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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07. 2023

<제8화> 조조의 거병

후한 시대에 청류와 탁류의 구별은 철저했습니다. 동탁의 원소와 조조에 대한 태도에서도 쉽게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동탁정권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도주한 것입니다. 원소의 경우에는 동탁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고 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탁은 원소가 최고의 청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령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경우에는 동탁의 부름에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은 채 그저 도망쳤을 뿐인데 곧바로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조조가 중모현에서 체포된 후 자신을 알아주는 관원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방면되기는 하였으나 그렇지 않았을 경우 조조는 이름 없이 비명횡사했을 것입니다.     

 

조조는 사대부로서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효렴’을 통하여 사마방의 추천을 받는 출사과정을 밟았음에도 환관의 집안인 엄당이라는 출신배경 때문에 늘 탁류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조조 자신은 이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가슴속으로는 이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사대부 출신으로 관원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하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대부 출신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관원’에서 찾지 않고 ‘사대부 출신’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조조가 만일 난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탁류로 낙인찍힌 이상 재주를 발휘하지도 못한 채 죽었을 가능성이 큰 일이었습니다.     

 

조조는 중모현을 지나는 중에 치안을 담당하는 정장에게 붙잡혀 현에 보내졌습니다. 조조에게는 다행히 현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벼슬아치인 공조가 조조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현령에게 조조의 석방을 부탁하였고 조조는 현령과 공조 덕분에 풀려나 진류군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를 구해준 사람이 진궁이었고 함께 지인인 여백사의 집을 찾아갔다가 돼지를 잡아 대접하려는 소리를 자신들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인하여 모두 죽이고 이에 질려버린 진궁은 다음날 조조를 떠난 것으로 나오지만 배송지의 주석에 조조가 여백사의 아들을 죽였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진궁에 대한 언급은 모두 창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조는 진류군에 도착한 후 재산을 풀어 병사들을 모았고 모두 5,000명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조조가 병사를 모은 이유는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병력이었습니다. 조조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소설인 요시카와의 삼국지에서는 진류에 도착한 조조가 아버지 조숭에게 병사를 모으기 위하여 부호들을 소개해 달라고 청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남에서 1~2위를 다투는 부호 위홍을 초대하여 가슴에 담긴 뜻을 피력하고 원조를 의뢰했다는 것입니다. 혹시 거절의 뜻을 밝힌다면 살려서는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작정을 가지고 담판에 임했고 다행히 위홍은 조조의 의견에 감복하여 군자금은 얼마든지 대주겠다는 대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관한 이설에는 다른 스토리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낙양에서 수많은 재물을 긁어모았습니다. 당시 낙양에는 도적이 개미떼처럼 돌아다녀 황궁의 창고마저 자주 털렸습니다. 조숭은 도둑맞을 것을 염려하여 그동안 긁어모은 재물을 모두 금으로 바꾼 다음 대장장이를 불러 스무 개의 커다란 금벽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야 보관하기가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던 조숭은 휴직서를 제출하고 산동의 자신의 옛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하여 새로 집을 지으면서 스무 개의 금벽돌을 푸른 돌벽돌처럼 색칠한 다음 대들보 양쪽을 받쳐주는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집이 완성되자 술상을 차린 다음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을 모두 독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집이 완성된 다음 부자로 소문난 조숭의 집에 열 차례나 도둑이 들었지만 금벽돌만은 무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숭이 중병을 앓게 되자 조숭은 조조를 불러 디딤돌이 금벽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자신이 죽어도 집 안의 재물이 앞으로 30년은 사용할 수 있으니 금벽돌은 대대로 물려주기 바란다는 말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조가 낙양에서 동탁 밑에 있다가 돌아온 다음 병사들을 모으고 그들을 먹일 군수물자에 쓰겠다며 조숭에게 청했다고 합니다. 조숭은 출세하는 것이 재물을 모으려는 목적인데 집안의 재물을 쓰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거절하고 집안의 모든 창고에 자물통을 하나씩 더 달고 나갔다고 합니다. 조숭이 집을 나서자마자 조조는 금벽돌을 모두 빼내고 돌벽돌을 칠해서 그 자리에 맞춰놓았고 돌아와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숭은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합니다.   

