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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pr 03. 2023

<제3화> 영제 시대의 실세는?

영제가 제위에 오른 후 청류파 사족 집단을 대표하는 진번과 두태후의 아버지 두무는 중상시 일파를 미워하였습니다. 진번이 두무에게 말하였습니다.

“조절과 왕보 등이 먼저 돌아가신 환제 시절부터 나라의 권력을 잡고 농단하여 온 나라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히니 지금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반드시 그들을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진번과 두무는 전 황제 환제 시절부터 국정농단의 주역인 환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상서령 윤훈을 끌여들여 마침 하늘에 일식이라는 변고가 일어난 것을 기회로 이들을 처단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진번이 두무에게 제의를 하였고 아버지 두무는 황후인 두 태후에게 환관 제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전에는 환관들이 궁중의 드나드는 곳에서만 일을 해왔는데 현재는 정사에 관여하고 중요한 권한을 맡아서 탐욕스럽고 포악한 짓을 일삼고 있다며 이를 제거하여여 한다고 그 이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서 2년간 환제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환제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 환관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어린 두 황후는 아버지인 두무의 말에 예전처럼 고분고분하게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 초기 이래의 전례를 살펴보아도 대대로 환관이 있었는데 죄 있는 사람만 죽여야지 어찌 다 폐출할 수 있겠습니까?” 

두 황후의 반대로 아버지 두무와 진번이 계획하였던 환관 제거 계획은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두무는 중상시 관패가 독단적으로 지방 성의 일을 처리한다는 이유로 중상시 관패와 중상시 소강 등을 체포하여 연좌제로 죽이는 작은 성과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이후에도 두무는 두 태후에게 환관 척결을 건의하였으나 두 태후는 미루기만 하였습니다. 진번은 거듭 상소를 올려 

“폐하께서 지금 급히 이 무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나 사직이 기울어 위태롭게 될 것이니 그 화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두 태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천문에 능통하던 시중 유유가 천자를 상징하는 태미성 자리에 태백성이 침범하였다며 간신들이 주상의 곁에 있는 것이므로 신속히 결단을 내려 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두무와 진번은 일부 환관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일부 환관들을 두무 편으로 교체하였으나 두 태후가 환관 제거에 미온적이었으므로 처음 계획을 연기하고 계속 미적미적하였습니다. 

 

두무는 두 태후를 보호하고자 대궐에서 항상 거주하였는데 마침 168년 영제 건녕 원년 9월 7일 대궐을 나와 대장군부로 돌아갔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권력을 쥐고 있는 두무가 궁궐을 벗어난 것입니다. 환관들의 입장에서는 실세인 두무가 궁궐을 벗어났고 명령을 내리는 두 태후는 궁궐에 있었으므로 어린 두 태후는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두무가 없는 사이 환관 주우는 두무가 두 태후에게 올린 문서를 훔쳐보다가 환관들에 관하여 “마땅히 모두 죽이거나 폐출시켜 조정을 깨끗하게 하셔야 합니다.”라는 대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관 주우는 이 문서를 근거로 궁궐 안에 있는 모든 환관들을 단결시키고 진번과 두무가 태후를 통하여 황제를 폐위시키려 한다고 선동하였습니다. 12살에 처음 궁궐에 들어온 어린 황제인 영제 유굉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주우는 장락궁의 환관 17명을 불러 피를 마시며 맹약하였습니다. 그리고 환관의 대표 격인 조절이 황제에게 두무가 황제를 교체하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은 영제는 유모 조요에게 자신을 호위하도록 한 다음 궁궐로 향하는 금문을 폐쇄하였습니다. 환관들은 부절을 위조하여 옥에 갇힌 동료 환관들을 석방시키고 두 태후를 위협하여 인새와 인수를 탈취하였습니다. 조절은 옥에서 풀려난 환관 정삽에게 두무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공격을 받은 두무는 조카 두소와 함께 환관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군사 수천 명을 불러 모아 명령을 내렸습니다.

“황문과 상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힘을 다하는 자는 열후로 봉하고 상도 후하게 내릴 것이다.”

 

진번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속한 승상부의 관속과 문생 80여 명을 이끌고 승명문으로 돌진하였으나 바로 환관 왕보와 마주쳤습니다. 진번은 칼을 빼들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북시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환관들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그날로 진번을 죽였습니다. 밤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환관들은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쿠테타의 중심에 선 환관 조절은 임의대로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주정과 장환에게 두무를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환관 측 병사들과 두무의 병사들은 서로 대치하였으나 평소 환관들을 두려워하던 두무의 부하들인 오영교위부의 병사들은 조금씩 환관 왕보에게 귀부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대부분의 병사들이 환관들에게 항복하였습니다. 두무와 조카 두소는 도망갔으나 환관들은 이들을 추격하였고 이들은 모두 자살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환관들은 두무의 목을 베어 낙양에 효수시켰습니다. 환관들은 이들의 종친과 빈객, 인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죽이고 이 틈을 타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도 두무와 한패라고 참소하여 죽였습니다. 두무의 딸인 두 황후도 결국 남궁으로 쫓겨났고 두무의 가속들은 먼 남쪽인 베트남으로 귀양 보냈고 진번과 두무에게 천거받았던 사람들과 문생과 옛 관리들은 모두 면직되고 금고에 처해졌습니다. 

