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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08. 2023

<제10화> 동탁의 장안 천도

동탁이 이끄는 서량군들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강족과의 오랜 전투에서 단련된 서량 군은 산동의 군사들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탁은 한때 자신이 아꼈던 조조가 과감하게 덤비고, 유일하게 두려워하던 손견이 끈질기게 덤벼오자 생각을 달리하였습니다. 반동탁 연합군들이 낙양 인근까지 진출하자 사족들의 반대에도 동탁은 독단적으로 서쪽의 장안으로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이 방법은 ‘신의 한 수’처럼 효과를 발휘하여 낙양만 바라보던 제후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지리멸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동탁이 앞세운 헌제의 위명도 장안 일대에만 미치게 되었고 천하는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황족인 연주자사 유대는 동군태수 교모를 살해하고 자신의 부하 왕굉을 동군태수로 임명하였고, 청주자사 초화는 황하를 건넜지만 황건적이 청주를 침입하자 도망가다 죽었으며 원소는 자신에게 식량을 지원하던 문생고리였던 기주목 한복을 내쫓고 기주를 차지하였고 원술은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이자 동탁이 보낸 후임 형주자사 유표를 공격하였습니다. 형주의 땅이 탐이 난 것입니다. 

 

동탁을 비난하던 제후들도 이제 동탁처럼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손견은 낙양에서 황제의 도장인 전국새를 발견하자 잠시 황제의 꿈을 꾸었지만 원술이 협박하자 전국새를 자신의 물주인 원술에게 바쳤고 원술은 욕심을 내고 황제를 자칭했다가 처참하게 망했습니다. 동탁이 소제 유변을 폐위한 것을 비난하던 원소는 자신과 가까운 황족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다 유우 본인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했습니다. 동탁에 의하여 허수아비 황제에 오른 헌제는 동탁이 여포에 의해 죽은 이후에도 왕윤, 이각과 곽사, 조조를 거쳐 조비에 의하여 폐위되기까지 허수아비 노릇을 하였습니다. 황실 복원을 외친 유비도 헌제를 모셔올 생각은 전혀 없었고 200년 전 광무제가 후한을 다시 세운 것처럼 한실의 후예인 자신이 황제가 되어 촉한을 통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탁은 안하무인의 성격이라 무서운 사람이 없었고 상관의 명령이나 심지어 황제의 명령도 거부하던 장수였지만 유일하게 손견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과거 장온의 참모였던 손견이 자신을 처형하자는 의견도 제시했던 서로 감정이 안 좋은 사이였지만 무작정 싸우기보다는 자기편으로 포섭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관동의 군대는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손견만은 젊고 외고집인 데다,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과거 상관이었던 장온은 나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손견의 상사인 주진도 마찬가지였소. 내가 전장의 흐름을 보고 작전을 세워 공을 세웠기에 조정에서는 나를 도향후에 봉했었고, 손견이 좌군사마가 된 것도 같은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었소.”<삼국지 오서 손견전>의 내용이었습니다. 

 

동탁의 천도 이유는 반동탁 군의 손견의 낙양 진격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화폐개혁의 실패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로 발생한 민심 이탈이 가장 큰 이유라고 경제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낙양의 곡물가격이 1곡에 50만 전으로 올랐고 콩과 밀도 1곡에 20만 전으로 폭등했다는 것입니다. 십상시의 난 와중에 낙양에 입성한 뒤 재빠르게 군권을 장악한 동탁은 위기에 처한 조정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군권을 장악한 다음, 어린 헌제를 옹립하며 전황제와 하태후를 연금하고 잠재적 적들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비 강화를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동탁은 수도 낙양에 운집한 거상들과 황족, 외척들의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보고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서량 군을 시켜 거상들을 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당시 낙양에는 과거 진시황이 천하의 무기를 거두어 만든 거대한 동상 12개를 함양에서 옮겨놓았는데 동탁은 동상을 녹여 새로운 동전을 주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과거 전한을 무너뜨린 왕망도 호족과 거상을 누르려고 화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기존의 오수전을 폐지하고 재료인 철은 줄이면서 가격은 전보다 50배 높인 “대천오십”과 560배나 되는 “도전”을 신화폐로 유통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인플레는 심해졌고 나라 경제가 흔들렸습니다. 왕망의 새로운 정책은 악평만을 남겼고 사족들이 기록한 역사책에는 새로운 화폐정책으로 신 화폐는 거부되고 위조가 성행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왕망전은 우리나라의 한반도와 제주도에서도 여기저기 발견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사용되지 않았는데 위조가 성행했다는 기록은 사족들의 왕망에 대한 편견이 담긴 모순되는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왕망시절 화폐 위조범은 이웃 다섯 가구를 연좌제로 묶어 함께 화폐주조소의 관노비로 전락시키는 잔혹한 형벌이었으나 정책은 실패하였고 화폐제도는 종전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동탁의 화폐개혁도 초인플레로 실패하였습니다. 생산은 줄고 화폐는 늘자 인플레가 심해진 것입니다.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국 독립전쟁도 영국의 새로운 세금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고 박정희 정권 말기의 부마사태도 새로운 세금인 부가가치세의 도입이 중산층의 반감을 산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할 정도입니다. 

