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가방 Apr 13. 2023

<제7화> 조조가 원소를 역전한 비결은?

원소와 동생 원술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남군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습니다. 원소와 원술은 원탕의 둘째 아들 원봉을 아버지로 두었지만 형인 원소는 노비의 자식이었고 동생인 원술은 정부인의 자식이었습니다. 원소는 큰아버지 원성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원 씨 가문을 대표하는 적자가 되었습니다. 여남군의 왕준은 조조와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조조는 밖으로 나가서 왕준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천하는 장차 혼란해질 것이다. 혼란의 괴수가 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이다. 천하를 구제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려면, 먼저 이 두 사람을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왕준은 “자네 말대로라면 천하를 구제할 사람은 자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조조와 왕준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삼국지 무제기에서 배송지가 보충한 황보밀의 <일사전>의 기록입니다. 왕준은 헌제가 상서로 삼으려고 불러도 가지 않았던 인물로 유표가 원소의 세력을 보고 원소 편에 서자 조조를 제환공이나 진문공과 같은 인물이라며 추천했지만 유표는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천하의 패권을 놓고 원소와 원술이 싸우는 형세였습니다. 원소는 유표와 동맹을 맺었고 원술은 손견을 보내 유표와 싸웠고, 공손찬과 동맹을 맺어 원소와 싸웠던 시절로 조조는 서주로 쳐들어갔다 패하고 여포가 후방 연주를 기습하여 근거지를 빼앗기고 원소의 부하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 정욱의 반대로 그만두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조조가 인정하였듯이 당대의 대세는 원 씨 가문이었습니다. 한나라는 한무제 이후 유교를 국시로 삼았고, 후한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유교국가’였습니다. 후한의 국립대학인 태학은 오경박사제도를 설치하여 유학교육을 강화하였고 후한 고위직인 태부, 삼공, 대장군 중의 유교 관료 비율은 초기 광무제 시절 77%, 중기 당고의 금 이전이 76%, 황건적의 난 이전이 83%, 말기에는 51%였습니다. 전한의 한무제 시절의 2%, 원제 시절의 27%에 비하여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소도 당대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한 세족 출신이었습니다. 원소는 이에 더하여 유교 이념에 충실하게 한 번도 힘든 삼년상을 2번이나 치른 인물입니다. 당시는 사족들 사이의 세평이 중요한 시절인데 원술은 교만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원소는 지위가 낮은 선비들에게도 허리를 굽혀 대접하였으므로 수많은 선비들이 원소에게 귀의하였다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원소가 패망한 후에도 한형, 심배 등은 죽기까지 원소에 대한 절개를 지켰고 오환족은 원상 형제를 필사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원소가 죽었을 때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조가 죽었을 때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대의 민심이 어느 쪽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볼 것입니다. 

 