 

진번과 두무는 모두 환관들이 도를 넘었다며 환관들의 횡포에 분노하는 청렴한 사족들이었지만 황후는 당연히 자신들과 같은 명문가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호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천한 신분의 황제의 애첩인 귀인 전성이 황후 두묘에게 죽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전성은 반격할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쥐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환관 세력들은 두무가 궁궐을 떠난 지 하루 만에 기회를 살려서 판세를 뒤집어버리고 어제까지 위세를 떨치던 태위와 대장군 들을 단칼에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환관들은 순간적인 틈이 벌어지자 노회 한 내공으로 정국의 판세를 자기 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기세등등하던 사족들은 하루아침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환관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큰 뜻을 가진 것에 비하여 너무나 상대를 경시하였습니다. 

 

환관 조절은 장락궁의 위위로 승진되어 궁궐 경호를 책임지게 되었고 육양후로 책봉되었습니다. 환관 왕보는 중상시로 승진되었고 주우, 공보, 장량 등 6명은 모두 열후가 되었으며, 11명은 관내후가 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두무가 영제 유굉을 황제로 옹립한 지 1년도 안되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를 2차 당고의 금(169년)이라고 부릅니다. 

 

후한 영제 시절 정권을 농락한 환관들을 삼국지연의는 십상시라고 불렀지만 실제는 모두 12명이었습니다. 영제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장양과 어머니라 불렀던 조충 외에 하운, 곽승, 손장, 필남, 율숭, 단규, 고망, 장공, 한리, 송전 12명입니다. 후한서에는 이들이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이들의 부모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제2차 당고의 금(169년)이 영제시절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제1차 당고의 금(166년)은 3년 전인 환제 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환제는 원래 황제가 될 수 없는 자격이었지만 환관 조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즉위하였습니다. 환제는 전임황제였던 질제의 아버지 항렬이라 황제가 될 수 없는 항렬이었지만 훗날 조조라는 인물의 양할아버지인 조등과 당대의 권신 양기가 환제를 추대한 것입니다. 양기는 자신의 여동생 양납이 순제의 황후가 되면서 권세가가 되었던 인물인데, 순제가 붕어하자 2살의 어린 충제를 황제로 내세웠고 충제가 1년 만에 죽자 8살의 질제를 제위에 올린 권신이었습니다. 양기 덕분에 양씨 일족에서는 황후 3명, 귀인 6명, 대장군 2명, 열후가 7명, 부인과 딸로 식읍을 받고 군으로 불린 사람이 7명, 공주와 결혼한 사람이 3명, 구경, 중랑장, 하남윤, 경조윤, 교위 57명을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습니다. 어찌나 설쳐대던지 8살의 어린 질제가 “이 사람이 발호장군이군!”이라는 말을 하자 후환을 염려하여 질제를 독살해 버리고 다음 환제를 대타로 내세웠습니다. 환제는 질제의 숙부뻘의 인물이었지만 다른 후보지였던 청하왕 유산이 위엄있는 인물이어서 중신들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양기 입장에서는 두려운 대상이었고 환관 조등도 유산과 악연이 있었으므로 조등과 양기가 힘을 합하여 12살의 환제를 차기 대권에 앉힌 것이었습니다. 

 

12살에 황제에 오른 환제는 장성한 후에는 자신이 허수아비 황제라는 사실에 분노하며 양기를 축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환제가 27살이 되었을 때, 환제 유지는 측간으로 환관 소황문사 당형을 은밀하게 불러서 물었습니다.

“주위의 사람 중에 양기 집안과 통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당형이 대답하였습니다.

“중상시 선초와 소황문사 좌관은 양기의 동생인 양불의와 사이가 멀어져 있습니다. 중상시 서황과 황문령 구원은 항상 개인적으로 외척 집안의 전횡을 분통해 하지만 입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환제는 이 말을 듣고 우선 환관 선초와 좌관을 불렀습니다. 

“지금 양기를 죽이고자 하는데, 상시의 뜻은 어떠한가?”

선초 등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라의 간사한 도적이나 신들이 약하고 용렬하여 아직 성스러운 분의 뜻이 어떤지를 알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환제는 서황과 구원 등 5명을 불러 피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환제는 환관을 이용하여 친위쿠데타를 계획한 것입니다.

수상한 낌새를 챈 양기는 선초 등을 의심하여 중황문 장운에게 숙직하면서 변란에 대비하도록 명했으나 장운의 상급자인 황문령 구원이 장운을 잡아가두었습니다. 

