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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5. 2020

시험(試驗)에 강한 남자, 이색(李穡)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성립한 나라이다. 공자(孔子)에게 관심이 있던 없던 간에 한국인의 의식구조 저 밑바탕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1999년 김경일 상명대 중문과 교수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발간해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몇 달 후 최병철 교수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책을 출판하여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지금은 조선시대처럼 소학(小學)을 배우고 사서삼경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우리의 DNA에 이미 유교적 유전자는 알게 모르게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국시대와 고려는 불교(佛敎) 국가였다. 눈에 띄는 대표적인 사례가 불교식으로 지어진 지명들이다.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딴 비로봉, 금강경의 이름을 딴 금강산, 문수보살의 이름을 딴 문수봉, 미타산 등 이름만 들어도 불교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지명이 많다. 그 이유로 당시 지친 민중들이 미륵불의 도래를 기원하였다는 주장, 절 이름이 산 이름으로 변하기도 했다는 설명, 민심을 얻기 위하여 불교 이데올로기를 동원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이 있다.


풍속에 있어서도 고려시대까지 장가를 가던 우리의 조상들이 언제부터 시집을 가는 문화로 달라지기 시작했을까? 2017년 함재봉의 <한국사람 만들기 1>에는 세종대왕과 김종서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도 주자(朱子)의 가르침대로 시집가는 문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세종의 질문에 김종서는 왕실부터 모범을 보이라고 건의를 한다. 김종서의 건의로 왕실에서 처음 시집을 가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였다는 것이다. 5천 원권의 모델 조선 중기의 인물  이율곡도 친가가 아닌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다. 5만 원권의 신사임당의 아호 사임(師任)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떠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조선시대에 주나라는 지식인의 이상향이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의 토지개혁도 그 모델은 주나라의 정전법(井田法)이었다.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은 <주례><고공기>에 나온 주나라 수도 낙읍의 9리를 본받아 한 면을 3km로 구상하였다. 왕궁의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곡식의 신인 사직을 모신 좌묘우사(左廟右社), 왕궁의 앞인 광화문에 육조거리를 만들고 왕궁의 뒤인 궁정동과 청와대 자리에 시장을 만든 면조후시(面曹後市)도 주나라의 수도를 본받은 것이라고 한다. 정도전은 조선에 주나라를 다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올해 제프리 케인은 <삼성 라이징>이라는 책에서 이병철과 잡스의 만남을 유생(儒生)과 히피의 만남으로 표현하였다. 함축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에도 자신의 조부 이홍석(1838~1897)이 영남의 거유 허성재의 제자라고 하면서 퇴계 이황까지 올라가면서 학맥을 연결하고 있다. 미국인 기자는 이재용의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발표를 조선왕조 같은 시대를 벗어나 전문경영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는 자신의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주려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상속세로 인한 경영권 유지의 어려움이라고 한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도 교회 세습을 고민하고 있는 것도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의식구조의 저변에는 아직도 유교적 가치관과 시각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유교국가 조선으로의 드라마틱한 변화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인물은 누구일까? 단연 목은 이색이라고 생각된다. 이색은 시험의 최강자였다. 정동행성 향시에서 1등, 1353년 원나라 제과 회시에서 1등 최종 시험 전시에서 2등을 하였다. 시험관인 구양현(歐陽玄)은 이색을 1등으로 뽑았지만 외국인(고려인)이 장원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계지(牛繼志)라는 인물을 1등으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합격 후 이색이 구양현에게 인사차 찾아가니  "나의 의발(衣鉢)이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전파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학문이 이색을 통하여 고려로 전파될 것이라는 의미이고 고려의 성리학이 중국본토의 성리학과 대등하게 발달할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한다. 구양현은 당시 원나라 순제때 국책사업이었던  <요사>, <금사>, <송사>의 이전 3국의 역사 편찬(1343~1345)을 주도했던 대학자로 <경세대전>의 편찬도 책임을 맡았고 원나라 때 출판된 바둑의 고전 <현현기경>의 서문을 써준 3명 중의 1인으로 알려져 있다. 송나라 때 문장가 구양수의 후손으로서 주희의 성리학을 원나라 관학으로 만든 허형의 정통 학문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위대한 성리학자라고 한다.


