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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09. 2023

<제10화> 왕윤의 몰락과 이각, 곽사

   동탁이 왕윤의 계책에 의하여 여포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할 때 동탁의 군대는 장안 동쪽 섬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동탁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오자 동탁군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동탁의 사위이자 후계자로 알려졌던 우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보는 평소 미신에 빠져 무당 말을 믿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탁 휘하에서 동중랑장을 지낸 동월은 반동탁 군에 맞서 민지를 지키는 장수였습니다. 그가 우보의 측근 점술가를 채찍으로 때린 적이 있었는데 동탁이 죽고 불안해진 우보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점을 쳐서 길흉을 살핀 다음 만나는 몸조심을 하였습니다. 평소 앙심을 품은 점쟁이는 중랑장 동월이 오자 원한을 갚으려 하였습니다. 점을 쳐서 화택규괘를 얻었는데 이는 상괘는 불이고 하괘는 연못인데 이를 해석하기를 “불이 쇠를 이기니 바깥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을 도모하는 괘입니다.”라고 말하여 우보가 동월을 죽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2006년 연세대 정시 논술시험 문제의 첫 번째 지문에 주역의 화택규 괘의 설명이 등장합니다. “불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밑으로 흘러가니 이것은 서로의 의사가 합쳐지지 않고 반목해서 서로 배반하는 상태이다”라는 문장이 출제 지문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문열의 삼국지 2권에는 “먼저 우보가 이각을 배반했으며 다시 호적아가 그 우보를 배반했으며 이제는 그 졸개들이 또 그 호적아를 배반한 것이다. 대저 무리를 이룸에 반드시 대의가 필요한 까닭이 이와 같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동탁이 죽자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네 장수가 각기 길을 나누어 장안으로 쳐들어가고 동탁의 사위 우보도 군사 5천을 이끌고 장인의 원소를 갚으러 선봉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동탁의 잔당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오니 왕윤은 여포를 불렀고 여포는 이숙을 데리고 출전하여 이숙과 우보가 서로 싸웠는데 선봉장 우보는 패하였으나 밤에 방심하는 이숙을 기습하여 이숙은 군사의 반을 잃고 여포에게로 도망쳤습니다. 화가 난 여포는 이숙의 목을 베고 난 다음날 우보와 맞서 대패시키자 우보는 이각에게로 도주하였습니다. 겁이 난 우보는 심복 호적아를 데리고 이각 진지의 금은보화를 훔친 다음 도주하였는데 호적아는 생각이 바꿔 우보를 죽이고 그 목을 가지고 여포에게로 찾아갔습니다. 여포가 투항한 이유를 묻자 우보의 졸개 하나가 나서서 “호적아는 여포 장군께 충성을 바치고자 우보를 죽인 것이 아니라 우보가 지닌 금은보화가 탐이 나서 죽였을 뿐입니다.”라고 고자질하자 여포는 그 자리에서 호적아를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배신이 난무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이각과 곽사가 장안성을 포위한 지 8일 만에 여포 휘하의 일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각과 곽사의 군대를 성안으로 끌여들였습니다. 여포는 성안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도주하다가 황궁 청쇄문 밖에서 왕윤을 만나자 같이 도망가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왕윤은 “지금 황상께옵서 연소하시어 모든 것을 나에게 의지하고 계시니 국난에 이르러 어찌 혼자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치겠소. 장군이 성은 나선 후에 관동의 여러 장수들을 돌려하여 황상과 국가를 염두에 두로독 해주시기 바라오.”<후한서 왕윤전>에 기록된 말입니다.      


왕윤은 짧은 집권 기간에 살려달라는 채옹을 처형하고 사면을 청하는 이각과 곽사에게 사면령은 1년에 한 번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양주의 토호들을 불러 이각을 달래줄 것을 부탁하면서도 거만한 태도로 그들을 분노케 하여 결국 사태를 극단으로 몰고 간 미숙한 정치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천하의 명장 황보숭과 개훈도 동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동탁의 부하가 되었는데 동탁의 발탁으로 벼락출세한 뒤 동탁에게 아부하며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음에도 헌제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충성심만은 인정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죽음에 임하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처신을 분명하게 한 것은 평소 사생관이 뚜렷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1961년 2 공화국의 총리였던 장면은 그의 청렴함 등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5 16 혁명이 발생하자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려다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동숭동의 갈멜 수도원에서 며칠간 숨어 지내며 국가 위기 시에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덕일은 윤보선 대통령이 5 16 혁명이 일어나자 일어날 것이 났다며 찬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장면은 평생 혁명을 막지 못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며 살았다는 평가를 하였지만 위기 시의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는 아쉬운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1979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로 인한 국가 혼란 시에도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대피시키려고 숨어 지내다가 갑자기 육본에 등장하여 부하들에게 수경사 사령부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여 반란군에 백기를 들었던 모습과 정반대로 왕윤의 마지막은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정치가로서 부끄럼이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왕윤이 헌제를 모시고 선평문으로 도피하자 이각 등이 이를 보고 성 아래 엎드려 고개를 숙였습니다. 당시 10여 세인 헌제가 이각 등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너희들은 군사를 풀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이각이 대답하기를 “동태사가 폐하에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여포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오직 동태사의 원수를 갚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각 등은 사도 왕윤을 나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왕윤은 성루 아래로 내려갔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헌제가 14세가 되어 관례를 거행하고 성년이 된 해에 4월부터 7월까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곡물 가격이 폭등하였습니다. 헌제는 시어사에게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지만 굶어 죽는 이들은 계속 늘어갔습니다.      


