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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pr 04. 2023

<제4화> 착한 환관 여강의 최후는?

영제는 168년에 환제의 장인이자 두태후의 아버지 두무에 의하여 12살의 나이로 갑자기 황제가 되어 168년까지 제위에 있었습니다. 영제는 민간에서 살아오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살게 되었지만 고독하고 적막했습니다. 비록 황제이기는 했지만 무력감을 절실하게 느끼고 어느샌가 탐욕스럽고 호색한 인물로 변하여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81년 동한의 수도 낙양 후궁에는 갑자기 장사하는 거리가 생겨났습니다. 여느 도시의 시장처럼 점포가 늘어서 있고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영제의 명령에 따라 새로이 시장이 세워진 것입니다. 궁정의 보물과 비단, 잡동사니들이 들어서 있는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궁궐의 궁녀들이었습니다. 영제도 상인의 복장을 하고 술에 취하여 여러 상점으로 물건을 사러 다녔습니다. 점원들과 값을 흥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점원을 쫓아내고 대신 물건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궁녀들은 다른 점포에서 몰래 물건을 훔치기도 하면서 서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영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 시절은 북방의 유주, 병주에서 선비족들의 침범으로 봉화가 연이어 낙양으로 올라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영제는 서원에 관원 거래소를 설치하고 관직을 사고팔았습니다. 지방 관직은 조정에 근무하는 조관보다 배나 가격이 높았고 관직을 사고자하는 사람들은 공개입찰에 참여하였습니다. 외상으로도 거래가 되었는데 관직에 오른 후에는 2배를 내어야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황건적의 반란이 진압된 186년 영제는 서원에 나유관 1,000칸을 지었습니다. 매년 여름이 되면 그곳으로 피서를 가서 밤낮으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여 “이렇게 10,000년을 살 수만 있다면 신선 중의 신선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궁녀들은 14세 이상 18세 이하로 화장을 하고 예쁘게 꾸몄다고 합니다. 영제는 궁녀들의 상의를 벗게 하고 내의만 입게 하였고 함께 목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목욕을 마치면 기름을 용수에 부었는데 ‘유향거’라 불렀다고 합니다. 영제는 환관들에게 노새처럼 소리를 내게 하기도 했으며 나유관 북쪽에 계명당을 지어 닭을 기르면서 매일 해가 뜨는 시각에 환관들에게 닭소리를 내게 했다고 합니다. 영제의 음란의 정도는 역대 비교할 황제가 드물었다고 합니다. 

 

전한 무제 때 장건이 서역을 개척하면서 동서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서방 이민족들의 의복과 기물들이 동한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제 시절에는 서역의 문화가 낙양에 미치는 영향이 무척 컸다고 합니다. 영제는 호복, 호좌, 공후, 호적, 호무를 즐겼다고 합니다. 낙양의 왕족과 귀족들이 앞다투어 오랑캐 물건을 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영제는 황음무도한 황제였지만 다재다능하였고 탄금에도 능하였으며 퉁소를 잘 불어서 <황희편 >50장을 작곡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178년에는 홍도문학을 건립하여 그동안 경전을 학습하여 관직에 오르던 관행에서 벗어나 문학적인 문장에 능하거나 서화에 능한 사람, 전각에 능한 사람들을 궁정으로 초빙하여 동한 말년의 문예 풍조의 내용과 형식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문학에 서정성을 넓혔으며 서법과 전각, 회화를 번영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황제였습니다. 

 

후한의 영제 유굉이 시호로 받은 영(靈) 자 자체는 혼군에게 주는 시호였습니다. 전임 황제인 환제와 더불어 환령지말(환령지말)이란 혼란했던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를 장사꾼 마인드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보여준 반면교사였습니다. 영제가 존재하였기에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사 최악의 혼란기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전임 황제에게 시호를 정하는 시법에는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키는 것을 환(桓)이라고 하며,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靈)이라고 한다고 정해져 있는데, 손책이 장사환왕이라 불리고 제나라의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나라를 넓힌 의미가 담긴 평가임에 반하여 영이라는 시호는 춘추시대 진나라의 영공처럼 무도한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으며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암군의 대명사로 불려지는 이름이었습니다. 

