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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7. 2020

간신으로 죽고 영원한 충신으로 부활한 인물, 정몽주

정몽주는 1338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1392년 개경 선죽교에서 암살된 고려의 정치가이자 유학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화폐 인물을 보면 조선시대의 신사임당, 이율곡, 이퇴계, 세종대왕, 이순신이 등장하는데 모두 성리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리학을 고려에 도입한 인물은 안향이지만, 불교국가이던 고려를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꾼 주도적인 인물 중에 하나이며 조선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된 첫 번째 인물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양화대교 입구에 정주영(하동 정 씨) 회장의 후원으로 정몽주(영일 정 씨)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 태조 이성계 시절에는 간신(奸臣)으로 평가되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정몽주의 손녀가 2대 임금인 정종의 서자와 혼인하였고 3대 태종 때 위상이 회복되었다가 무엇보다 정몽주의 제자 권우가 세종과 정인지의 스승이 됨으로써 조선왕조 시절에 성자와 비슷한 반열에 오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 길재의 학맥이 사림의 영수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짐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종주가 되는 위상을 누리게 되었던 인물입니다.


정몽주의 인생에서 주목할만한 3가지 사건을 부각한다면 정몽주를 과거에 합격시켜 주었던 시험감독관인 지공 거(知貢擧)로써 좌주- 문생 관계였던 김득배의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여 스승의 시신을 용감하게 거두면서 바쳤던 제문(祭文)이 그 첫 번째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 원나라 말기 홍건족 20만이 침입하여 공민왕은 경북 안동까지 몽진을 하여야 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총병관 정세운은 장군 안우, 김득배, 이방실과 함께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족 10만을 죽이고 10만을 축출하는 대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질시를 받았던 것처럼 안동까지 도망갔던 공민왕은 권력을 공유할 수 없다는 비정한 진리에 따라 먼저 총병관 정세운을 장군들을 통하여 제거하고 다시 순차적으로 승리의 영광을 누리던 장군들도 제거하였습니다. 김영수는 <건국의 정치>에서 공민왕은 "스스로를 보전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도 안 되며, 필요에 따라서는 선인도 악인도 될 줄 알아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법칙에 따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스승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26세의 정몽주는 인간 세계의 부조리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묻고 있습니다.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 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하늘일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를 선창 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고려사 열전 26)" 정몽주는 하늘이 착한 자를 복주고 악한 자를 벌주는 것이 맞는 것이냐는 질문을 26세에 스승 김득배의 조문에서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도 찬성하였고 우왕과 창왕이 왕 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며 이들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추대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훈구파들은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에게 충성했다는 이유로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고 비판을 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으로 모셨던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일에 가담했으므로 충신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어찌 되었건 정몽주는 공자를 따르는 유학자로서 승려인 찬영을 스승으로 삼으려는 공양왕에게 반대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자의 도는 모든 일용의 일상사에 있습니다. 음식과 남녀는 모든 사람이 같이하는 바이니 거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으니, 요순의 도가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략) 저 불씨의 교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과 절연하여 남녀를 끊고, 홀로 암혈에 앉아 풀로 짠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관공 적멸을 숭상하니, 어찌 이것이 정상적인 도이겠습니까?"(고려사 열전 30)


김영수는 그의 책에서 14세기 말의 한국에서는 정신적 영역과 정치체제 전체를 성리학과 같이 세속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유로 재편성하려는 노력이 비상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힘과 이해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정복하려는 노력이며, 인간의 정체성을 오로지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만 근거 지우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정몽주라는 이색 학파의 수제자를 통하여 다음 시대를 이끌고 갈 이념이 개화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정몽주는 외롭지만 공양왕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반이성계 반대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391년 9월 이성계의 브래인인 정도천이 축출되었고 정몽주는 대간 김진양에게 지시하여 탄핵을 주도하였습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천한 근본을 가리고자 하여 본 주인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하기 어려우므로 참언으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을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조준은 (중략) 남은, 남재 등은 ~ 윤소종, 조박 등은 ~(고려사 열전 30 김진양)


같은 스승 이색을 모시고 가장 친한 벗으로 살았던 정도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신분문제를 거론하며 공격하였습니다. 정몽주의 공격에 이성계 세력은 우왕좌왕하였고 주장이었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중심을 잃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방원은 과감하게 정몽주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방원은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그와 그의 집안이 멸망당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성계가 반대를 하고, 이성계가 가장 신임하던 장군 이두란도 이성계의 뜻이라면서 반대하던 정몽주의 암살을 결행한 사람은 이방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태조 이성계 시절 간신이라는 평가를 받던 정몽주가 태종 이방원의 시대가 시작되자 정도전을 격하시키기 위하여 정몽주를 높이기 시작하였고 사림의 시대가 오자 정몽주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육신 사건 때 정보라는 인물이 연루되어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세조가 누구냐고 묻자 정몽주 손자라는 말을 듣고 급히 살려내서 영일로 귀양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밉보인 스승 조지서를 처형할 때도 아내가 정몽주의 증손녀라서 연좌제로 같이 처형되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0년 박정희 시대에는 효와 충절의 상징으로 교과서에 등장시켜 부각했으나 6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불패의 장군 이성계 밑에서 문관으로 수행하면서 치밀한 일처리를 보였던 정몽주는 1380년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대승을 거두고 조상의 고향 전주(全州)에 들려 종친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보이자 이에 분노하는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소개한 사람이 정몽주이고 결국 이성계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결말을 맞는 모습이나 죽었지만 오히려 살았을 때보다 위광이 빛나는 모습을 보면 조조에게 수많은 참모들을 소개하고 결국 죽임을 당한 순욱이 생각나고 순욱의 후손이 조조의 후손 황제 조모를 몰아내고 진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것도 비슷한 데자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려말에 정몽주가 있다면 조선말에 누구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조선의 고위관리로 있으면서 나라를 살리려고 목숨을 걸었던 인물, 누가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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