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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Mar 06. 2023

여포는 장비에게서 삼성가노란 욕을 들었는가?

1. 여포는 정말 배신의 아이콘인가?      


2003년 출판된 소설가 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3인 공저는 여포를 삼국지에서 가장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포는 중국에서 가장 구석진 변방 출신으로 가정적으로 지역적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힘 만으로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여포의 고향은 병주에서도 오지인 오원군 구원현이었습니다. 오원군은 초원지대로 본래는 유목민족의 거주지였고 장성이 쌓인 이후에도 한족과 몽골족이 잡거 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변방에서 국경선을 지키는 병사들이나 몽골족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 일부 개척민, 그리고 강제노역에 끌려온 죄수들이 거주하고 있있으며 대부분 빈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포는 이 삭막한 변방에서도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한 인물로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믿을 것은 자신의 몸 하나뿐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포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출중한 용모와 무용을 지니고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여포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온몸이 근육질로 우람한 체격에 번개처럼 빠른 인물이었습니다. 변방의 거친 사내들도 여포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여포가 말을 달리며 화극을 휘두르면 마치 하늘에서 신장이 내려온 것처럼 위엄이 있었습니다. 병주에서는 예로부터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무용이 뛰어난 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병주자사 정원이나 하내태수 장양처럼 아무런 가문의 배경 없이 무술 실력만으로 입신출세한 자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무공이 뛰어난 여포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롤모델로 삼아서 커다란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포는 처음 병주자사 정원에게 부름을 받아 정원의 주부로써 처음 출사하게 되었습니다. 정원은 그에게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여포는 더 큰 출세를 위하여 정원을 배신하였고 정원의 목을 베어 동탁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었습니다. 낙양에서 오직 정원만이 동탁에게 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동탁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으나 동탁의 시비와 사통한 것을 계기로 서로 사이가 틀어져 같은 병주 출신의 왕윤의 이간계에 넘어가면서 결국 동탁을 척살하고 말았습니다.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에 임명하고 가절을 주며 삼공과 같은 의례로 대하고 온후로 봉하여 함께 조정의 정치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동탁을 죽인 지 두 달 만에 여포는 동탁의 부장들인 이각 곽사에게 전투에서 패하고 왕윤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여포는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포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원술, 원소, 장막, 유비 등 여러 군벌들의 군영을 철새처럼 떠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여포에게는 배신자라는 아이콘이 덧씌워져 주변으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었고 결국 하비에서 조조군에 의하여 포위되던 중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포로의 몸이 되어 백문루에서 목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여포가 배신자인 것은 맞지만 난세였던 삼국지 시절 동탁을 선택한 이유 하나만으로 여포는 모든 장점이 가리어지고 왜곡되어 버리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여포에게는 동탁을 선택한 것도 동탁을 암살한 것도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헌제가 존재하는 시기에 동탁을 암살한 것은 청류파의 입장에서도 대의명분이 있는 자랑할만한 일이었지만  유독 여포에게는 가혹한 평가가 뒤따랐습니다. 원소와 조조, 왕윤 조차도 한때는 동탁의 명령을 받던 존재였음에도 여포에게만 배신의 아이콘이 생긴 것입니다.   

   

삼국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난세를 살면서 대부분은 한두 번씩 투항한 사람들이고 한두 번씩은 배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정의의 편으로 인정받아온 유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비는 공손찬의 부장으로 시작하여, 서주의 도겸으로 주인을 바꿨고, 한때 여포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조조와 손을 잡고 여포를 쳤습니다. 이후 다시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에게 달아났다가 유표를 거쳐 손권에게 의지했으며 최후에는 유장의 신뢰를 배신하고 그의 익주를 빼앗아버렸습니다. 물론 유비와 여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비는 한실 중흥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여포는 눈앞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고, 유비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홍보의 대가였으며 때로는 손해도 감수하였으나 여포는 본능에 충실하여 당장에 이롭다면 이익에 충실하였습니다. 결국 여포는 최측근 부하들에게 배신당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2 여포를 위한 변명      


