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가방 Apr 03. 2023

<제2화> 한(漢) 나라의 대응

1화 황건적의 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영제가 하태후의 오빠인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낙양 주변의 8개 관문을 설치하고 각 관에 도위를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황건적들의 초기 기세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태평도들이 머물고 있던 지역은 그 지역 관부를 불태우고, 촌락과 읍을 약탈하기 시작하자 주와 군은 그 거점을 상실하였고, 높은 직급의 관리들은 대부분 도망쳤습니다. 한 달로 안 되는 사이에 반란의 흐름은 동부에서 서부로 전파되었고 안평(허베이 성 기현) 사람들은 안평왕 유속을 사로잡고, 감릉(산동성 청평현) 사람들은 감릉왕 유충을 사로잡아서 황건적에 호응하였습니다. 원래 제후왕들은 중앙 황실의 울타리 역할이 기대되는 존재인데 초기의 황건적의 기세로는 사실상 진압이 불가능해졌고 일반인들조차 조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황건적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벌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후한 조정에서는 지방에 독자적인 군사권을 부여하였고 황건적 토벌을 위하여 북중랑장 노식을 파견하여 장각을 진압하도록 하고, 조중랑장 황보숭과 우중랑장 주준에게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영천은 낙양과 100여 리 정도 거리였으므로 황건적이 이미 낙양까지 위협하는 상태임을 알고 급하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 황보숭과 주준에게 4만의 군사로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시켰으나 주준은 황건적 파재와의 전투에서 패하였고 황보숭은 간신히 장사를 수비하는 상태였습니다. 

 

영제가 황건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군신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북지태수였던 황보숭은 건의하였습니다. 황보숭은 청류파 지식인들과 황건적이 손을 잡을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미연에 차단하려면 ‘당고’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당금을 해제하고 황실 금고인 중장전에 있는 돈과 황제의 마구간인 서원에 있는 말들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황보숭은 환관들에 의하여 지방으로 쫓겨나서 금고에 처해진 사족들에게 금고형을 해제시키어 그들에게 황건적 토벌의 역할을 맡기고, 황실 금고의 돈과 황제의 마구간의 말들을 내어놓아 황건적 토벌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이었습니다. 

영제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므로 환관인 중상시 여강을 불러 의견을 물었습니다.