 

환관들과 사족 출신 관료집단은 후한 시절 대립구도를 이어갔습니다. 후한 시절에는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였고 실권은 황후의 장인이 보정장군 자리에 올라 권세를 휘둘렀습니다. 어린 황제가 성인이 되어도 보정장군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고, 황제는 권력을 찾기 위하여 친위쿠데타를 도모할 때 환관들의 도움이 절실하였습니다. 환관들은 황제의 도구가 되어 황제가 성공한 경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환제가 양기를 제거하면서 많은 환관들이 제후에 봉해지자, 지방 호족들인 사족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12살의 어린 영제가 즉위하면서 보정장군인 두우를 제거하는 과정은 황제인 영제의 의사가 아닌 환관들의 자체적인 판단에 의하여 자행된 예외적인 현상이었고 이후 하태후의 오빠인 하진이 환관들에 의하여 제거되는 과정도 어린 소제의 의사가 아닌 환관들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환관들의 세력이 커지다 보니 환관들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게 되면서 자체적인 갈등도 심화되어 갔습니다. 

 

환관 중에는 이름난 사족들을 환제에게 추천하여 조정 중신이 되게 한 조등과 같은 인물도 있었고, 영제 즉위 초 외척 두무, 사족 대표 진번과 협력하여 왕보, 조절 등 실세 환관들을 처치하려 했던 정삽과 같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사족 계급 출신 중에는 권력 실세인 십상시에게 줄을 대어,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는 자들이 조정 내에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난 이후, 조정 내의 세력들은 조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보다는 황건적의 반란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황보숭이 당고의 금에 묶인 사족들을 해금해 줄 것을 건의하자 영제는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양심적인 환관으로 여기는 중상시 여강과 의논하였습니다. 여강은 환관이었지만 사족들과 비교적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당고의 금이 오래되어 분하고 원통해하는 여론이 있습니다. 만일 사면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장각의 무리에 합세할 것이니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측근들 중 탐욕스러운 자들을 주살하십시오. 그리고 대사면을 실시한 후 관리들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하여 임용한다면 도적들은 곧 평정될 것입니다.” 

여강은 영제에게 사족들을 사면하고 환관계급을 숙청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제는 정치보다 문학을 좋아하는 황제였습니다. 영제는 민간의 잡담을 듣기 위하여 시정잡배를 궁궐에 불러 종일토록 그들의 한담을 듣는 것을 즐겼습니다. 황제가 문장의 화려함을 즐기고 글자를 기이하게 쓰는 사람들을 총애하자 조정 대신들을 이를 크게 걱정하였고 의랑 채옹이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폐하가 즉위 초기에는 정사를 열심히 살피시더니 최근에는 잡기에 빠져서 백성에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저속한 문장과 광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하거나 남의 문장을 베껴 쓰는 자들을 총애하셔서 그들이 백성을 다스리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177년)

 

“영제의 유모 조요나 영제의 모친 동태후의 측근 곽옥은 모두 권세를 믿고 정치를 문란시켰습니다. 지금 항간에는 환관 정대인이 모든 정치를 좌우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큰 환란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역경에 말하기를 군주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고 했습니다. 부디 제가 올린 글을 비림에 부치셔서 간신 환관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환관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되었고 채옹을 모함하였습니다. “채옹과 그 숙부 채질이 사리를 위하여 부정청탁을 하였고 거절하자 중상모략을 일삼았습니다.” 