동탁이 죽은 후 한때 여포는 원소,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주의 원소- 허도의 조조 – 서주의 여포라는 대립구도가 설정된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포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장정일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포가 의부를 두 명이나 살해하는 파렴치한이었다거나 오직 싸움만 잘하는 사나이였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정사에서는 여포전에서 여포가 한족임을 전제하고 서술하고 있지만 장정일은 여포가 정통 한족이 아니라 몽골 계열의 유목민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포의 고향인 오원은 오르도스 사막에 가까운 현재의 몽골지역으로 여포는 한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가장 경멸하는 흉노족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몽골족의 지배를 받던 원나라 말기의 나관중의 관점에서는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은 금수의 무리요, 원수였고 여포에 대한 삼국지연의의 평가는 여포가 싸움을 잘하지만 가장 경멸스럽고 비굴한 모습으로만 묘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여포를 폄하하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관점에서도 여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자는 의복과 같다”라고 말하며 행동하는 유비는 전쟁터에서 처자식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 한 몸만 생각하고 도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여포는 딸을 원술에게 시집보낼 때 어린 딸이 행여나 다칠까 봐 비단으로 제 몸과 한 몸이 되게 칭칭 감은 후 직접 호송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딸을 끔찍하게 아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입니다. 또 여포는 하비성에서 성을 나가서 조조와 결전을 치르자는 진궁의 계책을 부인 엄 씨나 초선의 말만 듣고 계획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처첩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서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행동은 여자를 귀하게 여기던 유목민족의 습성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유교 문화권에서는 경멸의 대상인 행동이었습니다.      


여포와 유비 사이에서 여포는 유비를 친아우 이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포는 여러 번 유비의 도전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유비가 세력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포가 유비를 좋아한 이면에는 자신이 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고독과 괴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감정들이 마찬가지로 변방 출신이라고 생각한 유비에 대한 강한 애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포가 유비를 초대하여 자신의 아내에게 잔을 따르게 한 것은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대접이었지만 유비는 이것을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생각하고 여포에 대한 경멸이 내심 더하여졌습니다. 여포에게 유비는 친아우 이상의 존재였지만 유비에게 여포는 일개 오랑캐에 불과하였습니다. 여포는 원술이 기령이라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방천화극의 끝을 화살로 맞추는 신궁의 솜씨를 보여주어 전쟁을 막아주었지만 여포의 기마군단의 위력을 항상 염려하고 있던 유비는 여포와 조조가 결합했을 때의 위력을 상상하면서 여포의 운명을 가름하는 백문루에서 여포를 용서할 것을 고민하는 조조에게 정원과 동탁을 이야기하면서 여포의 마지막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아놓았습니다. 만일 조조가 여포를 용서하여 여포가 조조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살았다면 이후로는 별다른 위기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갔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포는 마지막까지 유비가 자신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가 유비의 마지막 비수와 같은 말을 듣고 유비를 가리키며 “저 귀 큰 아이야 말로 가장 못 믿을 놈이로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참수당하였습니다.      


여포가 죽은 후 나관중은 그의 가족이 당시의 제후로는 보기 드물게 두 명의 부인과 딸 하나만 남았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관습으로는 아들이 없이 딸만 둔 점과 처첩이 두 명뿐인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관중은 여포가 호색한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전후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장정일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포가 하비성에서 주색에 찌들어 대사를 그르치는 장면은 여포에 대한 중상모략에 가까운 왜곡이라고 장정일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허물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포는 의부인 동탁을 죽인 사람으로, 조조는 아버지 조숭의 복수를 위하여 서주의 양민을 대량학살한 사람으로, 손책은 자신을 아들처럼 대해준 원술의 배신자로, 유비는 여포에 대한 배신과 동승과 거사를 모의하였으면서 혼자만 동망가는 비겁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유독 여포에 대한 평가만은 가혹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비가 여포를 상대로 욕을 했었는지를 살펴보면 삼국지연의의 호로관과 사수관 전투에서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자 동탁의 에이스 여포가 나타납니다. 공손찬이 여포와 싸우다 결국 도주하다가 방천화극에 찔릴 위기에 장팔사모를 잡고 나는 듯이 말을 몰아오는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장비였습니다. 장비는 “세 가지 성을 가진 종놈아, 게 섰거라. 연인 장비가 여기 있다!”라고 외칩니다. 장비와 여포가 50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관우가 달려들어 다시 30여 합을 싸웠어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아 유비가 나서자 여포는 지친 나머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는 장면입니다.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는 동탁 토벌 연합군에 참여한 사실이 기록된 것이 없으며 당연히 장비가 여포와 만나서 싸울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화웅을 죽인 장수는 관우가 아닌 손견이며 화웅이 사수관으로 나설 때 여포를 대신하여 나서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려하십니까?”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 말은 화웅의 말이 아니라 그보다 수백 년 전 공자가 무성이라는 고을을 다스리는 제자 자유에게 한 말을 나관중이 그럴듯하게 인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명나라 작가인 나관중의 창작이라는 것입니다.      


