 우대하였습니다. 심지어 몸을 감추는 비술에 뛰어나다는 개상 등의 방사를 초빙하여 이들을 우대하였다고 합니다. <신선전 9권>에는 손권이 개상으로부터 몸을 감추는 비술을 배워 시험삼아 그 비술을 사용하여 후궁과 여성의 방에 출입하였는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는데 당연히 후궁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적이 나타났을 리는 없겠고 평소 이런 기행에 관심이 많았던 손권에 대하여 후궁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그 사실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두광정의 <역대숭도기>에 의하면 손권은 오나라의 곳곳에 도관을 세웠는데 천태산에 동백관을 세우고 부춘에 숭복관, 건업에 흥국관 등 총 39개의 도교를 믿는 도관을 세우고 800명의 도사를 두었다고 합니다. 손권은 자신을 위하여 239년에 세운 방산의 동현관에서 갈현을 통하여 불노장생의 단약을 만들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손권은 조조가 백성들을 위하여 제남상으로 있을 때 수많은 사당을 전부 철거했던 것과는 다른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인물로 신기한 이적과 도사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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