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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6. 2020

최영 장군, 구국의 영웅인가, 망국의 책임자인가

최영 장군은 1316년 동주 최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주는 철원의 옛 이름이고 동주 최씨의 시조 최준옹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건국 공신이었습니다. 아버지 최원직은 16세의 최영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최영은 평생 그 유언을 지켰다. 최영은 청렴한 인물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파에게 반역죄로 개경에서 처형당했다. 그는 죽음에 임해서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388년 12월 그가 처형되던 날 개경 사람들은 철시하였다고 한다. 원근 각지의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모두 그를 위하여 눈믈을 흘렸다고 한다. 시신이 길 곁에 버려져 있었는데 길가는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서 갔다고 하였다. 처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최영의 훌륭함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를 처형한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도 왕이 된지 6년만에 그에서 부민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말에 제거된 수많은 무장들 중에서 유일한 경우였다. 고려 문관들 중에는 조선에서 계속 등용되는 인물이 많았지만 무장들은 건국과정에서 철저하게 숙청되던 시절이었다.


또한 최영 장군은 무당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로 민간 무속의 신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비슷한 경우로는 세조의 부마였던 남이 장군을 들 수 있다. 조선 세종때 편찬되기 시작되어 문종때 완성된 고려사에도 그의 청렴함을 칭찬함에 인색하지 않았다. 조선초기 시인 변계량은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 바치니/,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로"라며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전쟁터에서 용감무쌍하고, 국가원로로서 청렴했던 인물이 어찌하여 반역죄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을까? 역사 속에서 그는 왜 그 마지막을 이토록 바참하게 그 끝을 맺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첫째 전쟁터에서 최영은 용감무쌍한 장군이었습니다. 고려말에 이성계와 더불어 불패의 장군이었습니다. 원나라 말기 처들어온 홍건적과의 싸움에서, 그의 능력은 원나라도 인정하여 강소성에서 장사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말에 공민왕때부터 공양왕때까지 41년간 총 506회 쳐들어온 왜구들도 최영 장군을 '백수최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내부적으로 공민왕 원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공민왕 12년 최측근 김용의 흥왕사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되기도 하였습니다. 1374년 몽골족 목호들이 일으킨 제주도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오자 공민왕이 암살되는 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가문 대대로 문관의 집안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과거를 준비하기 어려웠고 용모가 장대하고 완력이 뛰어났다는 기록처럼 무관에 기질이 맞아서 장군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김영수는 최영과 이순신을 비교하여 이순신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전쟁의 끝에서 전사하였지만, 불행히도 최영은 정치의 세계로 진입했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 위치 우왕이 가장 의지하는 가장 정치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권력투쟁의 장인 정치판에서 최영은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습니다. 정치판에서 최영의 자리는 존재만으로도 상대에게 위협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신돈이 득세하자 비서실장격인 밀직사 김란이 두 딸을 신돈에게 바치자 최영 장군은 이를 비난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전권을 수여했을 때 최영은 강화도에서 동서 강도지휘사로 왜구를 방어하는 직책에 있었습니다. 공민왕과 신돈은 최영을 파면하고 경주로 좌천시켰습니다. 최영은 고민했겠지만 이에 복종했고 신돈은 다른 관리를 보내 최영을 처형하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목숨만은 건지고 6년간 귀양살이를 하게되었습니다.


신돈이 숙청되고 최영은 다시 복권이 되었고 제주도의 몽골족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왔으나 공민왕은 죽은 뒤었습니다. 친명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이 사라지고 실권자가 된 이인임은 친원정책을 추구하여 신진사대부들의 친명정책과 충돌하였습니다. 최영은 이인임의 편에서서 신진사대부를 참혹하게 심문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왕의 사부였던 전녹생과 이색의 처남이자 유생이었던 박상충은 후유증으로 귀양가던 중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최영 장군은 신진사대부를 죽을 정도로 고문한 것입니다.


