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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Mar 11. 2023

제1화. 황건적의 난

    

 184년 후한 말기는 난세 그 자체였습니다. 서방에서는 강족이 빈번하게 쳐들어오고 메뚜기떼는 창궐하였습니다. 후한 조정에서는 국세 수입은 줄어들지만 지출할 곳은 늘어만 갔습니다. 삼촌인 환제에 이어 황제에 오른 조카 영제는 해결책을 매관매직에서 찾았습니다. 과거 명예직인 작위만 돈을 받고 팔았던 전통을 뛰어넘어 지방관직을 돈을 받고 판다는 기발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영제가 관직을 팔기 시작한 지 10년 만인 184년 황건적의 반란이 낙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인 희평(172-177) 연간에 전한의 수도 장안 인근에서 낙요는 은신술을 비롯한 이적을 보이며 무리를 모았고, 광희(178-184년) 연간에는 중원의 동쪽에서 태평도의 장각이 무리를 모았고, 서쪽인 한중에서는 오두미도의 장수가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제자백가가 나서서 백가쟁명 하던 시절이었으나 이를 통일한 진나라는 법가인 순자의 제자인, 이사를 재상으로 삼으면서 군사력으로 천하를 통일하면서 자신은 삼황오제의 덕을 갖추었다며 종전의 왕 대신에 황제를 자칭하였습니다.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진시황이 죽자마자 각지에서 터지는 반란으로 이어졌고 천하는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거쳐 한나라에게로 천명이 돌아갔습니다. 한나라는 무제에 이르자 유학자인 동중서의 주장을 받아들여 오직 공자의 말씀만을 천하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갔습니다. 잠시 왕망의 신(8-23) 나라가 등장하였지만 후한의 광무제 유수는 남양에서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유 씨 혈통으로 황제 자리를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전한이 2백 년 만에 망했듯이 후한도 2백 년이 지나자 내부로는 환관과 외척의 싸움이 격화되었고 외부로는 강족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은 공자의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보았지만 서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에 반응하는 태평도와 오두미교의 종교조직의 도움에 반응하였고 도교 종교조직은 급속하게 그 세를 불려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력이 강해지자 종교지도자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의지와 결합하여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사 최고의 혼란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거록군에서 태어난 장각은 젊어서는 학업에 뜻을 두고 정진하다가 남화선인이라는 도인을 만나 태평도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남화선인이 장자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장각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자신도 굶주리면서 탁발한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약초를 캐어 약을 만들어 정성껏 치료하였습니다. 친척이 없어 사람이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고아와 과부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태평교단은 무섭게 성장하였습니다. 날이 바뀌면 수천 명씩 교도가 늘어났습니다. 전국의 신도가 수십만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주와 군 단위로 대방과 소방을 두어 교단을 관리하였습니다. 대방은 신도가 1만, 소방은 수천 명에 달하였습니다. 각 방의 우두머리는 방주 또는 거수라 했고 전국에 방이 36개에 이르렀습니다. 태평도라는 독자 교단으로 포교를 하기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의 일입니다. 현재까지도 중국 역사를 통하여 독립된 교단 조직을 갖춘 대형 종교는 다섯에 불과합니다.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입니다. 이 중에서 도교만이 외국에서 전래되지 않고 중국 고대의 문화와 종교에 근거하여 온 토박이 종교입니다. 삼국지의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은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위 오 촉의 삼국은 물론 삼국을 통일한 서진과 강남으로 이주한 동진 모두 100년을 넘기지 못한 왕조였지만 지금까지도 삼국지의 오두미교의 명맥을 이어받은 조직은 현재 장원장이라는 지도자가 65대 장천사를 승계하여 대만에서 조직을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장각은 마침내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지방 관헌들이 태평도를 선도(善道)라고 호평하며 호의적이었으나 너무 커지다 보니 조정과 관원들의 의심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인 유도는 장각의 태평도의 무리를 염려하면서 더 커지기 전에 신도들을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우두머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황제인 영제는 천하의 일에 무심하였지만 점차 조정의 고관들의 눈초리는 매서워져 갔습니다. 장각은 양주의 대방 마원의를 통하여 양주, 형주의 황건교도 3만 명을 업성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황궁 내의 중상 시 봉서, 서봉 등의 환관들과도 줄을 닿도록 하여 3월 5일 일제히 봉기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각 방을 맡고 있는 장수들도 장각의 하명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각은 사전 점검을 위하여 교단의 중진들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이윽고 제남의 당주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주는 장각의 초기 제자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장사치 출신으로 많은 재물을 모은 자인데 정세 판단이 빠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인물이었다고 장각은 판단하였습니다. 장각은 당주를 불러 조용히 낙양을 살펴보고 돌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당주는 낙양에 도착하였습니다. 낙양의 거리는 아직 질서 정연하였고 도성과 황궁을 지키는 금군은 정예하였고 병장기와 갑주는 번쩍였습니다. 장각에게 들었던 환관 봉서와 서봉의 무리들은 낙양에서 존재감이 없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당주는 낙양 주변의 태평교도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였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봉기에 참여하였다가는 자신이 평생을 일구어 놓은 재산과 자신의 일가는 하루아침에 망조가 들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당주는 낙양의 마원의를 찾아가는 대신 바로 궁성으로 가서 태평도의 모반을 고변하였습니다. 이 첩보를 접한 영제는 기민하게 대응하였습니다. 즉시 태위 주장 등 삼공과 수도권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례교위 주빈 등을 소집하여 궁성 수비 병력을 동원하여 낙양에 거주하는 태평도인 1천여 명을 색출하여 처형하였습니다. 마원의도 체포되어 낙양의 시장터에서 거열형에 처해졌습니다. 영제는 처남인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군권을 일원화시키고 함곡, 대곡, 광성 등 8개의 관문에 도위를 배치하여 낙양을 방어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장각은 봉기를 약속한 3월 5일 하루 전에 모의가 탄로 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접하고 갑자기 충격을 받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각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각은 이제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낙양의 신도들이 모두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부하들은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여 보고하였습니다. 형주와 양주의 신도 3만이 무장한 채 대기 중이고, 예주와 형주의 각 군에도 각각 수만의 신도들이 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장각과 태평도의 간부들은 밤을 새우며 전국의 36 방에 전갈을 보내 봉기를 명령하였습니다. 업성에 주둔한 예주 영천 대방의 수령 파재와 여남 대방의 팽탈도 명령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주에서의 싸움은 지공장군 장보가 지휘를 맡았고 연주에서는 동군대방 복기가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남양 대방의 장만성에게는 남쪽에서 낙양을 향하여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천공장군 장각과 인공장군 장량은 업성에 남아있었습니다.      