원소의 진영에 참여한 명사들은 크게 원소가 지배한 기주, 유주, 청주, 병주 출신의 명사들과 원소와의 개인적 인연으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입니다. 크게 보면 원소 진영에는 여남군 출신이 조조 진영에는 영천군 출신의 명사들이 많았습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후 원소의 근거지를 점령하자 조조 휘하의 측근들조차도 은밀하게 원소와 내통한 증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조 진영에서도 원소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증거물인 서신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우라고 하였습니다. 원소를 군사적으로 이긴 시점에서도 원소를 추종하는 자들의 세력은 박멸하기보다는 모두 포용하고 나가야 할 정도로 광범위하였습니다. 원소는 이겼지만 원소를 따르는 수많은 명사들을 동오의 손권과 형주의 유표, 익주의 유장과 객장으로 떠도는 유비에게로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원소의 휘하에는 원소의 복심으로 알려진 기주 출신의 심배와 조조에게도 그 재능을 인정받은 기주 출신의 저수, 원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전풍이 있었습니다. 관도대전 막바지에 원소 진영을 떠나 조조의 위나라를 대표하는 장군이 되었던 장합도 기주의 하간 출신이었습니다. 원소 개인적 친분의 인물은 훗날 원소를 배신하여 오소의 식량창고를 조조에게 알려준 형주 남양 출신의 허유와 예주 영천군 출신의 순욱과 동생인 순심 영천의 명사인 신평과 신비, 곽도 등의 참모들입니다. 이들 명사들이 가진 문화적 힘은 곧바로 군사적 경제적 힘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문제는 원소가 수많은 명사 출신의 참모들에게서 시너지 효과를 얻지 못하고 조조가 ‘아당비주’라고 비난할 정도로 당파싸움이 치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소 사후에도 이어져 원소가 세운 후계자인 막내아들 원상을 지지한 심배 봉기와 맏아들 원담을 옹립한 곽도, 신평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원소와 원술의 싸움처럼 원씨 가문의 엄청난 힘을 분산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원소 밑에 있다가 조조에게로 자발적으로 달려간 법가적 관점의 순욱은 원소를 평하여 첫째, 능력 위주의 인사를 단행하지 않았고, 둘째 결단력이 부족했으며 셋째, 법가의 법술주의를 채택하지 않았으며 넷째 의론만 좋아하는 무능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고 혹평하였습니다. 순욱이 보기에는 원소는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겉으로는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시기심이 많으며 사람을 임명하고도 그의 마음이 충성스러운지 의심을 하지만 조조는 총명하고 구애됨이 없이 오직 재능에 따라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한다고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문가 출신의 원소는 동탁이 권력을 잡자 자신의 힘으로는 동탁의 서량군을 대항할 수 없음을 직시하였습니다. 강족들은 100여 년간 서쪽 변방에서 끊임없이 대립하였고 2세기 중반에서야 잠잠해지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사에서 한족과 강족 간의 전쟁의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환관의 기원이 고대 상나라 무정왕 시절 포로로 잡은 강족을 환관으로 만들어 신에게 봉사하도록 하였다는 춘추시대의 기록이 그 최초라고 합니다. 반동탁 18로 제후 군의 실패를 맛본 후 원소는 먼저 모사 봉기의 건의로 한복이 다스리는 기주를 차지한 다음 동탁의 강족이 포함된 혼성 야전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원소는 오환족의 기마부대를 포섭하였습니다. 원소는 근거지인 기주 북방의 어양군, 우북평, 안문군의 오환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 가운데 이름 있는 우두머리를 대우해 주면서 그 정예기병을 자신의 군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원소는 오환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집안의 여식을 딸로 위장하여 요서의 오환족의 우두머리인 답돈과 통혼하면서 그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오환족은 이전에는 흉노의 신하로 살며 소, 말, 양 등의 가축을 바치며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며 한족들은 변방으로 이주하였고 오환족은 흉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하여 한족에게로 이주하였고 한족은 흉노 선비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오환족을 이용하였습니다. 원소는 오환돌기라는 오환족의 철갑군을 이용하여 공손찬의 백마부대를 격파하고 유주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조는 200년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무찌르고 207년 원소의 아들들과 오환연합군을 유성에서 격파하면서 원씨 세력을 완전히 정리하고 북방을 평정하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오환족 근거지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오환족들을 모두 역내로 이주시키고 이들을 생산에 종사시키며 용감한 자들은 징발하여 오환기병을 편성하였는데 이 오환기병은 둔전제와 더불어 조조의 군사력을 강화시킨 일등공신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되었습니다. 삼국지 무제기에는 조조는 황건적을 제북지방으로 쫓아내고 병사 30만 명과 백성 100만 명을 귀순시켰으며 이 가운데 정예병을 모아 청주병을 조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주병들은 조조 직속군으로 과거황건적 시절의 습관 때문인지 민폐를 많이 끼쳐 우금에 의하여 엄벌에 처해지기도 하였는데 조조가 우금을 칭찬한 사례는 동주병을 이끌고 익주를 지배한 유장이 동주병의 횡포를 묵인했다가 익주의 민심을 잃었던 것과 비교하여 올바른 리더십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조의 세력이 강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거병하여 195년 연주 지배 시기까지 합류한 장수들은 전위 허저와 같은 친위대장을 비롯하여 악진 이전 우금 서황 등 조위의 명장들이 대거 합류하였고 다음 199년 여포 원술 타도까지 장료, 장패 등 여포 휘하의 장군들이 가담하였으며, 200년 관도대전에서 207년 원씨 멸망까지는 전위를 죽인 장수와 참모 가후와 같은 책사, 흑산적 장연을 포섭하였습니다. 4기 조조가 죽는 220년까지는 오두미교의 장로의 휘하 장수들과 방덕과 같은 마초 휘하의 장수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이러한 과정에서 환관이었던 할아버지 조등의 덕을 많이 보았는데 환관 최고 자리인 중상시에 올랐던 조등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아들 조숭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조숭은 막대한 재력을 이용하여 통상의 10배의 가격인 1억 전으로 후한의 최고 관직인 태위 직을 영제에게서 구매하여 영제의 보증수표 역을 담당하였습니다. 조등의 남기 기여는 막대한 유산은 물론 풍성한 조조의 인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연주 출신의 사공을 지낸 우방, 국상을 지낸 변소, 경조윤을 지낸 남양 출신의 연독, 태위를 지낸 남양 출신의 장온, 태상을 지낸 양주 출신의 장환 오관중랑장을 지낸 영천 출신의 당계전 등 조정의 고위직이 조등을 통하여 고관이 되었고 그 인맥은 음으로 양으로 조조에게 커다란 자산이 되었습니다. 