조정의 실권은 이각과 곽사가 잡고 있었습니다. 영제 시절부터 반란을 일으키던 서량의 한수와 마등은 동탁이 권력을 잡고 나자 동탁과 같은 고향 출신인 인연도 있었으므로 투항하였고 동탁은 한수와 마등의 투항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원소가 반동탁 군을 일으켰던 때였습니다. 동탁을 계승한 이각은 한수를 금성으로 돌려보내고 마등에게는 다른 지역의 방어를 맡겼습니다. 마등은 이각에게 사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 뇌물을 보내며 아첨을 했지만 이각은 전혀 반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수치심을 느낀 마등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이각에 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한수와 마등은 연합하였고 조정 대신들 중에는 이각에 대항하기 위하여 마등과 힘을 합치는 자들도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각이 전투력이 강한 번조와 곽사, 그리고 조카인 이리를 파견하자 번조는 뛰어난 실력으로 마등과 한수를 격파하고 반란군 편을 들던 대신들도 모두 처리하였습니다. 기세등등해진 번조는 못마땅한 이각의 조카 이리를 질책하며 “사람들이 네 숙부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하는데 너는 내가 너를 벌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이에 조카 이리는 번조에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번조가 마등과 한수를 격파하면서 추격을 하자 한수가 번조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와 나는 같은 고향 사람이 아니오. 이제 내가 떠날 것이니 그대도 더 이상 추격하지 마시오.”

그들은 각자의 군대를 후퇴시킨 다음 서로 손을 맞잡고 한참을 이야기한 후 헤어졌습니다. 

대군이 장안으로 돌아온 다음 이리는 숙부 이각을 찾아가 고자질했습니다.

“번조와 한수가 만나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주 친한 사이로 보입니다.”     


이각은 평소 전투력이 뛰어난 번조를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번조를 불러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한 다음 불러 바로 죽여버렸습니다. 번조를 죽인 후 서로 단결하였던 양주병 장수들끼리도 의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각과 곽사는 평소 사이가 좋았서 서로 식사를 같이 하고 상대의 집에서 머무는 등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곽사의 아내가 질투심이 많았는데 이각이 곽사 집의 계집종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이각의 집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계략을 꾸몄습니다. 어느 날 이각이 곽사집에 먹을 것을 보냈는데 곽사 부인이 독약이 들었다며 이각을 믿지 말라고 곽사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곽사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점점 의심의 눈길로 이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각과 곽사는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싸우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헌제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각은 황제인 헌제를 인질로 삼아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군사들을 궁전으로  보내 기물을 약탈했습니다. 곽사도 황제 대신 태위 양표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불러온 다음 모두 감금하였습니다. 이각과 곽사는 수개월 동안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헌제는 이각과 곽사가 어려워하는 가후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가후가 서량 군에서 지도력을 가지게 된 계기는 왕윤이 동탁을 죽이고 우보는 부하 손에 죽은 뒤 교위 이각 곽사 장제 등이 이끄는 서량군들은 두려움 속에서 모두 도주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우보의 군대에 있다가 당시 서량 군 토로교위로 있던 가후가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군대를 포기하고 개별적으로 해산한다면 조정에서 군사를 풀어 우리를 잡아내어 살해할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 모두 합심하고 힘을 모아 장안으로 진격하여 동태사의 원수를 갚도록 하십시다. 일이 잘되면 천하를 호령할 것이고 일이 실패하면 그때 도망쳐도 늦지 않습니다. 죽고 살기로 한 번 붙어봅시다.” 가후의 한 마디로 지리멸렬하던 동탁의 잔당들이 다시 천하의 패권을 잡게 되었는데 헌제의 부탁을 받자 가후는 이각의 부하들이었던 강인과 호인 수령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그들에게 작위와 재물을 주는 한편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떠날 것을 종용하자 많은 이들이 떠나면서 이각의 세력은 점차 부실하여졌습니다. 가후는 이각을 떠나 고향이 같은 단외에게로 몸을 옮겼습니다.  