“당고가 오래되어 사족들의 마음에 원한과 분노가 쌓여 있으므로 이들이 황건적과 함께 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만일 사면하지 않는다면 쉽게 장각과 더불어 모의할 것입니다. 그 후 변란이 더욱 커진다면 이를 후회해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영제는 환관 여강의 말을 듣고 황건적과 사족들이 결탁할 것을 염려하여 당고의 금으로 금고에 처한 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귀양 간 사람들을 돌아오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초기의 전황은 낙양에 있는 황제를 안심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주준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도리어 들려오는 소식은 여남태수 조겸, 유주자사 곽훈, 유주 태수 유위가 패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직 황보숭만이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고 있었으나 병력이 적어 황건적 파재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황보숭은 마침 불어오는 큰 바람을 이용하여 황건적의 영채에 불을 놓으면서 큰 소리를 질러 적들을 놀라 달아나게 하면서 처음으로 황건적을 대파하는 승리를 거두는 전과를 거두는 공을 세웠습니다. 황보숭과 주준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여남과 진국의 황건적을 토벌하였고 양적에 있는 파재를 공격하여 추격하였습니다. 또 유명한 황건적 지휘관인 팽탈을 공격하여 패퇴시키자 드디어 영천군, 진국군, 여남군 3군이 평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황보숭은 조정에 상황을 보고하면서 주준에게 공을 돌렸고 숨을 돌린 영제는 주준을 서향후에 봉하고 진적중랑장으로 승진시켰으며 황보숭에게는 동군을 주준에게는 남양의 황건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북중랑장 노식은 황건적의 본진인 장각과 싸워 대승을 거두어 죽이거나 포로 된 자가 만 명을 넘었고 광종으로 달아난 황건적을 포위하여 참호를 파고 운제를 만들어 공격하면서 함락 직전의 상황까지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투 지휘관들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한편으로 영제는 환관 좌풍을 파견하여 현장 지휘관들을 감시하도록 하였는데 좌풍은 노식에게 뇌물을 요구하였고 노식이 이에 응하지 않자 조정에 그를 참소하여 영제는 대노하면서 노식을 처벌하고 대신 동중랑장 동탁을 불러서 광종으로 파견시켰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서량의 세력이 동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열어준 것으로 훗날 동탁의 낙양 진출의 신호탄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동탁은 성품이 거칠고 사나운 데다 꾀가 많은 인물이어서 강족과 오랑캐인들도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동탁은 노식을 대신하여 군 지휘를 맡은 다음 강공에 나섰습니다. 궁지에 몰린 황건적은 죽을 힘을 다하여 반격하자 뜻밖에도 동탁은 참패하였고 포위망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공장군 장보는 성을 탈출하여 하곡양으로 달아났습니다. 광종의 황건적은 최정예였고 궁지에 몰려있었습니다. 동탁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연주의 황건적을 황보숭이 모두 토벌하자 조정은 조서를 내려 황보숭에게 장보, 장량의 황건적도 토벌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황보숭은 인공장군 장량의 부대와 광종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정예병들인 장량의 부대는 초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보숭은 황건적들이 승리에 도취하여 방비가 해이해진 틈을 노려 한밤중에 야습을 감행하였습니다. 혼란에 빠진 황건적은 마땅한 대응을 못하고 적의 수괴 장량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 쓰러졌고 강으로 도주하다 빠져 죽은 무리들이 5만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난공불락이었던 광종성이 황보숭의 일격으로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장각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무덤을 파내어 부관참시하여 그 목을 낙양으로 보냈습니다. 황보숭은 그대로 북진하였고 하곡양에서 장보를 공격하여 장보를 참하고 10만여 명의 머리를 베어 성 남쪽에 산처럼 쌓은 후 흙을 덮고 경관을 조성하였습니다. 훗날 사마의가 명제 조예의 명으로 요동의 공손씨를 토벌한 후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경관과 동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치하하여 황보숭을 좌거기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기주목을 겸하게 한 후 괴리후에 봉하고 식읍 8천 호를 하사하였습니다. 황보숭은 조정에 노식의 공을 칭찬하는 보고서를 올렸고 그로 인하여 노식은 상서로 복직되었습니다. 이로써 황건적의 주력은 궤멸되었지만 그 잔당들은 계속 그 여기저기에서 준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88년 4월에 여남에서 황건적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에 병주의 벽파곡에서 황건적의 잔당 곽태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서량의 강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반란도 계속되었습니다. 187년에 반란을 일으킨 장순 장거가 이민족 오환족과 연합하여 쳐들어왔습니다. 공손찬이 조정의 명을 받고 이들과 싸웠으나 오환의 두령인 구력거를 무찌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유주목으로 유우를 파견하였습니다. 유우는 선정을 베풀며 인심을 얻자 구력거가 투항하였습니다. 그러자 함께 반란을 일으킨 장순은 선비족에게로 도주하였다가 189년 3월 부하인 왕정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188년에 남흉노의 선우가 황건적의 잔당인 백파적과 손을 잡고 하동에 칩입하였습니다. 

 

184년 7월에는 오두미교의 장수가 반란을 일으켜 한중군 일대를 공격하였습니다. 185년에는 박릉의 장우각과 상산의 저비연 등을 비롯한 10개의 집단이 동시다발적인 반란을 일으켜 관군을 공격하고 약탈을 감행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강족과 저족 등 이민족들도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강족들은 10여 년 동안 잠잠하다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천하가 소란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84년 10월 북궁백혹이 선령강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의 정체는 후한 시절 귀순한 이민족 오랑캐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반란 세력에 지역 토호인 변장과 한수가 합세하면서 북궁백옥의 세력이 더욱 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호강교위 영징과 금성태수 진의를 공격하여 전사시킬 정도의 세력이었습니다. 185년 3월에는 이들의 세력이 장안이 위치한 삼보 지역을 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정은 좌거기장군 황보숭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토벌을 맡겼으나 황보숭은 패전하였고 조정은 황보숭을 해임하고 사공 장온을 사령관에 임명하였습니다. 

