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자서전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자서전을 잘안남기는 나라라고 합니다. Obituary라고 불리는 부고기사도 한국은 매우 간략한 편입니다. 노벨상을 만든 노벨이 어느날 오보가 실린 자신의 Obituary를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상인’ 화약으로 거부가 된 노벨을 신문에서는 매우 좋지않게 평가한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노벨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노벨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런 비판적인 부고기사를 저는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김일성 같은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거의 대부분이 매우 안타까운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는 외국에는 없는 ‘사자명예훼손죄’가 존재하며 때론 진실을 말해도 처벌하는 독특한 제도가 살아있습니다. 외국은 죽은 사람은 물론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명예보다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방 이후 형법을 제정할 당시 국가를 이끌던 집권세력의 과거에 대한 원죄가 작용한 역사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작년 4월에서 6월까지 교회에서 논문을 쓰면서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여러 번 살펴보았습니다. 제 논문 주제가 한국 경영자들이 인문학을 학습하는 이유였고 그 원인을 살피자면 잡스가 말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와 식사를 할 수만 있다면 애플의 모든 특허권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말처럼 잡스가 한국에서 인문학 붐을 불러온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당시 최고의 전기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을 불러 자신의 전기를 써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아이작슨은 이미 아인슈타인 키신저 플랭클린과 같은 창의적 인물들의 전기를 작성한 대가였습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잡스는 40여 차례 인터뷰를 하였고 자신의 친구, 가족, 동료는 물론 자신의 라이벌이나 심지어 반감을 가진 사람들과 인터뷰하여 자신에게 부정적인 내용을 담는 것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약속하였습니다. 잡스는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한 찬양문이 아닌 사실 그대로를 담아달라고 부탁하였을까요?
잡스는 잘알려진 것처럼 시리아 출신의 아버지와 대학원생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였고 양아버지는 중고자동차를 수리해서 판매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잡스는 7살 때 또래 여자아이가 “너네 진짜 부모님은 널 원하지 않았다는 얘기야?”라는 말을 듣고 머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잡스는 평생 근처에서 큰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는 친아버지가 만남을 요청하여도 죽기까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잡스의 젊은 시절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는 삶이었습니다. 잡스가 젊은 시절 잠시 근무하였던 게임회사 아탈리사에서 그는 다른 직원들의 퇴근 시간에 출근하여 출근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능력은 있지만 골치아픈 직원이었습니다. 마침 독일에 판매된 제품의 AS를 요구하자 회사는 잡스에게 인도여행을 위한 경비를 제공하겠다고 유혹하여 파견하였습니다. 잡스를 파견한 뒤 독일에서 클레임이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보냈냐는 항의였습니다. 아탈리사에서 물었습니다. “클레임은 해결되었습니까?” 아탈리사에서는 클레임이 해결되었으면 다른 것은 묻지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잡스는 이른 나이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그것이 그에게 막대한 부와 명성 그리고 그에 걸맞는 악명도 떨치게 되었습니다. 악평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부가 그를 버린 나이 23세에 잡스도 똑같이 자신의 아이를 버렸습니다. 잡스의 부하 직원들 가운데 많은 직원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직원들은 잡스와 같은 E/L을 탓다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해고되는 두려움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친절한 상사는 아니었지만 잡스는 17세에 감명받은 문장인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꼭 성공할 것이다”라는 말에 걸맞게 성공한 삶을 살았고 공정하게 평가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잡스는 지독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위선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자신의 공과 과가 사실대로 기록되기를 원하였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에서 창의력과 통찰력을 배우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소개할 책은 사마천의 ‘사기’입니다. 그는 기원전 2세기 당시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시절의 사람입니다. 사마천은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의 비극적 체험인 궁형과 위대한 결산인 사기로 압축해서 표현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대대로 사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평생 역사공부에 몰두하다 한무제 시절 흉노정벌에서 항복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심기를 거스려 궁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책과 씨름하며 역사책을 쓰는 삶을 살던 사마천 앞에 갑자기 3가지 선택의 기로가 놓여졌습니다. 죽는 길과 궁형을 당하는 길 아니면 50만전의 속죄금을 내는 일입니다. 사마천이 갖은 노력을 하여도 5만전을 모으는 정도에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당대의 사대부들은 명예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던 문화에서 사마천은 비굴하게 궁형을 받는다는 비난을 감수하였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 마지막에 기록한 태사공자서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아버지의 유언, 그리고 굴욕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인 보임안서에서도 사마천은 자신이 환관이 되어서라도 사는 것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줄기를 흐른다면서 자신은 사기를 저술하여 이를 훗날 자신의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과 질책은 보상받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안은 사마천이 궁형을 받을 때 죽을 것을 권한 친구였으나 무제의 태자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을 앞두고 사마천에게 구명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직위인 중서령이 높은 자리인 것처럼 보이나 황제의 희롱의 대상이 되는 수치스러운 자리라며 그의 구명 요청을 거부합니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라는 자서전과 함께 열전의 맨 첫 부분에 백이숙제열전을 배치하여 하늘에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의 도리는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이 된다”는 말이 옳다면 어찌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은 굶어죽고 도척과 같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간을 회로 처먹는 사람은 제명을 누리고 살다 죽는 것인가라며 하늘의 도리는 있는 것이냐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천도 죽고 임안도 죽고 한무제도 죽었지만 사마천이 남긴 사기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흉노족을 토벌하러 갔다가 백등산에서 포위됩니다.