   

당시 황건적 토벌의 명장 황보숭과 개훈 등 다른 군웅들도 서로 눈치만 보며 기다리는 중에 190년 3월 조조는 홀로 군사를 이끌고 동탁을 치러 나섰습니다. 조조와 친분이 있는 장막만이 부하 장수인 위자에게 군사를 지원하여 조조 편에 가담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변수에서 조조군은 동탁이 보낸 서영의 군사들에게 대패하여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사촌동생 조홍이 자신의 말을 넘겨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조조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지만 당장은 쓰라린 현실이었습니다.      


조조는 수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술판만 벌이고 있는 제후들에게 원소 진영의 군사들은 맹진으로 진격하여 황하를 건너 낙양을 향하고 산조현의 군웅들은 성고현을 점령한 후 오창을 점령하고 노향현의 원술 군은 낙양 서쪽의 장안을 쳐들어가는 방책을 제의하였습니다. 조조는 손자병법을 정리한 탁월한 전술가이기도 하였지만 아무도 조조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병력을 모으러 양주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다행히 양주자사 진온과 단양태수 주흔이 병사 4,000명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돌아오는 길에 패국 용항현에서 병사 다수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배송지가 인용한 위서에는 반란군은 조조가 거처하는 장막에도 불을 지르고 난동을 벌였으며 조조는 혈투 끝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병사는 500명에 불과하였고 순식간에 대부분의 병사를 잃어버린 조조는 다시 패국에서 군사 1,000여 명을 불러 모아 원소군이 주둔하는 하내군으로 찾아갔습니다.       


수많은 군웅들 가운데 동탁군에 맞서 싸우려고 하는 장수는 조조 외에 손견밖에 없었습니다. 손견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 3월 같은 고향 출신인 주준에 의하여 좌군사마로 임명되어 많은 공을 세웠던 맹장이었습니다. 황건적의 난이 정리된 185년에는 서량에서 일어난 변장과 한수의 반란의 진압군에 참여하였습니다. 사공 장온의 초청을 받아 참전한 후 장온에게 무례한 동탁을 즉결처분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유순한 장온은 손견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190년 3월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한 손견은 합류하러 오는 도중에 형주자사와 남양태수를 죽이는 사고를 쳤습니다. 손견이 영릉에서 도적들을 토벌할 때 형주자사 왕예가 손권을 무시하자 기분이 상해있던 중에 무릉태수 조인이 형주자사 왕예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조인이 왕예를 죽이자는 위조된 격문을 보이자 바로 형주자사를 죽이고 만 것입니다. 이어서 남양 군에 도착해서는 자신이 몸이 아프다는 소문을 낸 후 남양태수 장자가 위문하러 오자 바로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당시가 난세라 하여도 반동탁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하여 오는 도중에 형주자사와 남양태수를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후에 손견은 남양 군 위에 위치한 노양현으로 진군하여 원술을 만났습니다. 원술은 임의대로 손견을 파로장군과 예주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손견은 당대의 명문가 원 씨 가문의 원술 밑으로 자발적으로 합류한 것입니다. 손견은 동탁의 기습을 받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이를 무사히 넘기고 191년부터 본격적으로 낙양 공략을 시도하였으나 서영이 이끄는 동탁군을 만나 참패를 하고 맙니다. 서영은 190년에는 조조를 191년에는 손견을 격파한 맹장이었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조와 손견을 모두 격파한 서영은 그 이후 말없이 사라지고 그 행적이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손견은 추격하는 동탁군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자를 부하 조무에게 주어 위기를 피하고 간신히 살아남게 됩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손견은 동탁이 보낸 호진과 여포 군이 장수와 부관의 반목을 이용하여 대파시키고 맹장 화웅까지 참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손견이 승리를 거두자 이를 시기한 원술에 의하여 군량 공급이 중지되는 불운에 처하게 됩니다. 곤경에 처하게 된 손견은 종전 형주자사와 남양태수를 단칼에 죽이던 기세와는 달리 원 씨 가문의 위세에 눌려 자신이 주둔한 양인에서 원술이 있는 노양현까지 100여 리를 야밤에 단숨에 달려 원술을 설득하여 다시금 군량 보급을 지원받게 됩니다. 

동탁은 여포를 적토마로 유인하였듯이 손견에게 이각을 보내 설득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회유합니다. 하지만 손견은 이를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동탁은 하늘을 거스른 무도한 인물로서 황실을 뒤집었으니, 내 오늘 동탁의 삼족을 멸해 사해에 보이지 않으면 죽어도 편히 눈감지 못할 것이다. 어찌 장차 동탁과 화친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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