 

장온은 185년 11월 미양현에서 북궁백옥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그들이 도주하자 탕구장군 주신에게 명하여 끝까지 추격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주신은 결국 북궁백옥을 포위하엮으나 평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북궁백옥은 187년 2월 반란군 내부의 알력으로 한수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나 한수는 10만의 세력으로 농서군과 한양군을 공격하였고 마등과 연합하여 왕국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관중의 삼보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189년 2월 진창에서 황보숭의 군대에 의하여 패전하였고 한수 등은 왕국을 몰아내고 한양군 사람 염충을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반란을 계속하였습니다. 얼마 후 염충이 죽자 다시 내분이 일어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염충은 황보숭에게 나타나 한신에게 나라를 세울 것을 권한 괴철처럼 황제가 될 것을 권했던 인물이며, 무명의 가후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던 인물인데 막상 자신은 변방의 반란군의 허수아비 두령이 되어 허무하게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 되는데 그쳤던 아쉬움이 남는 인물로 보입니다. 이처럼 영제 시절에는 황건적의 난을 비롯하여 수많은 반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일어났는데 환제의 아들도 아닌 영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황제에 추대되었는지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167년 환제 영강 원년 12월에 파란 많은 환제 유지가 궁궐에서 붕어하였습니다. 36세의 나이였습니다. 환제는 황후가 3명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황후가 된 여인은 두묘였습니다. 두묘가 황후가 된 이유는 그녀의 가문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환제는 궁녀 출신의 귀인 전성을 총애하여 전성을 황후로 삼고자 하였으나 진번이 나서서 미천한 집안 출신보다 명문가 출신의 두묘를 적극 추천한 것이었습니다. 명문가이며 호족 출신인 진번이나 두무 입장에서는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두묘의 증조부는 후한의 개국공신으로 사도를 지낸 두융이었고, 아버지는 대장군 두무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3대 황제인 장제의 부인 두 황후의 사촌 손녀이고도 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좋은 가문이었지만 황후인 두묘는 환제의 관심을 받지는 못한 찬밥 신세였지만 남편인 환제가 죽고 나자 가장 중요한 차기 황제의 선출권이 황후인 두묘의 손에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환제는 아들은 없고 생모를 알 수 없는 3명의 공주만을 남겼습니다. 두묘가 실제 한 일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황후자리를 뺏긴 궁녀 출신의 환제의 애첩인 귀인 전성을 죽인 일과, 친정아버지인 두무를 괴리후에 봉하고 성문교위로 승진시켜서 궁성의 치안을 맡기면서 모든 실권을 자신의 친정아버지인 두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다음 황제의 결정권은 넘겨받게 된 두무는 세평이 좋은 청류파 인물이었습니다.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고 가솔들이 먹고 입을 정도의 재물만을 가졌고 황제와 황후로부터 받은 재물들은 모두 태학의 학생들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두무는 당시 부패한 환관들을 비판하다 당고의 화를 당한 태위 진번을 위하여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하여 천하에 사면령이 내려져 감옥에 갇힌 청류파 지식인 200여 명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종신토록 관직에는 등용되지 못하는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청류파 인사인 두무가 후임 황제의 결정권을 맡게 된 것입니다. 두무는 시어사 유조를 불러 의논하였습니다. 황실 인물 가운데 똑똑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자문하였습니다. 시어사 유조는 해독정후 유굉을 추천하였습니다. 유굉은 전임 환제의 당질이었습니다. 당시 환제의 동생이 있었지만 생존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였고 다른 후보자가 있었어도 당시 황태후가 될 두묘가 후궁으로 입궐한 지 2년 정도에 나이 또한 20살이 넘지 않았을 것이므로 황태후보다 연장자는 곤란하였으므로 황제 역시 당시 12살이었던 유굉이 적당한 나이였던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두무는 즉시 유굉을 황제로 모시는 절차를 진행하였고 168년 조정은 진번을 태위로 삼고 대장군 두무, 사도 호광의 체제를 갖추고 유굉을 환제 유지가 붕어한 지 23일 만에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여 등극시켰습니다.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유학자인 노식은 올바른 황제를 선택하려는 고민이 없이 단지 족보의 순서에만 의지하여 선택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두무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두무와 두 태후는 태위인 진번을 중용하였습니다. 진번이 두묘를 강력하게 황후로 추천하였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번에게 은혜를 입은 두 태후는 정사를 진번에게 위임하였고 진번과 두무는 조정의 핵심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궁궐 내부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어린 황제 영제의 유모인 조요와 모든 내관들인 여상서가 12살의 어린 영제를 대신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두 태후 곁에 모이면서였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중상시 조절과 왕보와 함께 무리를 결성하여 궁궐에 들어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두 태후를 섬겼습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두 태후는 환관과 여내관들의 아첨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빈번히 작위와 관직을 내려주었습니다. 

 

청류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두무와 진번은 두 태후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행사하였고 환관들은 12살의 영제와 아직 나이 어린 두 태후를 둘러싸면서 인의 장막 안에서 그들의 힘을 카워나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환관과 외척 세력들은 언젠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패배한 쪽에게는 처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회에는 그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제1화. 황건적의 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