환제는 직접 작전을 지휘하며 상서들을 불러 양기를 몰아내라는 명령를 내렸고 친위쿠데타는 성공하여 양기와 그의 부인 손수는 자결하고 동생들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양씨와 손씨 집안의 종친들도 모두 처형당하였고 연루된 공경, 자사, 이천석 관리 수십 명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환제는 양기를 죽이는데 공을 세운 환관 선초, 서황, 구원, 좌관, 당형 5명을 모두 현후로 봉하였고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습니다. 또 상서령 윤훈 등 7명을 모두 정후로 책봉하였습니다. 양기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득세한 환관편인 내관과 중신들을 탁류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아이러니 하게도 양기의 지지세력이었던 재야 유학자 집단을 청류파라 칭하면서 파당이 나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족들, 청류파의 입장에서는 양기가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환제 입장에서는 2살짜리 충제, 8살짜리 질제를 세웠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독살하는 질제는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12살에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성공시킨 환관들을 제후로 봉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한을 세운 한고조 유방과 달리 후한의 광무제는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를 세웠기에 초기부터 호족들은 황제를 황제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믿을 세력은 자신을 둘러싼 환관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정도 보답은 최소한의 성의에 불과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공민왕의 아들 우왕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에 의하여 자신이 믿고 있던 장인인 최영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이제 신하가 아닌 적이 되었습니다. 우왕은 마지막 카드로 궁궐에 있는 모든 환관들을 불러 모아 80명을 이끌고 직접 이성계를 죽이러 그의 집으로 처들어 갔습니다. 왕이 최후에 믿을 사람은 환관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사전에 이를 대비하여 거처를 옮겨놓았고 결국 고려 왕조도 멸망하였고 우왕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조선의 고종 임금 시절 청일전쟁(1894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국왕 측근의 인물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고종의 권력의 기반인 내시제도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타깃은 당연히 내시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1894년 12월에 내시사 제도를 폐지하면서 시종원 산하의 봉시로 개편하였습니다. 고종이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아관파천(1896)을 단행할 때 덕수궁 서쪽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작전의 핵심인물은 내시 강석호였습니다. 강석호는 이외에도 친일인사였던 박영효 암살, 유길준 암살을 모의하였고 이토 히로부미의 밀정인 배정자의 암살계획을 준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일본은 강석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5년)에서 승리한 후 1907년 내시 제도를 폐지시켰습니다. 내시 감축을 적극 추진한 인물이 을사오적의 한 명이었던 이근택이었고, 내시 김한종은 이근택에게 “당신들은 내시가 나라를 그르쳤다고 말하지만, 결국 나라를 팔아넘긴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까?”라고 항변했다고 합니다. 

 

조조의 양할아버지인 조등은 탁류파이면서도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가졌는데 스스로 본인의 학식이 부족하다며 청류파의 거두들을 찾아가 따로 글을 배우기도 하면서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청류파들은 환관들이 너무 득세한다고 비판하면서 

“양기를 죽인 것은 마치 가신을 불러 목 졸라 죽인 것과 같을 뿐인데 환관들에게 너무 큰 상을 주었습니다.”라고 반발하였고

환제 유지는 이에 크게 노하여 비판하는 유학자들을 옥에 가두고 중상시들을 통하여 이들을 고문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청류파와 탁류파의 갈등이 커지자 조등은 탁류파들을 설득하여 청류파들을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주동자 급만 금고 처분하고 나머지는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정도로 정리하였습니다. 이것이 1차 당고의 금이었습니다. 

 

조등의 타협책으로 인하여 청류파에게는 조등이 목숨을 빚진 사람이 되었고, 탁류파에게는 외척을 몰아내고 환관의 권위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게 되면서 조정에 자신의 세를 굳히게 되었고 정사에 참여한 환관으로는 드물게 별다른 탈없이 은퇴에 성공한 인물이 되었으며 그 공을 황제에게 인정받아 양자를 맞아들이는 허락을 받게 되어 조숭을 양자로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훗날 손자 조조가 당대의 실세인 십상시 건석의 숙부를 통금을 어겼다고 매질을 해서 죽이는 사고가 발생하였지만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무사한 이유도 십상시 가운데 고참 격인 장양은 조등이 직접 환관으로 만들었으며 신참 환관이었을 때 조등의 수발을 들었던 인물이었고 단규는 조등이 대장추를 지낼 때 비서인 대장추승이었으며 서원팔교위를 지낸 건석은 조등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후배에 지나지 않은 환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많은 청류파 사족들이 환관들의 득세에 상소문을 올리며 반대하였으나 환제는 환관들의 도움으로 양기를 제거하였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탁류파들을 중용하였고 이는 훗날 영제가 죽고 소제 시절 하진의 부하 원소가 2천여 명의 환관들을 학살하기까지 천하는 환관들이 위세를 떨치는 시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회에는 황건적의 반란이 진압된 후 사족들과도 비교적 사이가 좋았던 중상시 여강이 영제 곁의 다른 환관들에게서 ‘곽광전’을 탐독한다는 모함을 받고 영제에 의하여 내침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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