    

이각과 곽사의 싸움이 가열되자 동료 장군인 장제가 화해를 시키고 헌제를 홍농으로 모셔가려고 했습니다. 이각과 곽사는 상대의 딸을 인질로 화해하고 헌제는 낙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헌제는 이각과 곽사가 지배하는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낙양으로 가는 길을 험난했습니다. 황제가 황하를 건너는 방법은 어려웠습니다. 황하의 제방은 수면에서 상당한 높이에 있었습니다. 힘 좋은 병사가 황제를 업고 비단으로 묶은 채 천천히 기어내려 갔습니다. 강가에 도착하자 서로 먼저 배에 올라타려 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모두 다 태우면 배가 위태로울 것 같았습니다. 황후의 오라버니인 국구 동승이 칼을 꺼내 뱃전에 올라오는 사졸들의  손을 내리쳤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참상이 연출되었습니다. 헌제가 장안을 떠나자 장안성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사람들은 사방으로 이주하고 이후 2~3년이 지나자 장안 일대는 인적조차 보기 드문 황무지로 변했다고 합니다.      


건안 원년 196년 동승 장양이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습니다. 낙양은 잿더미로 변해있었습니다. 다행히 형주목 유표가 식량과 재물을 보내와 간신히 헌제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여 상서랑 이하 관원들은 직접 산으로 들로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이때 조조의 모사 순욱이 말했습니다. 

“진 문공이 주나라 양왕을 영접하자 제후국들이 문공을 패주로 천거하였습니다. 한 고조 유방이 의제를 위하여 예를 갖추자 천하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천자를 받들어 민심을 따르면 지금이 가장 호기입니다.” 조조는 동의하였습니다.      


이전에 원소도 건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후한서 원소전에는 “만약 장군께서 천하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병마를 모아 조정에 복종하지 않는 역적을 토벌한다면 천하에 누가 감히 장군에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건의를 받았지만 반대파의 “한조는 이미 몰락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천자를 영입한다면 사사건건 주청을 올리면서 자신의 수족을 꽁꽁 묶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복종하지 않는다면 성지를 어겼다는 죄목을 받게 됩니다.”의견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조조의 보호를 받던 헌제는 8월 말에 조조의 근거지인 허현으로 이주하고 허도로 이름을 개칭했습니다. 조조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무평후로 봉했습니다. 헌제는 허도에 선조의 종묘를 건설하고 국가의 상징인 사직단을 만들었습니다. 헌제는 조조의 요청으로 원소를 책망하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광활한 영지를 갖고서도 헌제를 돕지 않은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원소는 황급하게 변명하는 상주문을  올렸습니다. 조조는 다시 헌제에게 원소를 달래려 태위에 임명하는 조서를 보냈습니다. 원소는 때를 놓친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조조는 수많은 군웅 가운데 한 명이 아닌 허수아비 헌제를 조종하는 실질적인 파워맨이 된 것입니다. 


 동탁과 그 부하인 이각 곽사의 군벌정치는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택동이 말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치입니다. 그 이후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창업군주들은 군사력을 가진 어제의 혁명동지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이 창업 동지들의 부귀영화는 보장하되 병권은 박탈한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피의 숙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중국의 마지막 군벌정치는 청나라가 1911년 망하고 천하의 병권은 청의 조선총독 격인 ‘감국대신’으로 대원군을 납치했던 원세개가 장악하게 됩니다. 태평천국의 난을 막으려고 한인들에게 병권을 주었던 청왕조는 증국번을 등용하여 반란을 막았고 증국번은 후계자로 이홍장을 세웠고 이홍장은 북양군벌을 원세개에게 물려줍니다. 원세개가 1916년 갑자기 죽은 후에는 북양군벌은 단기서의 안휘파, 풍국장의 직예파, 장작림의 봉천파로 나누어지고 장개석의 북벌로 정리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권성욱의 <중국군벌전쟁>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모택동은 말년에 자신의 사후 다시 군벌정치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여 강청과 4인방 대신 자신에게 도전한 등소평을 복권시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중국이 다시 삼국시대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일본 군벌에 대한 연구는 보안사 출신인 강창성이 정리하였는데 명치군벌은 지역 중심이고 대정군벌은 지역과 학벌이 섞이다가 소화군벌은 학벌 중심으로 변화되었다고 요약하였습니다. 박정희 시절 보안사령관으로 1973년 윤필용 사건을 수사하다 하나회를 건드린 이유로 전두환에 의하여 53세의 나이로 삼청교육대의 쓴 맛을 본 강창성은 감옥에서 출옥한 뒤 명지대에서 일본문제연구소장을 지내며 1991년 <일본/한국의 군벌정치>를 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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