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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Mar 06. 2023

지금까지 이어진 삼국지의 오두미교


1. 힘겨운 백성들의 삶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포, 관우, 조조 같은 수많은 영웅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습니다. 초한지에서 무공을 자랑하던 한신과 같은 장수들뿐만이 아니라 한나라가 멸망한 뒤 중원의 영웅들이 받들었던 정치적인 리더들이 세운 위, 촉, 오 세 나라도 280년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도 301년에 망했고 사마염이 318년에 세운 동진도 420년 멸망하였습니다.  

    

후한 말기의 인구는 대략 5천6백만 정도로 추산됩니다. 대략 촉은 100만, 오는 250만, 위는 440만 정도이고 진나라가 재통일 했을 때가 1천6백만 정도입니다. 난세에는 전란으로 죽는 사람들도 많았고 세금을 피하려 인구조사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을 테지만 대강의 추세를 알 수 있습니다. 580년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을 때의 인구는 5천만으로 후한의 인구에 거의 근접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후한 말에는 흉년과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은 어려웠습니다.      


후한의 환제 시절인 155년 수도 낙양이 있는 사예와 기주에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사람 고기를 먹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가뭄, 홍수, 메뚜기떼의 피해, 지진 등 다양한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습니다. 환제 입장에서는 돈이 드는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데 세금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환제는 종교에 기대고 싶어 했는지 불교와 도교 사원에 해당하는 노자 사당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금으로 만든 그릇과 천악(天樂)을 연주하는 도구를 동원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환제의 조카 영제 시절에는 174년부터 홍수, 가뭄, 전염병 등 자연재해와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영제는 구멍 난 재정수입을 메우기 위하여 비단을 바치면 형벌을 면해주는 조치를 175년 처음 시도하였고 178년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을 시작했습니다. 관직을 돈을 주고 구입한 관리들은 탐관오리가 되었고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가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6년 후인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백성들은 무자비한 착취와 자연재해, 전염병으로 신음하다 태평도라는 도교 교단으로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185년 황제의 궁궐인 남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아직 북궁이 건재하였지만 영제는 증세를 통한 궁전 재건을 명령하였습니다. 재건을 책임진 환관들의 착복으로 재원이 부족해지자 매관매직이 다시 강화되었습니다 185년 최열이 500 만전을 바치고 사도가 되었고, 187년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1억 전을 내고 태위 벼슬을 샀습니다. 백성들은 증가된 세금에 더하여 돈을 내어 관직을 얻은 태수와 현령, 현장에게 별도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증세가 시작되자 흑산적의 반란을 시작으로  187년에는 낙양 동쪽 형양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88년 여남군에서 반란이 났고, 익주, 청주, 서주에서 다시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2. 백성들을 돌보는 종교 오두미교 


장릉이 만든 오두미교는 병자를 치료할 때 쌀 다섯 말을 받아서 붙어진 이름인데 아들인 장형이 세를 불리고 손자인 장로가 체계를 세워 교주가 되었습니다. 오두미교가 자리 잡고 있는 한중에서는 도로 여러 곳에 의사(義舍)라는 무료 숙박소를 만들고 거기에 쌀과 고기를 두어 여행자들이 무료로 먹게 하였습니다. 이 의사는 일종의 오두미교의 집회 장소와 같은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두미교의 간부들인 좨주들은 이와 같이 교단 안에서 교사의 역할을 하는 한편 정치조직으로는 공무원과 같은 장리(長吏)의 역할을 하면서 오두미교의 교주 장로의 통치는 교단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진수의 <장로 전>은 장로는 자가 공기이고 패국 풍현 사람이다로 시작합니다. 할아버지인 장릉이 1대 장천사이고 2대는 장로의 부친인 장형이었고, 3대가 장로였습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사군(師君)이라 칭하였고 처음 입단한 사람은 ‘귀졸(鬼卒), 신앙이 두터운 사람은 ’ 좨주(祭酒)라고 불렀고, 좨주 가운데 많은 신자를 가진 경우에는 대제주, 치두(治頭)로 불렀습니다. 장로는 각지에 도장(道場) 같은 것을 세워 다스렸는데 처음에는 24개였다가 뒤에는 별자리인 28수(宿)에 맞추어 28개로 늘렸습니다.      


한중 아래의 익주를 다스리던 익주목 유언이 죽고 아들 유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장로의 어머니는 무녀였는데 술법을 부릴 줄 알았으며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미모를 간직하여 익주목 유언과 밀접한 사이였습니다. 장로는 모친의 영향으로 한중에서 일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장로는 어느 정도 교권이 안정된 다음 오두미교의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오두미교의 다른 지도자인 장수를 습격하여 장수가 가진 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장로는 정권과 교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자신의 아래에 좨주를 두어 그들에게 사법권을 부여하였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일체화된 관리체제를 완성시킨 것입니다. 장로는 종교의 힘을 이용하여 도덕교화를 실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저속한 풍속을 제거하여 순화시키고 사람들이 서로 진실하고 속이지 않도록 하며 범법자에게는 세 차례의 기회를 준 다음 반복되면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던 후한 말의 혼란 속에서도 파군과 한중 일대는 도리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회를 형성하였고 생산력도 안정되어 백성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후한 말의 조정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장로에게 사자를 보내 진민중랑장으로 삼고 한녕 태수를 겸임하게 하였습니다. 장로는 한중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지만 조정에 공물을 바치는 의무만은 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백성 가운데 옥으로 만든 도장인 옥인을 파낸 자가 있어서 이를 장로에게 바치면서 주변의 신하들은 장로를 한녕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로 밑에서 공조로 있던 염포가 장로에게 간언 하였습니다.     


