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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pr 13. 2023

<제6화> 명문가의 적자가 된 얼자,  원소

후한의 영제가 즉위하자 두태후의 아버지 두무와 사족 진번은 환관들을 제거하는 기회만 엿보다 반격을 받고 처참하게 몰락하였습니다. 환관들의 기세가 올라갔으나 184년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면서 십상시 중의 봉서와 서봉이 황건적과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자 환관들의 기세는 꺽이고 말았습니다. 환관들은 바닥에 엎드려 사죄하며 일제히 사직을 청했습니다. 영제는 환관 전체를 제거하는 모험을 시도했다가 다시 궁정쿠데타를 초래하기보다는 환관들의 기세를 꺾고 이틈을 이용하여 친위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처남인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황건적 토벌의 총책임을 맡게 하였습니다.

 

영제의 소생으로는 하 황후가 낳은 황자 유변과 왕미인이 낳은 유협이 있었습니다. 왕미인은 대단한 미인으로 하황후가 황후에 등극한 다음 해인 181년에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유협을 낳았습니다. 왕미인이 임신하자 하황후는 낙태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유협이 출생한 이후 황제의 사랑을 질투한 하태후는 왕미인을 독살해 버렸습니다. 이는 하황후가 황후에서 폐출되면서 처형될 수도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천대받는 직업인 도축업을 통하여 재산을 모은 하진은 자신의 누이 하태후를 황후로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을 환관들에게 바쳤습니다. 하진과 가까운 조정 중신들과 궁중의 환관들은 적극적으로 하황후를 변호하였고 하황후는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유협은 영제의 모친인 동태후에 의하여 키워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태후는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유협을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웠습니다. 동태후에 의하여 키워졌으므로 유협은 동후라 불렸습니다. 

 

하황후가 낳은 유변은 어려서부터 궁중을 나와 도사 사자묘의 집에서 양육되었습니다. 원래 도축업을 하던 집안인 하황후와 황후의 모친 무양군은 평소 여러 미신을 믿었습니다. 점쟁이와 술사들이 점을 쳐서 유변이 어려서 궁중에 머물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괘를 얻었으므로 액땜을 하기 위하여 궁궐 밖의 도사 집에서 자라게 한 것이었습니다. 유변은 사 씨의 집에서 양육되었으므로 사후라고 불려졌으며 유협보다는 5살 형이었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황보숭, 주준, 노식, 동탁 등의 장수의 분전으로 진압되어 갔으나 혼란을 틈타 서량에서 한수와 마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장순, 장거의 난 등이 일어났습니다. 188년에는 2월에 황건적의 잔당인 곽대 등이 이끄는 백파적의 난이 일어났고, 3월에는 도각호가 반란을 일으키어 병주를 침입하여 병주자사 장의를 죽였습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남흉노의 선우 강거에게 장순의 난을 토벌하기 위한 지원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일부 흉노부락들이 도각호와 연합하여 강거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남흉노 들은 강거의 아들인 어부라를 차기 선우로 추대하였고 이들과 대립하는 10만의 반란군들은 북쪽 변방에서 반란을 계속하였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영제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8월이 되자 영제는 수도권의 군사들을 통합하여 황제의 직할 친위대 성격의 서원 8 교위를 신설하였습니다. 서원은 영제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후원으로 매관매직으로 축적한 영제 개인 재산과 황실의 수레, 마필, 군비 등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종전까지 수도 낙양의 경비는 궁궐을 호위하는 남군과 성밖 도성을 경비하는 북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남군의 지휘관은 구경 중의 하나인 위위였고 북군의 지휘관은 위장군 휘하의 5 교위로 나뉘어 있었는데 영제는 이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직할로 만들면서 대장군마저 서원 8 교위의 통제를 받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군사권을 영제 자신이 직접 장악하겠다는 확고한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8 교위의 지휘관은 자신의 최측근 환관과 믿음직한 사족 가운데서 엄선하여 8 교위를 임명하였습니다. 소황문 건석을 최고책임자인 상군교위로 임명하였고 이어서 원소, 조조, 순우경 등을 교위로 임명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하태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태후의 조카인 동중을 대장군 다음 가는 지위인 표기장군에 임명하였습니다. 

 