몽골족이 지배하는 원나라가 어떻게 송나라의 성리학을 배우게 되었을까? 과거 원나라가 남송과의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포로로 남송의 유학자 조복을 발견하고 북경의 태극서원으로 모셔와서 성리학의 전수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조복은 북경에 와서 성리학을 북방의 유학자 요추, 유인, 허형에게 전수하였다. 허형은 처음 경전의 자구 해석 위주의 유학을 공부하다, 스승을 만나 성리학의 깊은 뜻을 깨우치게 되어 성리학이 원나라의 관학으로 정립하는데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훗날 '주자 이후의 제1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원나라에서 과거가 실시된 것은 남송이 멸망한 후 30년이 지난 1315년부터인데 구양현은 이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원나라에서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성리학을 공부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주희가 편찬한 <사서집주>를 공부하는 것이 필수가 되었고 조선의 지식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훗날 명,청시대로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 그리고 베트남이 영향을 받았다. 전 세계에서 과거제도를 실시한 나라는 중국, 조선, 베트남 3개국뿐이라고 한다. 


이색은 탁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가정 이곡(1298~1351)도 정동행성 향시 1등, 원나라 제과 2등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고려인 제과 합격생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이었다고 한다. 원나라 관리였던 아버지 덕분에 이색은 원나라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의 업적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1335년 원나라 어사대에 고려의 공녀(貢女)를 폐지해 달라고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공녀는 1274년에 시작되었다가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1352년 폐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명에 의하여 다시 시작되어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다. 원나라 지배기에 원 황제의 관심사항을 이곡이 과감하게 붓을 들어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곡은 4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를 건의하였다. 첫째 황제의 조서는 덕음(德音)인데 남의 딸을 빼앗아가는 것을 덕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유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셋째, 고려의 충성을 유지하려면 고려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고, 넷째, 민심이 천명이라는 것이다. 이곡의 상소를 원의 황제가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 조정은 기쁘게 이곡을 정 3품으로 승진시켰다. 하지만 원나라는 그 이후에도 공녀에 대한 요구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는 새로이 들어선 명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 기황후를 배출한 기 씨 가문의 기철은 공민왕에게 신하라 칭하지 않았고, 넷째 누이가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후궁이 되고 다섯째 누이가 선종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던 한확이 간통 사건으로 탄핵을 받자 세종은 "이 사람은 내가 죄줄 수 없는 사람이다."라며 윤허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색의 명성은 명태조 홍무제도 익히 알아서 사신으로 간 이색에게 주원장이 통역 없이 직접 질문을 하였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색은 한문에는 능했지만 중국어는 어눌하다는 주장과, 주원장의 광동어와 이색의 북경어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가 불교를 믿자 이를 비판하는 신하들에게 이색도 그랬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일축했을 정도로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색이 아버지의 상을 당해 고려에 돌아왔을 때, 25세의 피긇는 젊음으로 공민왕의 즉위를 맞이하여 토지제도개혁 등 시무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필부의 몸으로 외람되게 올린다면서 올린 복중상소문에는 한 토지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가 7~8명이 되는 현실로 인하여 농민들의 삶이 파탄 나고 있다고 건의하고 있다. 하지만 훗날 이색은 그의 제자 정도전 조준 등이 토지개혁을 주장할 때 침묵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역사의 풍랑 속에서 이색과 그의 두 아들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고려말 성리학의 권위자로 최고의 스펙을 가진 이색은 고려 과거 시험 감독관으로 5차에 걸쳐 132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윤소종, 이첨, 김진, 맹사성 등이 그 합격자들이었다. 이색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조정과 재야에 걸쳐 두루 그의 학맥을 남겨놓았다. 포은 정몽주를 거쳐 야은 길재 김숙자로 이어지는 사림(士林) 파의 학맥과 양촌 권근을 거쳐 유방선 서거정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그것이었다. 유방선은 이색의 외손자로서 부친이 태종 이방원의 처남 민무구 형제와 연관되어 처형당하자 원주에서 서거정, 한명회 등의 제자를 가르쳤는데 한명회는 계유정난에서 세조의 장자방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여말선초의 모든 지식인들은 이색이라는 호수를 거쳐서 하류로 흘러내려갔던 것이다. 고려말에 이색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정도전, 정몽주도 없었고, 우리가 아는 조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리학을 비판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리학의 장점을 살려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인물이 목은 이색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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