 

동탁의 화폐 공급 증가는 당연히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왕링옌은 관동의 태수, 자사, 조목들이 종전의 소전을 유통시키지 않으면 동탁을 처단하겠다고까지 주장할 정도로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동탁도 처음 낙양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천하의 명사들을 초빙하였습니다. 시중 자리에 오경, 상국장사에 하옹을 등용하였고, 순욱의 백부 순상을 사공에, 훗날 구품중정제를 만든 진군의 아버지 진기를 대신으로 발탁하였습니다. 환관들을 비판하다 유배된 채옹도 발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동탁 군이 낙양 가까이 오자 동탁은 사족들의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였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손견의 전투력입니다. 손견은 서영에게 참패했으나 호진과 여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불타버린 텅 빈 낙양을 점령한 다음 황제의 종묘를 정리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동탁이 이각을 보내 손견을 유혹했으나 손견은 동탁보다는 원술의 부하로 지내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동탁은 장안성 서쪽 260리에 방어시설을 만들어 미오 혹은 만세오라 불렀습니다. 이곳에 30년은 버틸 수 있는 곡식을 저장하고 노모를 거주시키고 금 2~3만 근과 은 8~9만 근, 그 외 옥, 비단 등의 보물과 귀중품을 저장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동탁은 재물보다는 부하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리더십을 보였으나 장안에서의 동탁은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황건적 토벌 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온을 시장터에서 매질로 살해하였습니다. 동탁은 장안성을 두려움을 통하여 다스렸던 것입니다. 

 

동탁은 정치는 사도 왕윤에게 맡겼습니다. 왕윤은 문관이면서도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한무제 시절의 대장군 위청과 곽거병의 용맹과 기백을 숭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왕윤은 어린 시절 제왕을 보좌할 재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후한서 왕윤전에 기록된 인물로 그의 명성은 삼공이 동시에 그를 불러 시어사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왕윤을 예주자사로 임명하고 공융 등 명사를 왕윤의 종사로 삼았습니다. 왕윤은 전투에서 작전뿐만 아니라 직접 전선에서 적과 싸울 정도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발휘하였고 예주 지역의 황건적을 철저하게 토벌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왕윤은 수십만의 황건적의 투항을 받아들였는데 적의 군영에서 중상시 장양의 빈객이 쓴 서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에는 군사기밀이 적혀있었고 왕윤은 장양이 황건적과 사통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영제는 자신이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신뢰한 장양을 질책하며 화를 냈지만 영제와 가까운 장양은 황제에게 자신이 모함받고 있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위기를 넘긴 장양은 다음 해에 왕윤의 꼬투리를 잡아 하옥시켰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조정의 대사면이 이루어져 왕윤이 출옥하자 장양은 다시 죄목을 날조하여 하옥시켰습니다. 사도 양사가 왕윤을 걱정하며 장양에게 사죄하기를 권하였고 혹자는 차라리 독배를 마시고 죽을 것을 권하여도 왕윤은 당당히 거절하였습니다. 장양은 왕윤을 죽이려고 했으나 조정 대소 관리들이 모두 구명에 나서자 영제에 의하여 사형은 면하였고 왕윤은 낙양을 떠나 지방을 떠돌아다니다 영제가 죽은 후에 하진에 의하여 발탁되어 군부의 참모인 종사중랑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진이 곧 십상시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낙양이 난리에 처한 위기의 순간에 왕윤은 상서 노식과 어가를 지키며 황제를 회궁 시키는 공을 세웠습니다. 