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간신히 돌아와서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한무제는 그런 흉노를 토벌하고 국경을 확장시켰으나 말년에 미혹하는 참언에 빠져 자신의 태자를 죽이고 무당 술사들에게 농락당하였습니다. 같은 인물인 한무제를 기원전 역사가인 사마천은 혼군으로 기원후 후한의 역사가 반고는 명군으로, 1000년 후 송나라의 역사가 사마광은 폭군으로 기록합니다. 역사가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말은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명이 바라보는 삶은 백가지 시선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영학에서 ‘라쇼몽 효과’는 상품의 실패 원인을 각자 다른게 드는 것을 말합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한 사무라이의 사망 사건에서 등장인물마다 달리 설명하는 영화를 통해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는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소개하는 책은 제가 군대 내무반에서 읽었던 ‘남한산성에서 부는 바람’이라는 책입니다. 제가 군생활을 했던 1983년도에 군 내무반마다 몇 권씩 비치되어 장병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은 당시 남한산성에서 사형집행된 사형수들이 남긴 기록이었고 뒷부분에는 수감자들의 반성문이 담긴 국방부 권장도서였습니다. 고참의 모욕과 구타에 시달리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의 이야기는 이등병 시절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므로 맞춤법도 틀리고 글도 뒤죽박죽 이었지만 많은 느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감자들의 글은 자신이 얼마나 반성하는 지를 나타내는 모범답안 같은 문장 들 이었지만 사형수들의 글에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적하는 마지막 혼신의 노력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미 판결은 났고 집행을 바꿀 수는 없는 시점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기술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토스토엡스키가 시베리아의 유형장에서 황제의 장난으로 사형 집행을 체험하는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극적인 순간에 처형장의 포로들을 용서해주는 해프닝으로 황제의 힘과 은혜를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토스토엡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남한산성의 사형수들도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면 우리가 몰랐던 대작가가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책을 읽던 시점에도 이미 그들은 모두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잡스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더 의미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욕망과 꿈을 위해 달리던 사람들도 죽음에 임해서는 다른 감정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는 일본의 전국시대 무장들이 남긴 사세구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떠나는 이 내 몸이여 나니와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런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긴 것이고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먼저 떠나든 뒤에 남든 결국 같은 것. 함께 갈 수 없는 것을 이별이라 생각하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사세구입니다. 하이쿠처럼 간결한 느낌을 줍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전쟁터의 삶이었습니다. 각박한 순간 속에서 잠깐의 낭만을 찾으려는지 당시의 일본인들은 죽기 전에 남길 말을 사세구라는 형식으로 미리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인물들이 다양한 사세구를 남겼습니다.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도 통과의례로 삶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을 남기고 신도비라는 비석에 삶의 자취를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싸움은 1000원권 화폐 모델 이황과 5,000권 화폐 모델인 이이 제자들의 이기론 다툼이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싸움의 시작은 스승 송시열이 제자 윤증이 부탁한 부친의 묘비명을 비판적으로 작성한 일에서 발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보다 기록과 효를 중시한 민족다운 싸움이라고 생각됩니다.
젊음의 시기는 에너지를 가지고 자신의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시간입니다.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시기입니다. 부모님 말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아이가 집 밖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춘기가 시작되듯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세상에서 말하는 4대 성인들의 제자들에 관하여 생각해보면 석가의 제자들은 대부분 브라만 계급으로 상류계층이었습니다. 공자의 제자도 그랬습니다. 안회의 높은 학구열, 자로는 놀라운 무용담, 자공의 기상천외한 외교능력은 모두 그들이 당대의 엘리트임을 말해줍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플라톤을 비롯하여 대부분 상류계급입니다. 하지만 유독 예수님 제자들의 신분은 어부나 세금징수원처럼 낮은 신분이었고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민초들이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예화들을 소재로 한 말씀들이었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겁많은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그들은 다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았고 A.D 44년 야고보를 시작으로 74년 시몬까지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젊은 제자들은 젊음이 담긴 글을 남겼고 유일하게 장수한 요한은 연륜이 담긴 글을 남겼습니다. 인생에서 학습이란 책과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당대의 지식인인 정도전은 귀양지에서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깨어졌고, 정약용도 귀양지에서 노파의 말을 듣고 삶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 지혜를 다음 세대를 전승하는 생명체는 많지 않습니다. 삶을 통하여 얻은 지혜는 죽은 문자보다 힘이 있습니다. 시간의 맷돌은 모든 것을 가루로 날려버립니다. 그 속에서 기록된 삶은 기록되지 않은 삶보다 가치를 발휘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