“한중은 백성이 10만 호가 넘고, 생산물이 풍부하며, 토지가 비옥하고, 사방이 요새이니 당신이 천자를 보좌할 수 있다면 춘추시대의 패자가 될 수 있고, 후한의 광무제에게 의탁한 두융처럼 부귀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왕을 칭함으로써 다가올 재앙과 횡액을 초래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장로는 염포의 충간을 듣고 염포의 의견을 따랐다고 합니다.     

 

215년 중원을 정리한 조조는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조조가 출발한 장안과 장로가 위치한 한중 사이에는 험준한 진령산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장로는 조조의 위세를 잘 알고 있었고 조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으나 동생 장위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장위는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으로 가서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였습니다. 조조는 양주 종사와 무도에서 투항한 사람들에게서 장로를 공격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방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도착하여 살펴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조조는 험난한 지형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험준한 지형으로 고전하다 보니 무사히 돌아가는 것도 염려스럽고 식량도 떨어져 갔습니다. 적 진영을 점령할 수도 없었고 부상병은 속출하였습니다. 조조는 군사를 거두기로 결정했습니다. 하후돈과 허저가 군사를 거두어들였는데 조조군들이 밤중에 이동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장위의 군영으로 잘못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장위 군영에서는 야습인 줄로 알고 큰 혼란이 벌어졌고 군사들은 흩어져 각기 달아났습니다. 시중 신비와 주부 유엽이 아직 상항을 파악하지 못했던 하후돈과 허저에게 조조군이 장위 군의 주요 군영을 점거했고 적은 도주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조조군이 장위의 군대를 격파하고 양평관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로는 항복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염포가 말했습니다.

“지금 항복하면 상황이 급박하여 투항하는 것이니 조조가 가볍게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박호로 달아나서 항거하다가 귀순한다면 귀하게 대접받을 것입니다.” 

장로의 부하들은 도주하기 전에 보화와 창고들을 불태우고 가려고 하였지만 장로는 “지금 달아나는 것은 예봉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지 나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이다.”라고 말하며 창고를 닫은 채 달아났습니다. 조조는 남정현을 점령한 후 장로가 창고를 불태우지 않고 도망간 사실을 가상하게 여기고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장로가 항복하자 파촉 지역의 이민족인 파와 한도 항복하였습니다. 215년 9월 파(巴)의 칠성이 박호와 종읍후 두호가 파이와 종민(賨民)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조조 입장에서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승리를 얻은 조조는 장로를 영접하여 진남장군으로 삼아 빈객의 예우를 했으며 낭중후로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습니다. 장로의 다섯 아들과 염포를 열후로 삼았으며 아들 조팽을 장로의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원후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아들 장부가 작위를 계승하였습니다.    

  

3. 오두미교의 또 다른 지도자들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 후 <한천사세가>에 따르면 장로의 셋째 아들 장성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오두미도의 4대 천사가 되었고 위나라에서 받은 봉거도위라는 벼슬을 거절하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검과 도장을 가지고 사천 방면으로부터 파양호를 거처 용호산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1대 장천사 장릉이 만든 현단(玄壇)과 금단을 만들려 했던 아궁이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곳을 오두미교의 본산으로 하고 가르침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주장에는 23대 천사 장계문까지의 <한천사세가>의 기록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24대 천사 장청수부터는 정일교의 교주 장 씨가 용호산을 본거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1949년 장개석과 모택동의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본토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파천을 하였을 때 오두미교의 지도자인 63대 장천사였던 장은박이 국민당 세력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두미교 명맥을 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08년에는 64대 장천사인 장위안션(張源先)이 사망하였지만 아직도 도교계열의 오두미교의 명맥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장로가 염포의 건의를 잘 따른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난세에는 민중들은 종교에서 길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조조에게 투항한 오두미교의 장로는 그 명맥을 이어갔고 끝까지 대항한 장각, 장보, 장량 삼 형제는 황보숭 장군에 의하여 토벌되었습니다. 황건적의 남은 무리는 조조에게 투항하여 청주병이 되었고 황건적 잔당이었던 공도는 유비를 도왔던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조조가 천하의 패권을 잡았지만 4대 만에 권세를 잃었고 오두미교는 지금까지도 명맥이 살아있는 것을 보면 또 다른 시각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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