파발들이 각 지역의 대방에 도착하기까지는 2-3일이 걸렸습니다. 실제로 황건적은 3월 7일에 봉기하였습니다. 형주의 황건적 장만성이 남양태수 저공을 급습하여 살해하였습니다. 이들은 남양군의 치소인 완성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쳤습니다. 영천의 파재는 장사를 근거지로 삼은 다음 낙양을 향하여 진격했습니다. 여남의 팽탈은 여남태수 조겸의 관군을 격파하고 기주에서 업성을 점거한 다음 천공장군 장각의 고향인 거록군과 인근의 광종, 하곡양 등을 점거하였습니다. 유주의 황건적들은 유주자사 곽훈과 광양태수 유위를 죽이고 광양을 점거하는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동안 혹독한 폭압과 수탈에 허덕이던 일반 백성들과 고향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유랑민들, 각지에 할거하던 도적들까지 합세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주와 군의 관리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어제까지 위세를 부리던 자사, 태수 등 지방장관들과 그들의 속관들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난을 일으킨 지 열흘 만에 천하가 호응하자 조정 관리들은 물론 봉기를 일으킨 황건적 자신들도 놀랐습니다. 봉기한 교도들은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러 표식을 삼았기에 ‘황건적’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태평도가 외친 구호 중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감동시킨 것은 “창천은 이미 죽었다. 황천이 서야 한다. 이해는 갑자년이니 천하가 크게 길하다”(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라는 구호였습니다. 이 구호는 후한의 폭정에서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천지개벽의 혁명을 알리는 정치적 구호이자, 태평도의 종교 신앙과 한나라의 현실 정치가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선언이었습니다. ‘창천은 이미 죽었다’는 말에서의 창천(蒼天)은 군주에게 권력을 수여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명분을 주는 하늘의 상제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제 태평도는 관이 숭배하는 천신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부정하고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황천이 서야 한다”의 황천(黃天)은 태평도가 세워서 신봉하는 천신으로 이는 통치자인 황제를 위하여 복무하는 신이 아니라 새로운 태평 군의 봉기와 정권탈취를 위하여 지켜주는 신을 가리키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낙양의 중앙 권력을 탈취하고 앞으로 천하를 점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정치적인 구호인 것입니다. ‘황천(黃天)’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대중화된 용어이고 태평도가 신봉하는 천신은 ‘중황태을(中黃太乙)’을 통속화시킨 단어입니다.      