 

동탁은 헌제를 세우며 왕윤을 사도로 임명하여 삼공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왕윤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며 신임을 얻었습니다. 왕윤은 먼저 사례교위 황완과 상서 정공업과 동탁을 죽일 계획을 모의하며 병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황제에게 양찬을 좌장군으로 추천하고 중앙 위수사령부 사령관에 해당하는 집금오인 사손서를 남양태수로 임명하도록 하여 지방 병력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원술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도록 조처하였는데 동탁이 이를 의심하여 경계태세를 갖추면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전국이 자연재해로 고생하자 왕윤은 사손서, 양찬 등과 고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동탁의 암살 모의를 하였지만 동탁의 주도면밀한 경계에 막혀 쉽사리 시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윤은 동탁 휘하의 맹장 여포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여포는 동탁이 자신을 양아들로 삼아 경호 임무를 맡겼으나 동탁의 주력인 양주 출신이 아닌 병주 출신이었습니다. 겉으로 동탁과 여포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여포가 동탁의 시녀를 좋아하면서 틈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궁중의 궁녀로 초선관 관리를 맡았으므로 나관중은 그녀를 초선이라 명명하였고 왕윤의 수양딸로 묘사하면서 둘 사이를 이간질시켰다고 신비스럽게 그렸지만 역사책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다만 그녀를 초선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여포가 왕윤을 만나 뜬금없이 어제 동탁이 던진 창에 맞아 죽을 뻔했다고 불평을 말했습니다. 왕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동탁 제거를 위한 모의를 이야기하며 호응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여포는 부자지간이라며 머뭇거리자 왕윤은 

“무슨 부자의 정이요. 장군의 성은 여씨이고 그 자는 동 씨인데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시오. 지금 장군 자신의 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무슨 부자의 정을 말씀하신단 말이오. 화가 났다고 창을 던지는 아비를 보신 적이 있소?”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일로 불안불안하던 여포는 동탁 제거에 끼어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2년 4월 어느 날 병에서 쾌차한 헌제는 신하들을 미앙전에 부르는 것으로 동탁 제거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윤이 동탁 암살을 위해 함정을 파고 유인한 것입니다. 여포가 조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헌제도 동탁 암살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윤은 여포와 이숙 등 10여 명과 대기하고 있다가 궁궐에 들어온 동탁을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고 황보숭은 군대를 이끌고 미오로 쳐들어가 동탁의 동생 동민과 동 씨 일족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과거 동탁이 원 씨 일족을 모두 죽인 일을 기억한 원 씨 문생고리들은 동 씨 일족의 시신을 모아 불에 태운 다음 그 재를 길가에 버려서 원 씨 일족의 원한을 갚았다고 합니다. 

 

왕윤은 공을 세운 여포를 분위장군과 의동삼사에 임명했습니다. 의동삼사는 삼사와 똑같이 대우한다는 의미로 삼사는 최고위직인 삼공을 말하며 여포에게 이후 삼공과 동일한 의전으로 대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여포를 온후에 봉했는데 ‘온’은 하내군의 온현을 기리키며 현 하나를 식읍으로 여포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여포의 전성기라고 평가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동탁은 189년 8월부터 192년 4월까지 만 3년이 안 되는 기간 후한 조정을 지배하였습니다. 동탁이 집권한 기간 지방 제후들은 중앙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반독립상태로 떨어져 나갔고 후한의 군웅할거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삼국지는 동탁의 실패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포의 배신입니다. 동탁은 사소한 다툼으로 신뢰를 잃게 되었고 여포가 시녀와 통정한 일을 계기로 왕윤의 도구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소제 유변을 폐하고 진류왕 유협을 옹립한 것입니다. 동탁은 농서군 출신이고 영제의 어머니 동태후는 하간국 출신으로 혈연관계는 없던 것으로 보이나 성이 같으므로 서로 우호적인 꽌시를 형성하였던 사이로 보입니다. 유협이 유변보다 어리고 유능하였지만 이미 즉위한 황제를 내치는 것은 사족들의 관점에서 정치적 명분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셋째, 군사력을 가지고 정권을 차지할 수는 있지만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라고 중국인들은 믿고 있는데 지나치게 동탁은 공포정치에 의존하였습니다.

넷째, 동탁은 중앙 정계의 사족들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낙양 시절에는 주필과 오경을 신임했으나 그들이 추천한 인물은 모두 반동탁 군이 되었고 동탁은 추천자를 죽였지만 장안에서 중용한 왕윤은 동탁의 암살을 모의하였고 결국 성공시켰습니다. 이처럼 동탁의 인복은 너무나 없었습니다. 

다섯째, 동탁은 서쪽 변방의 장수로 출세한 인물이지만 후한의 주류는 낙양과 산동 출신이었습니다. 관동에서는 문신이 관서에서는 무장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지역색이 강하였습니다. 후한 말기는 관동 출신이 주류였으므로 서량에서 벼락출세한 동탁이 관동 출신들의 눈에는 불편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즉 변방과 중앙 명문가들의 대립과 갈등은 결국 변방이 패하고 명문가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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