환관들은 채옹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대다수 환관들과는 달리 중상시 여강이 채옹을 변호하며 사형에서 한 단계를 낮추어 머리를 깎고 변방에 귀양 보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환관들은 십상시 중 하나였던 봉서와 서봉이 황건적과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자 잠시 기세가 주춤하였습니다. 환관들은 죄를 고하며 바닥에 엎드려 사직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영제는 그 정도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환관 전체를 제거하려는 모험을 하다가 또다시 궁정쿠데타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영제는 처남인 하진의 군권을 강화시키면서 친위세력을 강화하였고 이 일로 영제와 가까운 여강을 환관들은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환관 조충과 하운은 여강과 그 일파를 참소하였습니다. 여강이 조정에서 당인들과 모여 ‘곽광전’을 수회에 걸쳐 읽었고 여강의 형제들이 탐욕스럽고 추잡한 짓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제는 크게 놀랐습니다. 영제는 당인들이 ‘곽광전’을 모여 읽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영제는 중황문 에게 여강을 잡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중황문은 황궁의 중문을 호위하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환관이었습니다. 자신을 체포하라는 조서가 내렸다는 말을 들은 여강은 “내가 죽으면 난이 일어날 것이다. 장부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할지언정 어찌 옥리에게 심문을 받을 수 있으랴.”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당시 내시들이 관장하는 북사옥은 가혹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마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이라는 고문기술자가 관절꺾기라는 기술로 수감자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듯이 환관들의 변태적 가학증과 고문기술자들의 기술로 없는 죄도 만들어내던 곳이었습니다. 그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강으로서는 문초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충과 하운은 다시 영제에게 참언하여 “여강이 조서를 받고 그 내용도 모르면서도 두려워 자살을 한 것은 모반을 획책하는 마음을 품었음이 분명합니다.”라며 여강의 일족을 체포하고 가산을 적몰 하여 다른 환관들에게 경고를 보냈습니다. 

 

전한의 곽광은 한무제의 신임을 받고 소제와 선제 시절까지 20여 년간 실권을 행사한 권신이었습니다. 한무제 유철은 70년의 일생 중 무려 54년을 황제로 재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전까지 흉노의 침략에 시달리던 한나라에서 흉노를 정벌한 위대한 군주로 알려졌습니다. 한고조 유방이 중원을 통일한 기세로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진군했다가 그만 백등산에서 흉노에게 포위되었습니다. 7일간이나 먹지도 못하고 결국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해마다 술, 비단, 곡물을 바치는 신세였는데 한무제는 문제, 경제 시절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흉노를 정벌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말년에는 무고의 화로 태자 유거가 죽었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8살의 나이 어린 유불릉을 후사로 남기게 되면서 늙은 마음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제는 후일을 위하여 자신이 신임하는 곽광을 대장군으로, 상관걸을 좌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어린 군주를 부탁한다는 유조를 내렸습니다. 

 

곽광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나라 황실과 중신 상관걸과 사돈이 되는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상관걸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여기서 낳은 손녀를 소제 유불릉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보통 한나라 시절 나이 많은 황후를 선발하기도 하였으나 실권자가 곽광이었으므로 소제는 6살이나 어린 곽광의 외손녀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란히 무제의 고명을 받았던 곽광과 상관걸은 갈등이 일어났고 상관걸과 곽광의 사위 상관안(B.C. 80년)은 곽광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김일제는 흉노 출신이었으므로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려고 하지 않다가 소제 원년(B.C. 86)에 병으로 죽게 되어 조정에는 곽광만 남게 되었습니다. 

 