영제는 처음 당연히 장남인 유변을 태자로 책봉할 생각이었습니다. 하황후의 입장과 대장군을 맡은 하진을 고려하면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변을 대하면서 영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도사의 집에서 성장한 유변은 경박하면서 위엄이 없어 황제의 자격이 없어 보였습니다. 반면에 어머니 동태후 밑에서 성장한 유협은 비록 어리지만 총기가 있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제는 신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직 자신이 젊다고 생각했으므로 급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다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동태후의 조카인 동중을 표기장군에 임명한 것은 그런 연유였습니다. 표기장군은 한무제 시절 흉노를 토벌한 곽거병의 직책에서 유래한 것이며 대장군 다음의 지위였습니다. 대장군 하진을 서원 8 교위의 책임자인 건석의 통제를 받도록 한 것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석은 영제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병권을 장악한 대장군 하진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진은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여동생을 태후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였고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조정 내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진은 사족을 대표하며 환관세력의 제거를 노리는 원소를 불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영제의 의도를 눈치챈 건석은 여러 상시들과 함께 대장군 하진을 직접 서량으로 보내 강족의 반란을 토벌하도록 건의하였습니다. 황제는 이에 동의하였고 하진에게 병거 백승과 호분과 부월을 하사하며 토벌을 독촉하였습니다. 하진은 건석의 의도를 간파하고 정태, 하옹 등 유명 사족 인사들을 참모로 초청하여 활용하였습니다. 하진은 영제에게 먼저 원소를 동쪽으로 보내 서주와 연주에서 병력을 징발하여 그 병력으로 서량의 반군을 정벌하겠다고 주청하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하태후와 유변의 후원자인 하진은 낙양에 머물면서 병권을 쥐고 있었고, 동탁은 동태후와 성씨가 같아 비록 촌수는 멀어도 친척뻘이었습니다. 동탁은 동태후와 표기장군 동중, 그리고 주변의 환관들과 결탁하였습니다. 동탁이 감히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여도 영제가 이를 예외적으로 용인한 것은 하태후와 동태후 간의 치열한 알력이 숨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9년 4월 11일 영제가 남궁의 가덕전에서 붕어하였습니다. 사망 직전 건석을 불러 황자 유협을 부탁하였습니다. 유조를 받은 건석은 유협을 황제로 옹립할 방법을 궁리하였습니다. 영제가 즉위한 168년 두태후의 부친 두무가 태부 진번과 손을 잡고 환관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자 왕보와 조절을 중심으로 환관들은 단결하였고 상황을 역전시켜 사족들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금군을 지휘하여 두무를 체포한 사람이 바로 건석이었습니다. 황궁을 숙위 하는 남군과 도성을 수비하는 북군 간의 정면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황제의 명령을 앞세운 건석의 남군에 북군들이 투항하여 비교적 쉽게 마무리되었던 것입니다. 

 

건석은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진의 배후에 원소를 중심으로 한 사족들 중 협기 있는 인물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건석은 먼저 영제의 붕어 사실을 숨기고 황제가 후사 문제로 의논한다는 구실로 하진을 궁성으로 호출하였습니다. 궁 안에 도부수를 매복시키고 하진을 처치한 뒤 유협을 즉위시킨다는 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건석의 부하에 반은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반은 은 하진과 친분이 있었고 하진에게 위험을 알렸습니다. 하진은 시장 바닥에서 도축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고 눈치를 채자마자 궁궐을 빠져나와 대장군 관부로 돌아와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백군저에 진을 쳤습니다. 백군저는 천하의 봉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각 군의 연락관들이 상주하는 곳이며 병력동원이 용이한 곳이었습니다. 

 

하진은 병력을 대기시키고 국상이 선포되었어도 입궁하지 않았습니다. 건석은 영제가 명확하게 유협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으므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황자 유변이 즉위하였고 하태후가 정사를 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진과 태부 원외가 공동으로 녹상서사가 되어 보좌하였습니다. 하진은 실권을 장악하자 건석을 제거할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서원 8 교위의 원소를 사례교위에 임명하였습니다. 사례교위는 직급 상으로는 구경 아래의 관직이지만 낙양과 장안 등 수도권 지역의 치안과 감찰을 책임지는 권력의 핵심요직이었습니다. 하진은 원소를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습니다. 원소의 평소 생각은 환관세력을 일소할 계획이었습니다. 

 

원소는 6년간의 시묘 생활을 마치고 바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널리 사족 출신의 명사들과 교분을 강화한 것은 강대한 환관 세력을 제어하기 위하여 외척의 힘을 빌리고자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진은 원소가 명문가 출신으로 후대하였습니다. 원소는 하진에게 건의하였습니다.

“황문과 상시들이 정권을 농단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태후와 통모 하여 천하의 이익을 다 저들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이제 천하의 대권을 장악하였으니 저들을 주멸하여 국가의 환난을 제거하고 현명하고 어진 이를 초빙하여 천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진은 원소에 이어 원소의 집안 동생인 원술을 황제의 근위대장인 호분중랑장에 임명하였고 지모 있는 선비들을 구하였습니다. 정태, 하옹, 봉기, 순유, 진린 등이 이때 하진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원소의 가문은 4대에 걸쳐 5공을 지낸 삼국시대 최고의 명문가였습니다. 홍농 양씨, 영천 순씨, 하내 사마씨와 같은 명문가들 가운데서도 우뚝 선 가문이었습니다. 삼국시대의 혼란기에도 원씨 가문처럼 위세를 떨친 가문은 없었습니다. 반동탁 18로 제후중에서도 원씨는 모두 원소, 원술, 원유가 군웅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선조인 원량은 역법을 전공한 유학자로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자 성무현령에 올랐으며 여남 원씨의 시조인 고조부 원안은 88년 두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외척이 국정을 전횡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상서를 올려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실세였던 두헌도 원안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원안의 명망은 아들 원상이 사공의 벼슬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고지식한 처신을 하다 외척 등씨 집안과 갈등 속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원상의 아들이 태위 원탕이었고 원탕의 3 아들이 원성, 원봉, 원외였으며 공식적으로 원성이 원소의 아버지고 원봉이 원술의 아버지였습니다. 당시 중상시 원사가 성이 같다는 이유로 후원을 하여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원유는 원술에게 죽고, 원술과 원소는 조조에게 패하였지만 위진남북조 시절 강남으로 이주한 화북계 세족들 중에는 여남의 원씨 가문이 난릉 소씨, 진군 사씨, 낭야 왕씨, 왕실로 편입된 사마씨와 몰락한 조씨와 함께 명문가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기나긴 중국사의 맥락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음 회에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원씨 가문을 대표하는 원소가 세력이 열세인 조조에게 패한 이유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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