장각이 사용하던 종교적 언어들은 장각 자신이 만들었다기보다는 후한 시대의 대중들의 정서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보아야 하는 내용들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 8-23) 나라를 세운 왕망은 유학자들이 숭상하는 주나라의 제도인 정전법 등의 부활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참위설을 이용하여 자신이 천명을 받아 황제가 되게끔 정해졌다며 불(火)의 덕을 가진 한나라를 이제 흙(土)의 덕을 가진 신(新)으로 교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왕망의 지지세력 결집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비적 경향을 좋아했으며 그 힘을 얻기 위하여 왕망도 스스로를 신선왕이라고 칭하였고 결국 전한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왕망을 물리친 후한의 광무제도 참위설을 믿고 의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광무제는 자신이 한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혈통 문제를 유비처럼 강조하면습니다. 한편으로는 왕망의 신(新) 나라라는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반복되는 기근을 들어 왕망을 공격하였습니다. 당시 눈썹을 불게 칠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적미(赤眉)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불의 덕을 나타내는 붉은색을 강조하면서 오행설을 믿고 있는 무리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감안하면 당시의 반란군들이 믿고 의지하던 참위설에서의 참(讖)은 예언을 말하고 위(緯)는 직물의 세로줄을 의미하는데 참위(讖緯)는 원래의 의미는 유가 경전의 주석을 의미하지만 실제 내용은 음양오행과 길조와 이상한 징후 신선 등의 이야기를 담은 도교 사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공자의 유가는 굳건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나라 무제 이래로 중국의 정통 사상으로 자리 잡아서 공산당 시절 비림비공 운동으로 공자가 비판받은 시련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다른 나라에까지 공자학당을 세워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이민족 정권하에서도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과 관우의 무덤인 관림(關林)은 황제의 무덤인 릉(陵) 보다 더한 숭배의 대상으로 신격화되었던 존재입니다.      


후한 말기의 삼국 시대와 위진 남북조 시대는 중국 역사의 최대의 혼란기입니다. 중국사의 위진남북조 전문가인 권중달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위진남북조와도 같은 혼란기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태평도의 장각은 일망타진이 되었지만 서민들의 종교였던 도교는 면면히 살아남아서 오두미교의 교주 장로를 통하여 상류층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장로는 조조와 사돈이 되면서 공인된 종교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 결과 명필로 유명한 동진의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휘지 왕헌지의 이름에 나타나는 지(之) 자는 도교 신도라는 증표라고 합니다. 도교가 상류층의 종교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각의 대담함은 조조를 능가합니다. 한나라 유방의 후손인 유 씨만이 황제와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한고조의 한마디의 힘은 삼국지 최대의 세력을 떨치던 원소를 격파한 조조조차도 황제에 오르는 것만은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라는 난세를 거치면서 달라졌습니다. 조조의 손자는 황제였지만 백주대낮에 병졸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유교의 힘은 설득력을 잃어갔고 지식인들은 관직을 포기하고 겉으로는 죽림칠현의 삶을 이상으로 삼기도 하였고 황제와 황후들은 극단적인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패했지만 안정된 사회였던 후한의 사회가 아노미에 빠지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 황건적을 막기 위하여 지방의 행정장관에게 군사권을 부여하자는 유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둘째, 국경수비대장인 동탁이 낙양을 점령하여 상국이 되었으며 셋째, 지방의 제후들이 반동탁파를 자처하면서 독립 군벌화가 되는 3가지 사건은 모두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황건적의 반란은 장각이라는 태평도의 종교지도자에 의하여 출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에 대응하는 조정의 반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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