소제 유불릉(B.C, 97- B.C. 74)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죽자 처음 광릉왕 유서가 물망에 올랐으나 곽광은 이를 물리치고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세웠습니다. 유하를 황제에 올렸지만 석 달만에 쫓아냈습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후임 황제를 결정할 권한은 황태후 상관 씨였으나 나이 15세였고 곽광의 외손녀였습니다. 상관 태후는 외할아버지 곽광이 올린 상주문에 단지 “가(可)하다.”라는 조서만 내릴 권한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곽광은 불과 석 달만에 유하가 음란하고 무례하다며 유하를 내쫓고 다음 황제를 찾았습니다. 창읍왕 유하가 산동 사람들을 수도인 장안의 요직에 배치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곽광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창읍왕이 퇴위시키고 다음 황제의 조건으로 곽광을 비롯한 장안에 있는 중신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 무난한 인물을 찾았습니다. 이런 조건에 걸맞은 인물이 유병이라는 한무제 유철의 증손이었습니다. 유병이는 황제계승의 조건에는 맞지 않았지만 주변에 염려할만한 측근 세력이 없는 것이 곽광이 생각하는 조건에 적합하여 소제 유불릉의 손자 항렬인 유병이를 황제로 내세우는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한무제 유철이 강충의 무고에 현혹되어 태자를 감옥에 가두면서 증손인 유병이도 옥에 있었는데 옥사를 처리하는 정위감 병길이 억울한 태자 유거의 사정을 알고 유병이를 안타깝게 여겨 후덕한 여자 죄수를 골라 유병이에게 젖을 물리고 양육하도록 시켰습니다. 여자 죄수가 형기를 마치자 병길은 사비를 들여서 그녀를 고용하여 유병이를 양육시켰습니다. 이는 훗날을 도모하려는 목적보다는 어린 생명이 죄 없이 죽는 것이 안타까워서 취한 조치일 뿐이었습니다. 훗날 유병이의 할아버지인 태자 유거는 무죄하다고 결론이 났지만 권력에서 멀어진 유병이에게 누구도 관심이 없었고 시간이 흘러 소제 유불릉이 유병이의 이야기를 듣고 황실 족보를 관리하는 종정에게 족보에 올리도록 명하였을 뿐입니다.

 

유병이는 성년이 되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결혼을 생각도 못하다가 이를 불쌍히 여긴 장하가 죄를 짓고 환관이 된 허광한에게 부탁하자 허광한은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병이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습니다. 이런 평범한 조건이 곽광의 마음을 안심시켰습니다. 곽광에 의하여 허수아비 황제가 된 유병이는 이미 장성하여 세상물정을 알고 있었지만 조용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곽광의 부인 곽현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기 위하여 허황후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허황후를 시중드는 여의사 순의연을 통하여 마침내 허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었습니다. 황제 유병이는 의심스럽기는 하였지만 곽광의 눈치만 볼 뿐이었습니다. 유병이는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어느새 곽광은 죽었으나 곽광 일족의 세력은 여전하였습니다. 곽광의 아들 곽운은 황제만 사냥할 수 있는 황산원에 들어가 동물을 잡겠다고 사냥을 하여도 아무도 견책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승상에 오른 위상이 과거 어사대부 시절 곽 씨 가문의 가노와 위상의 가노들이 싸움이 벌어지자 위상이 직접 나서서 곽 씨 가문의 가노들에게 사과를 할 정도였습니다. 

 

황제 유병이는 조금씩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을 주변에 배치하였고 측근들을 장군으로 삼아서 미앙궁과 장락궁을 경비하는 위위, 그리고 성문과 북문에 있는 병사들을 자기 사람으로 배치시켰습니다. 점차 자신들이 몰린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곽 씨들은 결국 반란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계획한 것입니다. 황제가 믿는 황제의 장인 허광한과 승상 위상을 죽이고 황제인 선제 유병이를 퇴출시키려 하였습니다. 후임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황실의 최고 어른이 곽광의 외손녀 상관 태후이므로 다른 황제를 임명하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상관 태후로 하여금 황제의 외조모 박평군을 위한 술자리를 마련하게 하고 승상 위상과 황후의 아버지 허광한을 초청하여 이들의 목을 베고 선제 유병이를 폐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곽 씨 일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후한 시절의 역사를 살펴보거나 중국 역사 전체를 살펴보아도 명실상부하게 황제권을 행사한 황제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상외로 허수아비 황제 뒤에서 권력을 누리는 실세들이 배후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한고조 유방이나 명태조 주원장처럼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려 왕조에서도 왕권에 제약이 많았고 특히 무신정권하에서의 장군들이 세운 허수아비 왕들과 몽골의 부마국으로 몽골 왕비에게 맞기도 하는 고려 왕들의 모습, 조선시대 신하들의 손에 의하여 왕이 된 중종과 인조, 안동 김 씨에 의하여 강화도령에서 왕위에 오른 철종의 모습을 보면서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왕들이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영제 시절 황제의 명령도 거부하면서 기회를 노린 동탁의 모습을 통하여 후한 말기의 변방의 장군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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