3 작가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명나라의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원나라 시절 간행된 <삼국지평화>를 많이 참조했다고 합니다. 송나라 이래 중국 민간에서는 장편 역사 이야기 공연을 ‘강사’로 불렀는데 처음에는 ‘창’으로 하다 점차 창 없이 이야기로만 공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이 점차 독서물로 문자화된 것을 부르는 양식이 ‘평화’라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나라의 삼국지 평화에서는 삼국지연의와는 다른 줄거리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왕윤이 궁궐에서 동택이 황제의 비빈을 희롱하는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우울하게 앉아 있는데 한 여인이 홀로 향을 사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왕윤이 그 여인을 불러 사연을 물어보니 초선이라는 여인이 말하기를

“천첩은 성이 임 씨이고 이름은 초선인데 지아비 이름은 여포입니다. 간쑤 성에서 헤어진 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향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왕윤은 초선의 미모를 보고 몹시 기뻐하며 금은보화와 비단을 초선에게 주어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왕윤은 초선이 동탁의 부인이었던 사실을 알면서도 동탁에게 보내자 화가 난 여포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칼을 들고 동탁의 방 안으로 들어가 욕설을 퍼부으며 “간악무도한 늙다리 역적 놈아”라고 외치며 단칼에 동탁의 목을 베자 선혈이 샘처럼 솟구쳤고 여포는 동탁을 다시 찔러 숨을 끊었다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삼국지평화에서의 여포의 모습은 삼국지연의에서보다는 더 공감이 가고 오히려 왕윤은 냉혈한 모사가의 냉정한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이 지난 1천 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한 요시카와 에이지(1892~1962)가 1939년부터 1943년 사이에 신문 지면을 통하여 삼국지를 연재하였습니다. 유비를 중심으로 정통성, 명분을 강조을 강조하던 유교적 가초관에서 처음으로 삼국지 인물인 조조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 작가가 요시카와 에이지 였습니다. 요시카와 본인은 자신이 중일전쟁에서 중립파라고 선언했지만 삼국지 해석에서도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세간의 중평이었습니다.      


요시카와의 삼국지에서는 유비와 유비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유비는 효를 다하려 하지만 유비의 어머니는 유비를 꾸짖으며 충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비가 어머니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사 왔을 때, 조정에서 감찰을 나온 독우를 매질하고 쫓기는 신세에서 어머니를 뵈러 왔을 때 어머니가 충을 강조하는 것은 요시카와의 삼국지에서만 나타나는 특유한 모습으로 요시카와 개인의 창작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의 사무라이 정신, 충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일본의 전쟁 선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조가 자신의 아버지 조숭이 죽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거병하는 것은 정당성이 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시카와의 삼국지에는 조조의 서주대학살에 대한 묘사가 전무합니다. 서주대학살은 제갈량을 비롯한 많은 서주 출신의 인물들이 조조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만든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시카와가 삼국지를 연재하던 시기인 1939년은 1937년의 일본군의 난징대학살과 인접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일제 식민지 시절 만해 한용운이 삼국지를 연재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한용운이 삼국지를 연재한 목적은 전쟁으로 시달리는 조선 백성들에게 자그마한 즐거움을 주려는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요시카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상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불편했으라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서주대학살을 벌인 조조를 잔혹함보다 냉정한 모습으로 요시카와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조가 반동탁연합군을 모으기 위하여 지역 유지인 위홍에게 군자금 지원을 부탁하는 장면에서 “혹시 거절의 뜻을 밝힌다면 살려서는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작정으로 진지하게 담판에 임했으므로 조용히 부탁하는  사이에도 조조의 눈동자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음이 틀림없었다.” 요시카와는 조조에게서 일본군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인인 요시카와는 같은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대학살과 유사한 서주대학살을 벌인 조조를 비난하는 표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어이없지만 중일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작가도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시카와 역시 시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 최고의 소설가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관점으로 나관중도 몽골족의 원나라의 지배를 치욕으로 여기는 한족이 세운 명나라의 소설가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삼국지연의를 저술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하고 삼국지를 읽어간다면 우리는 삼국지에게 읽힘을 당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삼국지를 사람이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때로는 진나라 사람이고, 원나라 사람이고, 명나라 사람이며, 때로는 대일본제국 사람임을 생각하면서 삼국지를 읽어나가야 하는 것이 21세기의 삼국지 독서법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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