1379년 우왕 5년 우왕과 이인임이 충돌했을 때 최영 장군은 이인임의 편에 섰습니다. 우왕이 최영을 불렀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우왕은 최영에게 "그대가 어떤 적을 막고자 하여 군사를 옹위하고 오지 않느냐, 그대가 일찍이 스스로 누대의 충신이라 하더니 충성한 마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 반야를 잃고 유모 장씨 손에서 자라난 우왕은 권력투쟁에 패하고 유모 장씨를 이인임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고 얼마후 유모 장씨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모 장씨를 통하여 이인임을 견제하려던 우왕의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최영이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388년 권문세족의 빈틈을 노리던 우왕은 최영과 손을 잡고 이인임을 귀양보내고 권신들과 그들의 가신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권신 염흥방의 가노 이광이 조반의 토지를 강탈하자 조반은 염흥방에 애원하고 이광에게 간청하다가 마지막에 조반은 칼을 들고 이광을 죽였습니다. 이에 염흥방은 왕명을 빙자해 조반을 반역죄로 가두고 고문했으나 조반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우왕은 최영의 집을 방문해 동맹을 맺고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습니다. 권신 가문의 남자들은 갓난애까지 수장되었고, 여자들은 고문을 당하여 옥사하거나 임진강에 수장되었고 살아남은 여자들은 관비로 전락하였습니다. 다만 이인임은 공이 허물을 덮을 만하다는 이유로 예외조치를 하였습니다. 최영의 향배에 따라 국가의 풍향이 달라지는 고려 말의 정치상황이었습니다. 우왕은 최영의 서녀와 결혼까지 하면서 혼인동맹을 맺으려 하였습니다. 최영의 반대에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셋째 1999년 홍영의는 <최영 구국의 영웅인가, 망국의 책임자인가>라는 질문을 역사비평에서 던진 바 있습니다. 여말선초의 유학자인 윤소종은 최영의 죽음을 평하여 "공은 이 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2006년 김영수는 최영은 원칙은 있었지만 비전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때문에 그는 이색, 정몽주, 정도전이 아니라 권신 이인임과 결합하였던 것입니다. 이성계는 달랐습니다. 변방의 일개 무장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이색과 친교를 나누었고 정몽주, 정도전, 조준을 발굴함으로써 역사적 변혁을 성취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최영이 춘추(春秋)에서 적을 치는 대법을 알지 못하여 위로 천심(天心)을 어기고 아래로 인망(人望)을 어겨서 괴수를 놓아주고 베지 않았습니다. 이에 나라 사람이 적괴가 온전한 것을 보고도리어 그 마음을 바꿔 말하기를 "하늘이 화(禍)를 주니 못하니 악(惡)을 행하는 것이 진실로 해될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대저 사람이라면 누가 마음에 부귀(富貴)를 즐겨하지 않으며, 누가 빈천(貧賤)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불충불의(不忠不義)하며 흉악, 극악하여도 부귀를 얻어 보존하고 그 자손에게 물려주고도 뒤탈이 없으면 누가 다시 충의를 다하여 그 빈천을 자손에게 물려주려고 하겠습니까(고려사열전 39 이인임)


최영은 청렴했지만 국가적 비젼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삼국지에서 황보숭은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장각의 동생 장량을 죽였으며 죽은 장각의 시신을 목을 베어 낙양으로 보냈다. 한수와 마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동탁과 함께 토벌하는 명을 받았다. 동탁과 의견이 갈렸지만 홀로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황제인 영제가 동탁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고, 병력을 황보숭에게 넘기라는 명령도 다르지 않았다. 조카 황보력은 동탁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으나 조정의 명령이 없다고 조정에 보고만 했다. 동탁은 조정의 명령도 무시하다 하진이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낙양으로 불러들이자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90년 동탁은 황보숭을 불러들여 죽이려 했지만 황보숭의 아들인 황보견수가 동탁에게 눈물로 호소하여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당한 후 이각이 전횡하던 기간 병이 들어죽었다.


황보숭이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울 때 염충이 거병하지 않으면 한신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며 충동했으나 거절하였다. 황보숭은 명려에는 충실하였지만 난세에 자신만의 리더십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비젼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최영의 최후는 황보숭보다 비장하다. 정몽주가 조선시대 문묘에서 받들여졌다면, 최영은 무속에서 존숭받고 신격화되었다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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