 

조조는 황관의 양자인 왕길이 효렴과에 추천해 주고 사마의의 아버지인 상서우승 사마방이 추천해 준 덕분에 낙양북부위에 처음 임명되었습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영천에서 활약하였고 제남국의 국상이 되어서는 미신을 타파하고 뇌물수수를 근절시킨 업적을 남겼습니다. 잠시 고향에서 은거하였으나 영제에 의하여 발탁되어 황제 직속의 서원8교위의 전군교위로 임용되었습니다. 

 

반동탁 18로의 제후들과 함께하였으나 동탁을 두려워하는 제후들에게서 벗어나 홀로 진격했다가 동탁의 부장 서영에게 참패하였습니다. 맹주인 원소는 한나라를 위해 거병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 전투에 나선 장수는 조조와 손견뿐이었습니다. 조조는 패전했으나 막강했던 동탁에게 도전한 조조의 모습은 훗날 헌제를 옹립하는 대의명분이 되었고 한나라 수호를 사명으로 여기는 명사들에게 조조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조조 진영의 참모들의 구성은 원소 진영을 떠나 조조를 찾아온 순욱의 추천으로 시작되었는데 조조는 203년 순욱을 만세정후로 봉해줄 것을 헌제에게 청하는 상주문에서 순욱의 공적을 첫째 정치 전반에 대한 보좌와 둘째, 인재등용, 셋째 장기적인 계획의 구상 넷째, 치밀한 정보 분석과 전략 등을 꼽았습니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는 순욱은 고향 영천군에서 순유, 종요, 사마의를 추천하였고 당대 명망가인 치려, 화흠, 왕랑, 순열, 두습 신비 조엄 등 훗날 추천된 인물 가운데 대신이 된 사람이 10여 명에 달했습니다. 일부 희지재와 곽가는 재능은 있지만 인품에서 비난을 받았고 두기는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능력에 있어서는 모두들 조조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문화대혁명 시절 곽말약은 조조의 업적으로 첫째 비록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등장했지만 황건의 목적을 따랐으며 오히려 황건의 운동을 계승하고 조직화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조조는 황건적을 청주병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보강하고 오두미교의 장로와 사돈을 맺으려 위나라의 고위층에 도교가 퍼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30년 인고의 세월을 통하여 호족들을 제거하고 토지독점을 막았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구제하고 둔전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셋째 북방의 골칫거리를 정리하여 안정시켰습니다. 넷째 문화적으로 중국 건안문학을 발전시키고 조비, 조식과 함께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의 3소에 앞선 3조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조조가 ‘사람을 죽인 문제’는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곽말약은 종전과 달리 매우 긍정적 평가를 내렸지만 문화대혁명이 비판을 받으며 함께 사라졌다가 다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과정중에 있습니다. 삼국지연의를 통해서는 일본의 요시카와가 20세기 중반에 처음 조조를 주인공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190년 조조는 진류에서 거병하여 반동탁 군벌에 연합하였고 191년 흑산적을 토벌하고 연주에서 황건적 잔당을 격파하고 청주병으로 삼았으며 193년 아버지의 복수를 내걸고 서주 백성들을 학살하였고 196년 헌제를 자신의 진영으로 모셔와서 197년 남양의 장수와 싸우다 아들 조앙과 전위를 잃었으며 198년 서주의 여포를 무찌르고 200년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원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명사들을 중시한 원소와 달리 조조는 법가적 관점에서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입각한 인재등용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큰 아들 조앙을 죽인 가후나 자신의 조상을 욕한 진림도 용납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들 조비가 진군의 건의에 따라 채택한 구품중정제는 다시 신분을 중시하는 인사제도로 운용되었습니다. 진군의 취지는 가문에 구애됨이 없이 개인의 재능과 인품으로 평가하고자 하였으나 평가하는 중정이나 평가받는 향당사회의 인물들은 당연히 가문의 영향권 안에 있었고 그 결과 위진남북조 시대가 귀족사회로 평가받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조가 추구하였던 가문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구현령의 정신은 난세가 아닌 호족 중심의 사회로 운영된느 평시에는 실천되기 어려운 제도였고 조조가 시작하였던 원호제도는 지금도 예산상의 이유로 기피하고 싶어하는 제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제6화> 명문가의 적자가 된 얼자,  원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